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89화
아우라는 조금씩 생기를 되찾았다. 제때 식사를 하고 가끔은 정원에서 산책을 했다. 필요한 경우에는 조금이나마 말을 했다. 이궁은 그렇게 평화를 찾아 가고 있었다.
아우라가 침실에서 책을 읽고 있을 때였다.
똑똑.
미나가 들어와 짐짓 명랑하게 물었다.
“폐하, 식사는 맛있게 하셨습니까?”
“응.”
아우라가 짧게 대답하곤 다시 책에 시선을 두었다. 협탁의 쟁반엔 수프가 반쯤 남아 있었다.
“저, 폐하. 오늘은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이라는 말에 아우라가 흠칫했다. 혹시 카를이 왔나 싶었다.
생각만으로도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그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아우라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아니, 결정권이라는 게 있긴 할까.
그를 보면 울 것도 같고, 미친 듯이 웃을 것도 같았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이 검은 어둠에 훅 덮였다.
확실한 건 한 가지였다.
‘싫어.’
아우라가 그렇게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황후 폐하!”
열린 문틈으로 리엘이 툭 튀어나왔다. 그새 조금 더 자란 리엘이 아우라의 침대로 뛰어들었다.
리엘은 와앙-! 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황후 폐하! 아프지 마아…….”
리엘이 아우라를 꽉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했다. 아우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미나를 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는 듯이.
미나가 민망한 얼굴로 말했다.
“그게…… 폐하께서 크게 아프시다고 말씀드렸더니 이렇게…….”
공부고 뭐고 이궁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황후 폐하! 벌써 며칠이나 아팠다며.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나는 이제 알았잖아! 내가 이제 곁에 있어 줄게. 응?”
리엘이 고개를 들었다. 황금빛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아우라는 이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 끝에 별안간 눈물이 고였다.
리엘은 마치 아우라를 대신해서 울어 주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예쁘고 소중했다. 그리고 예쁘고 소중한 것들을 보면 눈물이 나기 마련이었다. 이렇게 삶의 낭떠러지 앞에 선 기분일 때는 더더욱.
아우라는 리엘을 확 끌어안았다.
“왜 그래……. 황후 폐하, 정말 많이 아파?”
리엘이 울먹이며 물었다. 아우라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안 아파.”
“그럼 왜 울어…….”
리엘이 물었다. 아우라는 그런 리엘에게 매달리듯 작은 몸을 꽉 안을 뿐이었다. 꿰맨 손목에 아우라의 눈물이 떨어졌다. 잊고 있던 통증이 올라왔다.
아팠다. 아프다는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도 알고 있었다. 이 아픔을 대면하고 감당해야만 이궁을 나갈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지금으로선 역시 자신이 없었다. 이렇게 우는 것조차 리엘이 아니었다면 힘들었을 것이다.
아우라에게 안겨 있던 리엘이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어?’
리엘이 창밖을 다시 살펴보았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분명 삼촌이 있었던 것 같은데. 잘못 봤나?’
그때 아우라가 리엘을 놓아주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리엘에게 말했다.
“고마워, 리엘.”
리엘이 쑥스럽게 웃었다. 아우라가 리엘의 눈물 자국을 닦아 주었다.
***
엘리제는 커튼 틈새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가을의 초입에 들어선 황궁 정원이 알록달록했다.
황궁에서의 생활은 지루함과의 싸움이었다. 공작가를 나와 황궁에 온 후 그녀는 햇빛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황제 앞에서는 초연하게 굴었지만 걱정이 많았다. 그녀는 테인 공작 모르게 영지인에게 해 주는 일이 많았다. 빈민 구호라던가, 교육 후원이라던가.
아니나 다를까, 어제 테오가 와서 전하길 영지의 분위기가 좋지 않다고 했다.
‘빈민이 늘어나니 범죄율도 높아졌다지. 치안에 너무 힘을 쓰니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엘리제는 제 삼촌의 무능함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녀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건 또 있었다. 역시 어제 테오가 와서 남긴 말 때문이었다.
엘리제와 마주 앉은 테오가 말했다.
“영애께서 황후 폐하께 핀의 조각을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순간 엘리제는 놀랐다. 어째서 이자가 핀에 대해 알고 있는 걸까.
“이 말씀을 드려야 하나 고민이 컸지만, 아무래도 결국 아시게 될 것 같아서요.”
“무슨…… 일이 있나요?”
“자세히 말씀드릴 순 없습니다만…… 그 물건이 황후 폐하를 해치려 했습니다.”
“네? 해치려 했다니요?”
“죽으려 하셨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엘리제는 놀라서 입을 가렸다. 핀의 위험성에 대해선 카를에게 언질을 듣긴 했다. 하지만 그게 정말 그런 일을 벌였다고?
“대체…… 대체 그 물건이 뭐란 말입니까? 뭐길래 폐하께서…….”
“제 입으로 말씀드릴 순 없으나 혹여라도 앞으로 비슷한 일이 생긴다면 부디 조심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테오는 그렇게 말하곤 나가 버렸다. 엘리제는 충격 속에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엘리제는 그 순간을 떠올리며 커튼을 꽉 잡았다.
똑똑.
누군가 노크를 했다. 요즘 이 방에 노크하는 사람은 둘뿐이었다. 카를 혹은 테오. 카를은 좀처럼 엘리제에게 오지 않고 있으니 테오일 것이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예상외의 인물이 방으로 들어섰다. 엘리제는 짐짓 미소를 지어 보였다.
“조쉬 님.”
“잘 지내셨습니까?”
