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92)화 (92/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92화

며칠이 지나도록 이궁에선 별다른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들은 슬슬 황후의 의중을 궁금해했다. 병이 들어 이궁으로 갔다곤 하지만 이렇다 할 병명도 알려지지 않았으니.

그리고 그 궁금증은 국무 회의에서 터져 나왔다.

국정의 주요 사안에 대한 논의가 끝났을 무렵이었다. 한 대신이 카를에게 물었다.

“폐하, 황후 폐하의 몸은 좀 어떠십니까?”

“조금만 더 쉬면 나을 것 같소.”

대신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조금이라면 얼마나 더?

“치료를…… 꼭 이궁에서 받으셔야 할 이유라도 있으신 겁니까?”

“본궁은 시끄러우니까. 쉬기엔 좋지 않지.”

“하지만 이제 곧 폐하의 탄신제가 아닙니까. 탄신제는 황후 폐하의 소관인데, 그럼 그 일은 어떻게…….”

“내가 아픈 부인에게 생일상을 받아 좋을 게 뭐가 있겠소.”

카를의 말에 대신들은 입을 다물었다. 황후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그의 심기가 썩 좋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탄신제는 보좌관들이 알아서 할 거요. 그리고 테인 공작.”

카를이 테인 공작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국무 회의에서 얼굴을 보는군. 공작저에서 사라졌다던 조카를 찾은 거요?”

은근한 조롱 조에 테인 공작이 테이블 밑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엘리제가 도망친 후 테인 공작은 그녀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어떤 놈팡이와 마차를 탔다는 정보까지는 입수했다. 사람들은 엘리제가 사랑의 도피를 했을 거라고 수군거렸다.

하지만 테인 공작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는 다른 것도 아니고 핀을 훔쳐 갔다.

제국에서 핀이 필요한 사람. 라이언이거나 황제 부부였다. 가능성은 반반이었으나 고려해야 할 건 또 있었다.

바로 엘리제의 성품.

엘리제는 죽으면 죽었지 반역자에게 동조할 사람은 아니었다. 즉, 황제 부부 중 누군가가 엘리제를 숨겼다는 뜻이었다.

테인 공작이 울분을 꽉 누르며 대답했다.

“아직 찾질 못했습니다.”

“저런.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내게 말하시오. 아끼는 조카딸을 그렇게 잃도록 둘 수 있나.”

카를이 무감하게 말했다.

대신들은 내심 생각했다. 엘리제가 돌아온다 한들 그녀가 후궁이 될 일은 없을 거라고.

테인 공작은 일이 단단히 꼬여 감을 느꼈다.

‘엘리제를 후궁으로 받아 주는 척했으면서, 이제 와서 저렇게 군다고?’

농락도 이런 농락이 없었다. 라이언과 등지면서까지 황실에 충성을 보였거늘.

“……네, 폐하. 최선을 다해, 정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제 조카를 찾을 생각입니다. 지극한 걱정과 관심 감사합니다.”

그 오기 섞인 말에 카를이 미소를 지었다. 국무 회의는 그렇게 끝났다.

카를은 회의장을 떠나며 생각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거지.’

테인 공작이 가진 수단과 쓸 수 있는 방법들. 당연히 얕봐선 안 됐다. 이제 더는 황실에 수그리고 들어올 마음도 없는 듯했고.

‘그래. 분노하고 움직여라. 그래야 잡을 꼬리가 보이는 법이니.’

복도를 걷는 카를에게 조쉬와 테오가 다가왔다.

“폐하.”

“급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테오가 지나다니는 대신들을 의식하며 작게 말했다.

“오늘 새벽, 선대 공작의 유언장을 찾았습니다.”

카를의 눈이 커졌다.

“정말인가?”

“네. 죽은 집사가 가꾸던 야생화 화단 밑에 묻혀 있었습니다.”

“입수했나?”

“네. 유언장은 새벽 배로 운반했고, 조금 전 제게 전달되었습니다.”

