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88화
조쉬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면 아우라를 이해하지 못했을 거다. 내심 황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조쉬는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난 진짜 남녀 관계 같은 건 모르겠다.”
“나도 그 두 분 마음은 진짜 모르겠어. ……그나저나, 내가 따로 받은 임무가 있어.”
“임무?”
“응. 황후 폐하와 그 핀과 관련한 건 같아. 괜찮으면 같이하자.”
지금 조쉬는 당장 받은 임무가 없었다. 승전한 기사는 최대 한 달은 편히 쉴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조쉬는 무척 피곤했다. 오늘 숙소로 돌아가면 한 일주일은 죽은 듯이 잘 작정이었다.
“임무가 뭔데 그래?”
“폐하께서 실시아 공국의 왕가 가계도를 입수하라고 하셔.”
“실시아에 그런 게 어디 있어? 말이 공국이지…… 제멋대로 왕족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반복되는데. 사관이 있어 기록을 했다고 해도 왕가가 바뀌면 휴지 조각이 되었을걸?”
“그 휴지 조각들이 실시아와 카사의 암시장에 나오고 있어.”
“뭐라고?”
결국 그 가계도들을 모자이크처럼 하나씩 맞춰야 한다는 뜻이었다. 딱 봐도 골치 아픈 일이었다. 하지만 저 답답하기 짝이 없는 황제 부부를 돕고 싶기도 했다.
“어때. 같이할래?”
조쉬는 스읍, 숨을 삼켰다.
“……뭐, 좋아. 수트라에 남기고 온 내 부하들이 있으니 실시아로 넘어가 보라고 연락해야겠군.”
“그래. 그렇게 해 줘.”
조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체념 조로 말했다.
“어째 수트라보다 여기가 더 전쟁터 같은데?”
***
아우라는 눈을 떴다.
낯선 풍경에 그녀가 눈을 깜빡였다. 아늑한 나무 천장과 벽이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굳어 있는 목이 뻐근했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어지럼증이 몰려왔다.
‘여긴…… 이궁 같은데.’
머릿속이 몽롱한 안개에 잠긴 듯했다. 여차하면 다시 잠들 것만 같았다.
‘대체 왜 내가 여기에……. 무슨 일이 있었더라.’
그 순간, 머릿속 안개가 걷혔다.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힘겹게 왼손을 드니 손목에 꿰맨 자국이 선연했다.
비로소 모든 것들이 기억났다. 불현듯 솟아오르는 카를의 목소리도.
‘소용없어, 아우라. 봉인은 풀리지 않아. 내가 네게 준 핀은 가짜니까.’
아우라가 손을 툭 떨어뜨렸다. 턱까지 뜨거운 것이 치솟았다. 몸이 저 아래로 푹 꺼지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다시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대로 다시는 깨어나지 않길 바라며.
아우라가 의식을 차린 후 며칠이 지났다. 황궁의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이궁에 들렀다.
“황후 폐하, 손목의 통증은 어떠십니까?”
“…….”
“어지럼증은 없으십니까? 피를 많이 흘리셔서 영향이 있으실 텐데요.”
“…….”
“속이 불편하시거나 두통이 있진 않으십니까?”
“…….”
아우라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녀는 멍한 눈으로 창밖을 내다볼 뿐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시골 풍경을 닮은 정원의 전경도, 푸른 여름 하늘도.
황궁의는 걱정스러웠다. 손목의 상처도 상처지만, 분명 황후는 큰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그는 고민 끝에 물었다.
“……그날 북쪽 탑에서 일어난 일을 기억하십니까?”
아우라가 고개를 스르르 돌려 황궁의를 보았다. 그녀의 텅 빈 눈에 초점이 잡히는 듯하더니 이내 흩어졌다.
아우라는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황궁의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오늘 저녁에 다시 들리겠습니다, 폐하.”
“…….”
황궁의가 조심스럽게 방 밖으로 나섰다. 기다리고 있던 미나가 그에게 물었다.
“황후 폐하께선 어떠신가요?”
황궁의는 고개를 저었다.
“기억은 온전하신 것 같은데 도통 입을 열지 않으시는군요. 일상생활은 어떠십니까? 식사는 잘하고 계신가요?”
“드시는 것도 주무시는 것도 묵묵히 하고 계시긴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말씀은 없으셔서 속만 탑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미나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미나에게만큼은 말문을 열던 아우라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녀에게도 입을 열지 않았다.
황궁의는 한숨을 쉬었다.
“뭐라도 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환경을 바꾼다거나…….”
“그건 아마 쉽지 않을 것 같아요. 황후 폐하를 여기에서 모시라는 황명이 있어서요.”
“아니면 황후 폐하께서 평소 아끼셨던 분을 초대해 보는 건 어떨까요?”
“아끼신 분이라 하신다면…….”
미나는 누군가가 떠올랐다.
“있……긴 합니다만.”
“그럼 시녀장님께서 힘을 써 보세요. 황후 폐하께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황궁의가 떠난 후, 미나는 방으로 들어섰다.
“……폐하.”
미나의 목소리에도 아우라는 반응이 없었다. 흘러내린 긴 머리카락마저도 고요했다. 미나는 아우라가 저러다가 죽을 것만 같았다. 음식을 먹고 물을 마셔도 언젠가는 말라 죽는 게 아닐까 싶었다.
미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뭔가를 다짐한 얼굴로 방을 나섰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아우라가 침대 시트를 꽉 잡았다.
아프다고 시위를 하고 싶은 마음 따윈 없었다. 다른 이들을 걱정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입을 열기가 겁이 났다.
