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90화
엘리제의 편지는 길지 않았다. 하지만 카를을 고민에 빠지게 하는 글이었다.
「……해서, 이궁에 계신 황후 폐하의 곁을 지킬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황후 폐하께서 제가 드린 물건 때문에 어려움을 겪으셨으니 그 죄를 조금이나마 갚고 싶습니다. 작은 말동무라도 좋고, 시녀도 좋으니 힘이 되어 드리면…….」
한마디로 이궁으로 가겠다는 것이었다.
이궁은 사람을 숨기기에 알맞았다. 햇빛 한 번 보지 못한 엘리제에게도 좋을 거였다.
문제는 아우라의 마음이었다. 이 상황에서 엘리제를 보는 게 약일까 독일까. 카를은 잘 결정해야 했다.
‘지금쯤 아우라는……. 아우라라는 여자는…….’
답은 금방 나왔다.
‘엘리제에게 고마워하고 있겠지. 자신을 믿고 핀을 줬으니.’
“테오.”
“네.”
“이궁에 연락을 넣어서 엘리제가 가도 좋을지 물어봐. 내가 중간에서 말을 전했다는 건 빼고 엘리제가 직접 연락한 것처럼.”
“아…… 네.”
테오는 조심히 집무실을 나섰다.
카를은 깃펜을 내려놓고 미간을 짚었다. 잘 느껴지지도 않던 술기운이 올라왔다.
‘모두 이궁으로 가 버리는군.’
그는 피식 웃었다. 이궁에 가 보고 싶은 마음이야 그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보내 해결될 일이라면 수백 통을 보냈을 것이다.
이틀 전, 결국 충동을 못 이기고 이궁에 갔다. 리엘을 껴안던 작은 등을 떠올렸다. 미세하게 떨리던 어깨도.
더 볼 것도 없었다. 카를은 그대로 돌아서 이궁을 도망치듯 나섰다. 아직은 다가설 때가 아니었다.
‘그래도…… 더는 힘든데.’
하루하루 지날수록 더 그랬다. 카를은 제 한계를 시험하는 기분이었다.
탁.
그가 빈 술잔을 내려놓았다.
***
리엘은 정말 이궁에 머물렀다.
이틀 정도는 괜찮았다. 리엘은 종일 떠들고, 먹었으며, 가끔 아우라를 웃게 했다. 하지만 그 이상 리엘을 놀게 둘 순 없었다.
아우라의 상황상 미나와 리엘 외엔 이궁에 아무도 들일 수 없었다. 리엘의 선생도 마찬가지였다. 하는 수 없이 아우라가 직접 리엘을 공부시키고 가르쳤다. 공부라고 해 봤자 책을 읽히는 수준이지만. 가끔 리엘이 뭔가를 물으면 아우라는 빠짐없이 대답을 해 줬다.
지금도 리엘은 아우라의 설명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황후 폐하는 똑똑한가 봐. 교사들보다 아는 게 많은 것 같아.”
“음…….”
아우라가 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칭찬해 줘서 고마워.”
“건강해지기만 하면 완벽할 텐데. 그렇지?”
그러니 어서 빨리 건강해지라는 귀여운 압박이었다. 아우라는 말없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건강이라…….’
몸 상태야 많이 좋아졌다. 손목의 실밥도 풀었고. 문제는 어디까지나 마음이었다.
카를은 여태껏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우라를 위해서였을까, 혹은 그저 무관심해진 걸까. 이 단순한 유추마저도 잘 안 되었다. 그에 관해서는 마치 어딘가가 고장 난 것 같았다.
‘……어쨌거나 지금은 보고 싶지 않아. 어쩌면 앞으로도.’
그때 미나가 방에 들어왔다.
“폐하, 엘리제 영애가 찾아왔습니다.”
“왔구나. 들어오라고 해.”
아우라는 어제 엘리제의 연락을 받았다. 이궁에 오고 싶다고 하기에 그러라고 했다.