언제까지 엘리제를 숨겨 둘 수만은 없는 일. 이제야 일이 진행되는 느낌이었다.

“일단 집무실로 가지.”

카를의 말대로 그들은 서둘러 집무실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조쉬가 품에서 유언장을 꺼내 바쳤다.

카를은 유언장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모두의 예상대로 엘리제에게 공작 위를 물려준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거기다 공작가의 공식적인 인장까지. 완벽한 유언장이었다.

그리고 유언장 뒤에 한 장의 편지가 더 있었다.

「나의 사랑하는 딸이자 후대 공작이 될 엘리제에게 개인적으로 전함.」

그 내용은 테인가를 이끌 새 가주에 전하는 조언과 훈계였다. 그가 엘리제에게 거는 기대가 여실히 느껴지는 듯했다.

그중에는 가주로서 황실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적혀 있었다. 편지를 읽던 카를이 멈칫했다.

「황가는 충성을 다해 모셔야 하지만, 수트라의 대공과는 부디 거리를 지키도록 해라.」

‘공작이 왜 이런 소리를…….’

「호기로운 젊었던 날, 실시아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그때 우연히 대공의 어머니 릴리안 산트라를 먼발치에서 본 적 있지. 워낙 미인이었고, 수많은 아랫사람을 거느리고 있었기에 눈에 띄었다.

그리고 몇 년 후, 선대 황제께서 수트라에 가셨다가 한 평민와 하룻밤을 보내셨다고 했다. 말이 평민이지 사실을 노예라는 걸 다들 쉬쉬하고 있었지. 그리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노예가 바로 릴리안이라고 하더구나.

엘리제. 죽고 없는 릴리안의 정체에 대한 추측은 접어 두자꾸나. 또 실시아란 별일이 다 일어나는 곳이니 말이다. 다만 정체가 불분명한 어머니 밑에서 자란 대공을 경계하란 조언을 남길 순 있겠구나.」

카를은 편지를 다 읽고도 한참을 생각에 빠져 있었다.

‘릴리안 산트라…….’

그는 직감했다. 라이언과 관련한 문제에서 그녀가 중요한 키가 되리란 것을.

카를은 유언장과 편지를 테오에게 넘겼다.

“테오, 엘리제와 만나기 전에 이것들을 한 부 필사하도록 해.”

“네.”

조쉬가 말했다.

“그럼 이따 늦은 오후에 엘리제 영애를 비밀리에 응접실로 데려오겠습니다.”

카를이 고개를 끄덕이려 하다가 멈칫했다.

“잠깐.”

“예?”

한참 생각에 빠져 있던 카를이 말했다.

“우리가 이궁으로 가지.”

“……직접 가시게요?”

“그편이 덜 번거롭잖아.”

두 기사는 시선을 교환했다.

맞는 소리이긴 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영애를 본궁까지 데려오는 일. 황제가 황후를 보러 간다는 명목으로 이궁에 가는 일. 후자가 훨씬 자연스러우니.

하지만 두 사람은 짐작할 수 있었다. 카를이 그저 명목 때문에 이궁에 가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

늦은 오후.

황제는 최측근들과 함께 이궁을 찾았다. 소식을 들은 엘리제가 정원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제는 많이 긴장한 상태였다. 그토록 기다렸던, 그녀의 운명을 결정지을 유언장이었다.

“황후는?”

카를은 인사 대신 물었다.

“주무십니다.”

“이 낮에?”

아우라는 결코 게으른 편이 아니었다. 낮잠을 자는 일은 흔치 않았다. 엘리제가 말했다.

“요즘 밤낮 없이 많이 주무십니다.”

“대화는 해 봤나?”

“그게…… 다시 말수가 많이 주셨습니다.”

“내가 다녀간 이후에?”

엘리제는 차마 그렇다고는 말 못 했다. 카를이 다녀갔던 날, 방은 엉망이 됐고 아우라는 기절하듯 잠들어 있었다. 그 후로 아우라는 내내 잠만 잤다. 이 현실에서 도망이라도 치듯이.