핀을 찾기 위해 온갖 짓을 다 했던 시간. 그 시간이 처음부터 걸레짝이 될 거라는 운명. 그 운명을 카를이 태연하게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 그와 더불어 카를에게 받은 모진 상처들.
그 모든 사실이 아우라를 미치게 하고 있었다. 뭔가를 말하는 순간 감당 못 할 것들이 차올라 터질 것만 같았다.
아우라가 무릎을 모아 웅크려 앉았다.
지금은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다 잊고 싶었다. 카를이 가져갔을 핀의 존재마저도.
***
카를은 개인 서재에 틀어박혀 있었다. 커다란 테이블엔 황가의 가계도가 커다랗게 펼쳐져 있었다.
그 가계도의 끝자락. 그곳에 카를의 시선이 박혔다.
[라이언 카사]
그리고 그의 어머니.
[릴리안 카사]
‘결혼 전 이름은…… 릴리안 산트라.’
릴리안은 평생 수트라에서 살았다고 알려져 있다. 말이 좋아 후궁이지 황제가 버린 하룻밤 여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수트라에서 나고 자란 라이언. 선황은 막냇동생에게 기꺼이 수트라 대공 자리를 내어 주었다.
‘수트라는 쓸모없는 빙하 지대에 지나지 않으니까. 국경 너머엔 마물과 실시아뿐이고.’
하지만 여러모로 상당히 뛰어난 자인 건 확실했다. 북부의 거친 마물을 다루고 실시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만 봐도 그랬다.
‘그런 통치력은 대체 누구에게 배운 걸까. 황자 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도 없는데.’
똑똑.
누군가 서재 문을 두드렸다. 예민한 카를의 미간이 좁아들었다. 테오가 조심스럽게 서재로 들어와 카를을 찾아왔다.
“폐하.”
“여기 있을 땐 들어오지 말라고 했잖아.”
“그게…….”
테오가 조심스레 말했다.
“황후 폐하의 시녀장이 찾아왔습니다.”
카를이 멈칫했다.
“……들여보내.”
“네, 폐하.”
카를은 집무실로 나왔다. 테오가 얼른 시녀장을 집무실로 안내했다.
붉은 머리를 흰 두건으로 가린 주근깨가 많고 둥근 얼굴의 소녀. 아우라의 곁에 자주 보이던 시녀장이었다.
미나가 채 인사를 하기도 전에 카를이 물었다.
“이궁에 무슨 일이 있나?”
미나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녀는 황제가 두려웠다. 자신이 황후를 위해 했던 많은 일이 황제의 뜻에 반한다는 것을 그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미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이 일을 할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인사는 됐어. 무슨 일이지?”
“그게…… 오늘 오후 황궁의가 황후 폐하께 다녀가셨습니다.”
“황후의 상태는 어떻지?”
“점차 기력을 되찾고 있으시지만, 여전히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창밖만 내다보고 계십니다.”
카를이 한숨을 삼켰다. 아우라가 깨어난 지 며칠이 지났다. 그러나 카를은 이궁에 한 번도 가지 않았다. 대신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황궁의를 불러서 닦달했다. 그리고 황궁의는 항상 같은 대답을 했다.
‘정신적인 문제 같습니다, 폐하.’
그 말은 꼭 카를을 탓하는 것 같았다. 사실 황궁의의 말도 필요 없었다. 카를은 이 모든 일이 자신의 탓임을 잘 알고 있었다.
가짜 핀 조각으로 그녀를 속여서만은 아니었다. 그날 밤 자신이 아우라에게 한 짓들. 그것만 아니었다면 아우라의 상태는 조금 더 나았을지도 몰랐다.
미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황궁의가 말하길, 황후 폐하께서 아끼는 이가 곁을 지키면 증세가 호전될 수 있다고 합니다.”
“아끼는 이?”
“네. 해서, 혹시 리엘 전하를 이궁에 모실 수 있을지 여쭙고자 합니다.”
미나로서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제안이었다. 시녀장이 황녀의 거취를 함부로 운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카를이 선선히 대답했다.
“그러도록 해.”
“저, 정말입니까?”
“할 수 있는 건 다 해. 리엘이건 누구건. 데려갈 필요가 있으면 다 데려가. 사야 할 게 있으면 다 사고.”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폐하.”
미나가 허리를 깊이 숙였다.
“……가 봐.”
“네, 폐하.”
미나가 뒷걸음질을 쳤다. 그녀가 문고리를 잡았을 때였다.
“만약.”
카를이 입을 열었다. 미나가 멈칫하더니 카를을 보았다.
“입을 열면. 아니, 뭐라도 상태가 나아지거나 달라지면 즉시 내게 보고하도록.”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미나가 집무실을 나섰다. 카를은 소파에 주저앉았다.
“후우…….”
고작 시녀장을 보는 일에 긴장이 됐다. 혹시 안 좋은 소식을 들을까 싶어 신경 줄이 팽팽해졌다.
마음 같아선 당장 이궁에 가고 싶었다. 아우라가 눈을 떴다는 보고를 들었던 순간부터 그랬다. 두 눈으로 봐야만, 숨결을 들어야만, 몸을 만져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이 갑갑한 숨통이 트일 것 같았다.
‘……가 볼까.’
그러나 그는 또 한 번 그 마음을 눌렀다.
미움을 받는 것 따윈 두렵지 않았다. 다만 채 낫지도 않은 그녀의 몸 상태가 신경 쓰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그녀의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게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