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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93)화 (93/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93화

아우라는 무감한 눈으로 카를을 보았다.

‘왜 또 왔을까.’

아우라가 보기에 카를은 너무 제멋대로였다. 분명 그녀가 먼저 찾기 전까진 오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나. 게다가 자신을 증오하라느니, 핀을 찾으라느니 그런 일방적인 말만 남기고 간 주제에.

“삼촌.”

리엘이 카를을 보고 인사를 했다. 카를이 리엘에게 손을 살살 흔들어 주었다.

리엘은 두 사람 사이에서 흘긋 눈치를 보았다. 어리다곤 하지만 어른들의 불편한 기류를 못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며칠 전 카를이 찾아왔을 때도 분명 이상함을 느꼈을 것이다.

아우라는 리엘을 불안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많이 바쁠 텐데.”

아우라가 카를에게 애써 상냥하게 물었다. 카를은 속으로 그런 아우라를 웃어넘겼다.

‘착해 빠져서는.’

인사도 받았겠다, 카를이 천천히 방으로 들어왔다.\

나가.

아우라는 딱 그렇게 말하고 싶은 얼굴이었다.

저벅저벅 걸어오던 카를이 테이블 앞에 멈춰 섰다. 우뚝 선 그가 두 사람을 번갈아 내려다보았다.

아우라가 리엘에게 말했다.

“리엘.”

“응.”

“삼촌께서 할 말이 있으신 것 같으니 자리를 좀 피해 줄래?”

“아, 응. 알았어.”

리엘이 나가면 아우라는 바로 카를에게 말할 작정이었다. 나가라고.

리엘이 의자에서 내려오려고 할 때였다. 카를이 그런 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야. 나갈 필요 없어. 오늘은 황후가 아니라 리엘을 보러 온 거라서.”

“……저를요?”

리엘이 어색하게 되물었다. 카를이 리엘의 앞에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아우라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대체 무슨 생각이야?’

아우라는 이내 관심을 거뒀다. 리엘을 보러 왔다고 했으니. 그녀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네가 선생들도 없이 이궁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나도 알아야 하잖아.”

“아…… 잘 지내고 있어요, 삼촌.”

“선생들이 없다고 놀고만 있는 건 아니겠지?”

카를이 조금 짓궂게 물었다. 그러자 리엘이 얼른 대답했다.

“책도 많이 읽고 예법 공부도 엄청나게 하고 있어요. 선생은 필요 없어요. 황후 폐하가 다 가르쳐 주니까요.”

“그래?”

카를이 아우라를 슬쩍 보았다. 흰 턱선이 많이 말라 있었다. 그 아래로 곧게 내려오는 목덜미도.

“네. 별궁에 있을 때보다 훨씬 잘 지내고 있어요.”

“…….”

“여기에…… 계속 있고 싶은데.”

리엘은 카를이 자신을 재미없는 선생들만 가득한 별궁으로 보낼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카를이 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여기 계속 있어. 황후 폐하가 있는 동안에는.”

“……네.”

리엘이 올라가는 입꼬리를 꾹 눌렀다. 너무 슬프거나 기쁜 감정을 숨기는 것. 그건 리엘이 요즘 배운 예법 중 하나였다. 이즈음에 적절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화술 역시.

“삼촌은 잘 지내고 계세요?”

“나는 그러진 못해.”

“왜요?”

“여기저기가 아파서.”

아우라는 무의식적으로 카를을 살폈다. 살이 많이 빠졌고, 피곤이 쌓인 듯했다. 당연한 예상이겠지만 수면 문제를 겪는 것 같았다.

“어디가 아파요?”

“온갖 군데가 다.”

리엘은 위로에 능숙하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렇게 묻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니까 어디가요?”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파.”

아우라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리엘이 맞장구를 쳤다.

“저도 요즘 마음이 아파요.”

“그래?”

“네. 황후 폐하가 아파서요. 맨날 잠만 자고.”

“착하구나.”

카를이 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의 시선이 아우라에게 닿았다. 정확히는 그녀의 손목에. 아우라의 손목에는 여전히 손수건이 감겨 있었다.

카를은 그 손을 잡았다. 아우라는 손을 빼려다가 리엘을 의식해 참았다. 그는 상처가 있을 자리를 엄지로 훑었다. 손수건의 올 하나하나가 느껴질 만큼 천천히.

아우라는 기분이 이상했다. 분명 손수건이 있는데, 마치 그가 상처를 바로 만지는 것 같았다.

“황후 폐하가 리엘을 위해서라도 빨리 낫는 게 좋겠어. 그렇지?”

카를은 리엘에게 말했다. 리엘이 조금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간질간질한 장면이 눈앞에서 지나간 것 같았다.

‘티는 잘 안 내지만, 역시 그 누구보다도 친한 게 분명해.’

리엘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씩 미소를 지었다.

카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아우라에게 뭔가를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아우라는 시종 고요하고 냉담했다. 그녀는 이제 혼란스러워하지조차 않았다.

그런 그녀를 보고 있노라니 카를은 민망해졌다. 오지 않겠다고 해 놓고 또 찾아온 일. 충동을 못 이겨 상처를 더듬은 일. 참으로 없어 보이게 어린애를 내세워 말을 건 일. 그녀가 속으로 비웃어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얼굴을 보니 살 것 같았다.

“난 갈게.”

누구에게 하는 건지도 모를 인사를 남기고 카를이 방을 나갔다. 아우라는 그제야 긴 숨을 뱉어 냈다.

***

아우라는 멍하니 리엘이 책 읽는 걸 지켜봤다.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파.’