조쉬가 어색하게 꾸벅 인사를 했다. 엘리제가 얼른 그에게 다가갔다.
“수트라의 반역군 토벌에 성공하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아뇨, 뭐…… 일인데요.”
“일단 앉으십시오. 차를 드릴까요?”
“아, 금방 나갈 건데요.”
조쉬가 뻣뻣한 걸음으로 테이블 앞에 앉았다. 엘리제는 싱긋 웃더니 콘솔에서 차를 따랐다.
조쉬는 흘긋 그 뒷모습을 보았다. 수트라로 가기 전보다 더 마른 것 같았다.
‘계속 여기에만 있으면 답답할 텐데.’
엘리제가 차를 들고 몸을 돌렸다. 조쉬는 얼른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드세요.”
“감사합니다, 영애.”
조쉬가 양손으로 차를 받았다. 공작가 영애가 내려 준 차라니. 아들에 손자에게까지 자랑할 만한 일이었다.
“유언장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나요?”
“네. 안 그래도 그 이야기를 드리러 왔습니다. 섬사람들에 대한 수색은 이미 끝났습니다. 따로 누군가에게 유언장을 맡긴 것 같진 않고, 집도 다 뒤졌습니다. 남은 건 땅에 묻었다거나 하는 경우인데…….”
조쉬가 말끝을 흐렸다. 정말 땅에 묻었다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섬을 모두 헤집어야 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혹시 그 집사가 중요한 물건을 둘 만한 곳을 알고 계신지 해서요. 그걸 여쭈러 왔습니다.”
“집사는…….”
엘리제가 그를 떠올렸다. 백발에 안경을 꼈던 집사. 옷이 항상 깔끔하고 일에 실수가 없었다. 학식도 높아서 엘리제에게 많은 걸 가르쳐 주기도 했다. 한마디로 그는 타고난 집사였다.
‘만약 집사가 섬으로 갔다면…….’
“화단은 살펴보셨나요?”
“그의 집에 화단 같은 건 없었습니다. 속상하시겠지만 작고 초라한 집이었거든요.”
“그래도…… 집사라면 어딘가에는 분명 물을 주고 식물을 가꿨을 겁니다. 그게 그가 평생을 아침마다 해 오던 습관이었으니까요.”
일리 있는 말이었다. 조쉬는 생각했다.
‘하긴, 노인들은 습관을 잘 버리지 못하지. 게다가 집사라는 직업의 특성상 뭔가를 강박적으로 관리할 테고.’
“좋습니다. 그럼 그 섬에 집사의 손을 탄 땅이 있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네. 잘 부탁드려요.”
엘리제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조쉬도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아! 그러고 보니 이걸 드려야겠네요.”
엘리제가 일어나더니 옷장으로 갔다. 옷장 안에는 한 품에 들어오는 크기의 상자가 있었다.
그녀는 상자를 조쉬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구두입니다. 저번에 제게 주셨잖아요.”
“……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엘리제가 황궁에 들어오던 날, 조쉬는 맨발인 그녀에게 구두를 벗어 주었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조쉬 님.”
“예…… 뭐, 아니, 뭘요, 하하…….”
조쉬는 무심코 상자를 열었다. 구두는 새것처럼 윤이 나게 닦여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수가 놓인 하얀 손수건이 하나 있었다.
“이건…….”
“무료하기도 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서 만들었습니다. 재주가 좋은 편이 아니라서 마음에 드실지는 모르겠습니다.”
조쉬는 딱 굳어 버리고 말았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더니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상자를 껴안고 도망치듯 방을 나섰다.
“저기!”
엘리제가 뒤늦게 조쉬를 불렀다. 그러나 문은 이미 닫혀 버린 후였다. 엘리제가 중얼거렸다.
“할 말이…… 남았는데.”
한편 조쉬는 성큼성큼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그의 눈은 당황스러움으로 소용돌이쳤다.
‘여자에게 손수건을 받다니. 심지어 저…… 저 영애에게.’
이런 상황에서 태연한 척하는 재주 같은 건 그에게 없었다.
문득 복도에 장식된 거울에 그의 얼굴이 비쳤다. 조쉬는 홀린 듯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주먹으로 거울을 퉁 쳤다.
“미친놈…… 얼굴은 대체 왜 붉혀?”
***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간. 카를은 집무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책상엔 반쯤 비워진 술병이 있었다. 그는 습관적으로 술잔을 또 비웠다.
피곤으로 가득한 눈이 예민하게 서류를 훑었다. 곁을 지키는 테오는 그런 그가 걱정스러웠다.
‘일을 만들어서 하고 계신 수준인데. 술도 너무 느셨고.’
테오도 이해는 갔다. 일하지 않으면 온갖 생각이 들이닥칠 테니. 밤이 되면 그 증세가 더 심해지니 술을 찾는 것일 테고.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울렸다. 테오가 먼저 밖으로 나갔다. 꼭대기 층을 지키는 병사 하나가 앞에 서 있었다.
“무슨 일이지?”
“엘리제 영애께서 황제 폐하께 이걸 전해 드릴 수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래. 주도록.”
“네, 보좌관님.”
병사는 편지를 건네곤 떠났다. 테오는 그것을 가지고 들어왔다.
“폐하, 엘리제 영애가 편지를 보냈습니다.”
“엘리제가?”
카를의 미간이 미묘하게 좁아졌다. 기어이 아우라에게 핀 조각을 준 그녀에게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줘.”
카를이 손을 내밀었다. 테오는 그 위에 편지를 공손히 올려 두었다. 카를은 편지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