카를은 침실 쪽을 빤히 보았다.

‘소식을 들었으니 됐어. 제 발로 나오기 전에는 만나지 않는 게 좋겠지.’

엘리제 일을 핑계 삼아 왔지만 여기서 물러나는 게 맞았다. 아우라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 건 한 번이면 족했다.

그들은 이궁의 작은 응접실로 향했다. 말이 응접실이지 여인들의 수다나 음악 감상을 위한 방이었다. 남자 셋이나 들어서니 방이 꽉 찬 느낌이었다.

“오래 기다렸군, 엘리제.”

카를이 유언장을 엘리제에게 내밀었다. 엘리제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았다.

그녀는 침착하게 유언장을 읽어 내려갔다. 몇 번이나 침을 삼켰으며 불안정한 호흡을 내뱉었다.

“아버님의 필체가 맞네요.”

그녀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그래도 그녀는 끝까지 평정심을 유지했다. 이윽고 엘리제가 편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애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그렇게 말할 필요 없어. 황실을 위한 일이기도 하니까.”

“이제 어떻게 할까요? 바로 이 유언장을 밝혀도 되겠습니까?”

그녀는 은연중에 그렇게 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그런데 그때 카를이 입을 열었다.

“엘리제.”

“네, 폐하.”

“지금 이 유언장을 공개하면 그대는 공작 위를 되찾을 수 있지. 하지만 그게 다야.”

“다라는 말씀은…….”

“이것만으로 테인 공작을 단죄할 순 없어.”

유언장이 없었기에 나이 많은 남자가 이어받았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작위를 엘리제에게 돌려준다면 죄를 묻기도 어려웠다.

결국 엘리제의 뜻에 달린 것이었다. 이대로 공작 위를 되찾고 그녀의 삼촌을 풀어 줄 것인가, 아니면 그를 단죄할 기회를 노릴 것인가.

사실 엘리제는 이쯤 하고 물러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녀의 순한 성품으로 미루어 봐도 그랬다.

“그렇다면, 단죄할 방법을 알고 계십니까?”

의외의 대답에 카를이 미소를 지었다.

“그가 조금만 더 공작 행세를 하게 두면 단죄할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유언장 공개를 늦추잔 말씀이시군요.”

“그래. 엘리제 네가 좀 불편하긴 하겠지만.”

“저는 괜찮습니다.”

엘리제가 딱 잘라 말했다.

“알려 주십시오. 폐하께서 짐작하시는 삼촌의 죄가 무엇인지.”

“그간 공작가에 사람을 좀 붙였지. 며칠은 조카를 찾지 못해 안달하다가…… 어디론가 사람을 보내더군.”

“어디로 말씀이십니까?”

“실시아.”

엘리제가 고개를 갸웃했다. 실시아가 뭐 어쨌다는 말인가.

카를이 덧붙였다.

“내 짐작에는, 실시아에 라이언이 있어.”

***

아우라는 긴 잠에서 깨어났다. 너무 많이 자서일까. 현기증이 돌았다.

“……?”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침대 옆 테이블에서 리엘이 책을 읽고 있었다.

“일어났다.”

리엘이 씩 웃었다. 그러자 아우라도 웃었다. 아우라는 물을 한 잔 따라 마셨다. 오랜 잠에 목이 말랐다.

“책을 보다가 모르는 게 있어서 일어나길 기다리고 있었어.”

공부를 지루해하는 리엘이 그럴 리가 없었다. 그저 곁을 지킨 것이고, 말을 걸 핑계를 찾았으리라. 이런 리엘이 아니었다면 아우라는 더 무너졌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침대에서 벗어나 리엘의 앞에 앉았다. 리엘의 질문이라면 몇 번이라도 받아 줄 수 있으니.

“가르쳐 줄게. 뭐든 물어봐.”

“이거 있잖아……. 이 단어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아, 이건…….”

아우라가 설명을 시작하려던 순간이었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문을 보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카를이 문기둥에 기대어 서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