그 말이 아우라의 머릿속에 쉼 없이 맴돌았다. 별것도 아닌 그 말이 뭐라고.

아우라는 손목에 감긴 손수건을 바라보았다. 카를의 손길이 아직 묻어 있는 것처럼 괜히 느낌이 이상했다. 그가 떠난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랬다.

아우라는 결국 협탁으로 가서 리엘을 등지고 손수건을 풀었다. 그리고 다른 손수건으로 손목을 꽉 감았다.

“책을 마저 읽고 있어, 리엘. 모르는 건 산책 좀 다녀와서 알려 줄게.”

“응, 알았어.”

리엘은 기분 좋은 얼굴로 다시 책을 봤다. 아까 카를과 긴 대화를 나눈 게 신기한 모양이었다. 아우라는 옷장에서 외투를 꺼냈다.

얇은 가을 외투를 어깨에 대충 걸치고 방을 나섰을 때였다. 어디선가 희미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그녀는 소리를 따라갔다. 살짝 열린 응접실 문틈 사이로 엘리제가 울고 있었다.

“엘리제?”

“……폐하.”

엘리제의 얼굴은 눈물로 엉망진창이었다. 아우라가 얼른 그녀의 곁에 앉았다.

“무슨 일 있어? 카를이 다녀갔던데.”

“유언장을 찾았습니다…….”

엘리제가 울음 섞인 웃음을 지었다. 그 뺨에 눈물이 한 줄기 흘렀다. 그것만으로도 아우라는 유언장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또 오늘 카를이 이궁을 찾은 이유도.

아우라가 엘리제를 끌어안았다.

“……잘됐구나, 엘리제.”

엘리제가 울음을 참았다. 그러나 그녀의 눈물이 자꾸 아우라의 어깨를 적셨다.

“이상해요. 울 때가 아닌 걸 아는데…… 이제부터 정말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하는데…….”

엘리제가 아우라를 마주 보았다.

“유언장 공개를 미루기로 했어요. 삼촌을 단죄할 기회를 잡을 때까지. 제가…… 제가 잘하고 있는 걸까요? 욕심을 부리다가 일을 다 그르칠까 봐 두려워요.”

그녀는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렵게 찾아온 기회였다. 복수심 때문에 뜸을 들이는 게 무섭고 불안할 거였다.

아우라가 엘리제의 어깨를 가만히 잡았다.

“말했잖아. 영애가 원하는 게 있다면 끝까지 물어 잡으라고. 테인 공작을 이대로 놓아주면 영애는 평생 후회할 거야.”

“…….”

“물론 일을 그르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래도 후회하진 않을 거야. ……영애라면.”

아우라도 그랬다. 카를에게 속았을지언정 핀을 찾는 걸 후회해 본 적은 없었다.

엘리제가 눈물을 닦으며 웃었다.

“맞아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강해질게요. 황후 폐하처럼.”

‘아니. 나는 강하지 않아.’

진정으로 강했다면 여태껏 이궁에 틀어박히지 않았을 것이다. 카를에게 받은 상처를 일찍이 털어 냈을 테니. 그리고 다시 핀을 얻기 위해 애썼을 것이다. 이렇게 지쳐 있을 게 아니라.

“따뜻한 물을 마시면서 진정하도록 해. 나는 산책을 좀 다녀올 테니.”

“네, 폐하.”

엘리제가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아우라는 외투를 걸치고 정원으로 나갔다. 초가을 바람이 불어왔다.

엘리제의 일 때문이었을까. 내내 멍했던 그녀의 머릿속 안개가 조금이나마 걷힌 듯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카를의 말들이 스며들어 왔다.

‘날 증오해.’

‘다른 마음은 다 거둬도 그건 거두지 마.’

‘네게는 핀만이 전부였잖아. 황궁에 들어온 순간부터.’

아우라의 속을 난해하게 만들었던 그 말들. 그리고 좀처럼 아우라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말.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파.’

카를을 만나면 항상 이런 식이었다. 생각이 많아지고 그의 의도가 궁금해졌으며…… 결국 그의 말에 마음이 기울었다.

그녀는 연못의 다리로 걸어갔다. 난간을 꽉 붙잡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맑은 물 아래에서 금붕어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하아…….”

숨을 길게 내쉬었다. 모든 게 그림 같았고 평화로웠다. 정말로, 그저 평화롭기만 했다.

아우라도 알고 있었다. 이대로 살려면 살 수도 있다는 것을. 현실로부터 몸을 숨기고, 모든 걸 포기하고. 연못을 편안하게 떠다니는 금붕어처럼.

하지만 이궁을 나가면?

그가 과연 자신이 핀을 갖도록 둘까. 핀이란 그저 제 곁에 자신을 두게 할 수단이 아닌가. 저 금붕어를 어항에 담아 방에 두는 것처럼.

어항 안에서 먹이를 찾아 발악하듯 돌아다니는 금붕어. 핀을 찾는 자신의 모습이 딱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한 번 더 바람이 불어왔다. 아까보다 좀 더 강한 바람이었다. 아우라의 머리칼이 흩날렸다.

아우라는 고개를 들어 이궁 너머를 보았다. 저 멀리 본궁이 솟아 있었다.

“…….”

결국 답은 하나였다. 카를이 뭐라 하건 자신을 믿는 것.

“……좋아.”

아우라가 작게 중얼거렸다.

기꺼이 어항으로 들어가 줄 생각이었다. 마지막엔 그 어항을 깨어 버리면 그만이니.

또한 그 어항을 깬다면 확실히 깨 줄 작정이었다. 다시는 자신을 그 안에 넣을 수 없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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