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87화
카를은 이궁의 나무다리를 지나고 있었다. 양옆으로 연못 물이 고요하게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리의 반쯤 왔을 때 그가 뒤를 돌았다. 궁의 창문은 어두웠다. 저 안에서 아우라는 여전히 피를 흘리고 있을 거였다.
‘믿어 줘, 카를.’
그녀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알 것 같았다. 평소 같지 않게 그에게 끝까지 매달렸던 것도.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그래서 그의 잔인한 말들도 견뎌 보려고 했을 거였다.
‘항상 이런 식이지. 네 멋대로…… 네 멋대로 또 나를 떠날 작정으로…….’
아우라는 깨어나면 고통스러워할 것이다. 배신감에 견딜 수 없어 할 게 뻔했다.
그래서 그는 그녀를 이궁에 두기로 했다. 카를 자신에게서 먼 곳에. 그러나 닿을 순 있는 곳에.
마음 같아선 아우라의 곁에 주저앉고 싶었다. 깨어날 때까지 곁을 지키고 싶었다. 쏟아지는 비난을 온몸으로 받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우라를 두고 떠나야 했다. 그에겐 할 일이 있었다. 절망에 빠져 있을 시간 같은 건 허락되지 않았다.
다만, 기분만큼은 견딜 수 없이 참담했다.
“……일어나.”
카를이 중얼거렸다.
“어서 일어나서 나를 원망해.”
카를은 뒤돌아 이궁을 떠났다.
그의 발길이 닿은 곳은 별궁이었다. 그는 촛대의 불빛에 의지하며 지하 계단을 내려갔다.
이윽고 그가 지하 복도 끝 두 개의 방 앞에 도착했다. 예전에 카를은 이 앞에서 아우라를 안고 있었다. 그때 아우라는 왼쪽 문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쪽에는 뭐가 있는데?”
“거긴…… 소중한 물건들이 들어 있었지.”
“소중한 물건?”
아우라가 그게 뭐냐는 듯 되물었다. 그러자 카를이 짓궂게 대답했다.
“안 알려 줘. 내 거야.”
“……까마귀 같네. 물건 숨겨 두는 꼴이.”
그 예쁜 비웃음. 새침한 말투. 품에 감기던 온기와 무게. 그런 것들을 떠올리며 카를이 미소 지었다.
끼이이…….
카를이 지하실 문을 열었다.
방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작은 테이블과 의자, 낮은 벽장. 그것이 다였다.
이곳이야말로 어린 카를의 아지트 아닌 아지트였다. 형들에게 쫓긴 그가 마음을 놓을 수 있던 유일한 곳. 아우라를 만나고는 다신 찾지 않은 곳.
그리고 아우라가 유폐되었을 때 그녀의 물건을 숨겨 놨던 곳.
카를이 낡은 나무 벽장을 열었다. 저 안쪽 구석에 작은 나무 상자가 있었다. 그는 그것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핀의 조각이 있었다.
율리우스의 편지를 읽고 서재에서 이것을 발견한 후의 일이었다. 카를은 그 조각과 똑같은 모양의 수정 조각을 만들었다.
그는 품에서 북쪽 탑에서 가져온 수정구를 꺼냈다. 그 수정구는 여전히 희미한 빛을 내고 있었다. 빛이 바다의 플랑크톤처럼 은은하게 떠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한 조각에는 빛이 없었다. 다른 핀과 붙어 있는 게 아니라 얹어져 있는 것뿐이고.
카를이 빛을 내지 않는 가짜 조각을 떼어 냈다.
그 무엇도 아닌 평범한 수정 조각. 카를은 이걸 아우라에게 줄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는 이 게임에서 이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게 그녀를 살릴 최후의 장치가 되어 줄 거라는 것을. 그러므로…… 결국 그녀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카를은 수정구의 빈 곳에 마지막 조각을 꽂아 넣었다.
그때였다.
후우우욱!
엄청난 빛이 핀에서 터져 나왔다. 어둠에 잠겼던 방이 하얗게 빛날 정도였다.
‘뜨거워.’
카를은 반사적으로 핀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드르르르르륵!