이윽고 엘리제가 침실로 들어왔다.
“엘리제.”
“황후 폐하.”
그녀의 시선이 아우라의 손목에 가 닿았다. 리엘이 볼까 봐 손목엔 손수건을 감아 둔 채였다. 엘리제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아우라가 말했다.
“리엘, 미나와 정원에서 좀 놀다 들어올래?”
“응!”
마침 책 보는 게 지겨웠던 리엘이 밖으로 튀어 나갔다. 엘리제가 겨우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죄송합니다, 황후 폐하. 제가…… 그게…… 사실은 황제 폐하께서 말씀해 주셨어요.”
카를의 이름에 아우라가 손끝을 움찔했다.
“무엇을?”
“핀이 황후 폐하의 목숨을 앗아 갈 수도 있다는 걸요. 그런 말을 들어 놓고도…… 드렸던 거예요.”
“그래. 잘했어.”
“정말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안 드렸을 거예요.”
엘리제의 눈에서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아우라가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아니. 영애는 알았어도 줬을 거야.”
“…….”
“그건 약속이었으니까. 줘 놓고 날 살릴 방도를 찾았겠지.”
엘리제는 차마 아니라고 하지 못했다.
“네가 그런 고지식한 인간이기에 나도 영애를 믿었어. 그러니 인사는 내가 해야지. 고맙다고.”
그녀의 인사엔 어쩐지 체념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엘리제는 머뭇거리다가 아우라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제가 곁에서 폐하를 모시게 해 주세요. 이궁을 떠나실 때까지만이라도.”
“죄책감 때문이야? 그렇다면 굳이-”
“네, 맞아요. 죄책감 때문이에요. 말씀하셨던 것처럼 전 답답하고 고지식한 인간이라서요.”
“그래서? 공작가 영애가 시녀 노릇이라도 하려고?”
“모르겠어요. 외람된 말이지만…….”
엘리제가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황후 폐하께서도 저 못지않게 고지식하신 것 같아서요. 그래서 혼자 두기가…… 불안합니다.”
아우라는 힘없이 웃었다.
삼촌을 피해 황궁에 숨어 있는 주제에 누가 누굴 걱정하는가. 불안의 저울을 달아 보면 한없이 엘리제 쪽으로 기울 텐데. 하지만 엘리제의 이런 면이 아우라는 싫지 않았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녀는 엘리제를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그때부터였나.’
‘나에게 너는 정말,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어. 무슨 말인지 알겠어?’
불쑥 튀어나온 기억에 아우라는 잠시 멍해졌다.
“……폐하?”
엘리제의 부름에 아우라가 바로 현실로 돌아왔다.
“……그래. 원한다면 있도록 해. 꼬맹이도 있는 마당에 사람 하나 는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겠어.”
그때 미나가 침실로 들어왔다.
“폐하, 황궁의가 왔습니다.”
“응접실에서 보는 거로 하지. 엘리제, 쉬고 있어.”
“아……! 네, 폐하.”
아우라는 황궁의를 만나기 위해 침실을 나섰다. 엘리제는 그런 아우라의 뒷모습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엘리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아우라는 건강해 보였다. 그러나 아우라의 시종일관 초연한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정말 괜찮으신 걸까…….’
***
“아.”
카를의 손에서 만년필이 미끄러졌다. 만년필은 책상을 도르르 구르더니 바닥에 떨어졌다.
“하아…….”
바닥은 만년필에서 새어 나온 잉크로 더러워졌다. 카를은 만년필을 줍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그 순간 만년필이 서너 개로 흐리게 흩어졌다.
카를은 바닥을 여러 번 더듬었다. 제대로 짚었다고 생각했는데 애먼 잉크만 손에 묻었다.
‘……제정신이 아니군.’
그럴 만도 했다. 잠들지 못하는 건 기본, 술을 마시는 시간이 점점 당겨지고 있었다. 지금은 이른 오후부터 술을 찾고 있으니.
“젠장…….”
카를은 결국 만년필을 포기하고 의자에 몸을 묻었다.
‘제발 이 정도로 만족해. 뜻대로 됐잖아. 아우라를 살렸고, 핀을 궁 밖으로 빼돌렸어.’
하지만 카를은 알고 있었다. 살려만 두는 걸로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 그녀가 점점 건강을 되찾고 있다는 사실로도 부족했다.
그는 아우라가 보고 싶었다.
카를은 멀거니 천장을 보았다. 천장이 느리게 한 바퀴 돌았다.
어젯밤에도 황궁의가 집무실에 다녀갔다.
카를이 황궁의에게 물었다.
“황후의 상태는 어떻던가?”
“많이 나아지셨습니다. 리엘 전하가 곁에 있는 게 도움이 많이 되신 듯합니다.”
‘역시 정신적인 거였군.’
그렇다면 더 골치가 아팠다. 카를이 나타나면 어떤 병이 도질지 모를 일이었다.
“본궁으로 돌아오라는 제안은 해 봤나?”
“네. 명령대로 해 보았으나 원치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대체 왜?”
“그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황궁의가 어렵게 입을 뗐다.
“돌아가야 하는 이유가 없다고요.”
탁.
카를이 자기도 모르게 테이블을 내리쳤다. 황궁의가 침을 꿀꺽 삼켰다.
“돌아와야 할 이유가 없다?”
“……예. 해서…… 실은 본궁에는 황제 폐하가 계시지 않느냐 여쭙기도 했습니다만…….”
“…….”
“갑자기 말씀이 없어지셔서…….”
황궁의가 말끝을 흐렸다. 카를은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돌아갈 이유가 없다.
그 담백한 말이 이렇게 절망스러울 수가 있나 싶었다. 차라리 화를 내며 욕을 하는 게 나았다. 그런 놈 따윈 다신 보고 싶지 않다고 외치는 게 나았다.
카를은 불안했다. 아우라가 영영 이궁에서 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카를이라는 존재를 검게 지워 둔 채 그렇게 그녀가 점점 사라질 것 같았다.
그는 습관처럼 술잔에 손을 댔다. 반쯤 남은 술을 마시려던 순간, 그가 멈칫했다.
“…….”
탁.
그는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손끝으로 잔의 입구를 빙빙 돌렸다.
어쩌면 간단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 자신이 그 마음을 포기하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하면 아우라를 다시 본궁으로 데려올 수 있을지도 몰랐다.
***
다음 날, 리엘은 이궁의 연못에서 신나게 놀고 있었다.
“황후 폐하! 물고기 좀 봐!”
리엘이 금붕어를 따라가며 외쳤다. 아우라와 엘리제는 나무다리에서 그런 리엘을 내려다보았다. 아우라는 리엘에게 대충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애들은 왜 물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릴까. 난 어렸을 때 수영도 못 했는데.”
그 말을 하니 문득 루안이 떠올랐다. 어렸을 적 그를 구하겠다고 호수에 뛰어들었던 순간이.
‘잘 지내고 있을까, 루안.’
사실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그렇게 사라져 버릴 수가 있나 싶어서. 하지만 그녀는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행복을 빌어 주는 수밖에. 나와는 엮이지 않는 게 좋아.’
루안 생각을 하니 자연히 핀이 떠올랐다. 아우라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내가 이곳에 있으면 제니아인들은 그대로 살아가게 되는 거겠지. 하지만…….’
핀은 이제 카를에게 있다. 그러나 아우라는 카를과 맞닥뜨릴 엄두가 안 났다. 그녀는 그저 도망치고만 싶었다. 카를에게서도, 자신의 감정에서도.
그때였다.
“폐하…….”
엘리제가 아우라의 어깨 너머를 보며 중얼거렸다. 아우라는 무심코 뒤를 돌았다. 그리고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다리 끝에는 카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