핀은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마치 어서 트루 블러드의 피를 달라고 외치는 듯했다.
한참이나 소란을 피우던 핀이 잠잠해졌다. 빛 역시 점점 수그러들더니 완전히 사라졌다.
카를이 핀을 쥐었다. 마치 살아 있는 동물처럼 따뜻했다.
‘만약 아우라가 진짜 핀 앞에서 손목을 그었다면…….’
그 즉시 핀이 아우라의 피를 다 삼켰을 거다. 카를이 오기 전에 모든 게 끝났을 것이다.
카를은 입술을 씹었다. 더는 이런 물건을 황궁에 둘 수 없었다.
하지만 황궁 밖으로 내보낸다고 해서 아우라가 포기할까? 세상 끝까지 찾아가서 핀을 손에 쥘 테지.
결국 ‘어디에’ 핀을 두느냐보다 ‘누구에게’ 핀을 맡기느냐가 중요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우라에게 핀을 빼앗기지 않을 사람. 그런 사람이 필요했다.
그날 새벽, 카를은 혼자서 황궁을 나섰다.
***
황후가 지병으로 이궁에 갔다는 소문이 황궁에 퍼졌다. 사람들은 황후의 약한 몸에 우려를 표했다. 그 우려에는 당연히 후사 문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신들은 이따금 카를에게 황후의 몸 상태를 물었다. 그때마다 카를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황후는 곧 돌아올 거요.”
그리고 며칠 후, 수트라에서 승전한 조쉬가 돌아왔다. 그는 의기양양하게 알현실로 들어섰다.
알현실에는 수많은 귀족과 대신들로 가득했다. 시종이 힘차게 외쳤다.
“가넷 남작가의 아들이자 카사 제국과 황권을 수호하는 황제군 기사단장인 조쉬 가넷이 반역자 무리를 소탕하고 귀한 승리와 함께 돌아왔습니다!”
조쉬가 씩 웃었다. 자신의 이름에 주렁주렁 달린 수식어가 싫지 않았다. 서자 출신이라는 콤플렉스마저 싹 씻기는 기분이었다.
사람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저 앞에 선 테오도 기특하다는 듯 박수를 쳤다.
조쉬가 붉은 융단을 밟으며 황좌에 앉은 카를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가까이에서 본 카를의 안색이 심상치 않았다. 게다가 손에는 붕대까지 감겨 있었다.
‘그러고 보니 황후 폐하께서는 보이지 않으시고…… 무슨 일이 있으신 걸까?’
하지만 조쉬는 바로 걱정을 접어 버렸다. 평소에도 바람 잘 날 없는 부부였다. 싸우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서로를 찾지 않는가.
카를이 미소를 띠며 조쉬에게 말했다.
“고생 많았네, 조쉬 가넷. 황실에 승리를 안겨 줘서 고맙군.”
“제 임무를 했을 뿐입니다.”
“이제 자네의 공을 읊어 보게.”
카를이 기사의 예법에 맞춰 물었다. 조쉬가 목을 큼큼 가다듬었다.
“먼저 수트라 성 뒤편에 진을 치고 있던 기병대 두 군단을 기습으로 전멸시켰습니다. 근접전 전력인 기병대가 무너지자 포병과 궁병이 후퇴하려 했으나 퇴로를 막아 그들을 고립시켰습니다.”
“그리고?”
“전의를 잃은 그들에게 항복을 권하였습니다. 라이언에게 특별한 충성심이 있던 몇몇이 자결을 했지만 대부분 병사는 항복하였고, 그들을 황궁으로 압송했습니다.”
“실시아의 마법사는 없었나?”
“혹시 마법사 부대를 숨겨 놓았을까 봐 국경 지대까지 뒤졌으나 흔적은 없었습니다.”
“라이언의 흔적은?”
“돌아오기 직전까지 조사했으나 수트라엔 오지 않았습니다. 일정 군사를 수트라에 남겨 뒀으니 그들이 계속 보고할 겁니다.”
카를은 생각했다.
‘라이언은 수트라로 가지 않았다. 그가 마법사 부대를 꾸렸다면 실시아에 뒀겠군. 아마도 일찍이 실시아로 빼놓은 주 전력과 함께.’
“고생 많았군. 상으로 금화와 보검을 내리지.”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황제 폐하!”
조쉬가 꾸벅 예를 차렸다. 카를은 곧바로 알현실을 나갔다. 그러자 많은 이가 조쉬에게 다가왔다.
“승전을 축하드립니다, 기사단장님.”
“데블라를 쓸어 버리던 실력이 어디 안 가셨군요.”
“황제군의 전력 손실도 크지 않았다는데, 사실인가요?”
갑자기 쏟아지는 관심에 조쉬는 당황했다. 하지만 내심 싫지 않았다. 그는 가슴을 쫙 펴고 격식을 갖춘 미소를 띠었다.
“기습이 잘 먹혔습니다. 기사들이 명령을 훌륭히 따라 주어 얻은 승리지요.”
“역시 황제군의 실력은 대단하군요!”
“정말 멋집니다!”
조쉬의 입꼬리가 움찔움찔했다. 마음 같아선 온 힘을 다해 웃어 주고 싶었다. 다 내 덕에 얻은 승리라고 잘난 척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때, 테오가 조쉬의 팔을 잡아당겼다.
“예, 예.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기사단장님. 이제 저와 잠깐 대화를 나눌까요?”
“어, 어? 지금?”
“그래. 지금.”
테오는 어리둥절한 조쉬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복도 구석으로 끌려온 조쉬가 테오의 손을 털어 냈다.
“뭐야. 기분 좀 내려고 했더니.”
“일단 승전 축하한다.”
흔치 않은 테오의 칭찬에 조쉬가 코 밑을 쓱 닦았다.
“네가 그 전투를 봤어야 해. 새벽에 그놈들 진지 뒤로 돌아가서-”
“큰일 났어, 조쉬.”
“우리 군이 딱 기습을…… 뭐? 뭐가?”
테오의 표정이 퍽 심상치 않았다. 조쉬는 그제야 뭔가 심각한 일이 일어났음을 깨달았다. 테오가 주위를 둘러보곤 조쉬에게 귓속말을 했다.
이윽고 조쉬의 얼굴이 경악을 물들었다.
“뭐?! 자, 자살-”
“미친놈! 말조심해.”
테오가 조쉬의 입을 틀어막고 주위를 다시 살폈다. 다행히 근처엔 아무도 없었다.
조쉬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테오는 그제야 그의 입을 놔주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알현실에서 짐작은 했다. 황제 부부 사이에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황후의 자살 시도라니.
“그런 결정을 하실 분 같진 않았는데.”
조쉬가 보는 아우라는 그랬다. 삶에 대한 집착이 컸고, 이루고 싶은 건 어떻게든 이뤘다. 심지어 지옥 같은 북쪽 탑에서도 꾸역꾸역 살아 내지 않았나. 황후까지 되었는데 대체 뭐가 부족해서 목숨을 버리려고 한 것일까.
테오가 한숨을 쉬었다.
“그게 말이지…….”
“또 뭔가 있는 거야?”
“사실 어젯밤 내가 하도 답답해서 폐하께 물었거든. 나도 황후 폐하가 잘 이해가 안 가서 말이야.”
“그랬는데?”
“그래서…… 폐하와 한잔하면서 이야기를 들었어.”
테오는 그때 들은 모든 이야기를 조쉬에게 해 주었다. 핀의 존재와 그것을 찾는 아우라에 대하여.
이야기를 다 들은 조쉬는 할 말을 잃었다.
“그건…….”
테오가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황제 폐하께서 잘못하셨지. 황후 폐하를 속이셨으니.”
“하지만…… 그렇게 안 하셨으면…….”
조쉬는 이어질 말을 삼켰다. 그러나 테오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돌아가셨겠지. 그리고 난 이렇게 생각해.”
테오는 말했다.
“내게 모든 이야기를 해 주신 건 네게도 전하란 뜻이셨을 거야. 적어도 우리는 알고 있길 바라시는 거지.”
“왜?”
“그래야 우리가 황후 폐하를 오해하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