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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86)화 (86/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86화

카를은 황후의 방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우라가 한 번만 자신을 붙잡았으면 했다. 왜 나를 믿지 못하냐고 따지고 울었으면 했다. 그럼 모든 걸 없던 일로 하자고 말하고 싶었다. 웃기지도 않은 계약서도 잊어버리자고.

그는 노크도 없이 아우라의 침실 방문을 열어젖혔다. 그 안엔 서늘한 어둠만이 가득했다. 응접실도 가 봤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우라?”

그녀가 어디선가 웅크려 울고 있을 것만 같았다. 카를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대체 어딜 간 거야.’

그가 샛문을 통해 다시 침실로 들어왔다. 급하게 들어서는 바람에 문가의 콘솔과 부딪쳤다.

“!”

요란한 소리를 내며 콘솔이 무너졌다. 서랍 하나가 완전히 빠져나왔다. 내용물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흩어졌다.

“빌어먹을.”

그가 욕을 읊조리며 돌아서려 했을 때였다. 바닥에 쏟아진 것들이 마치 별처럼 반짝였다. 그것은 진주 단추였다.

카를은 이 단추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봄 무도회였을 것이다.

‘사랑한다고 말해 줄게.’

그 한마디에 알현실까지 갔던 발걸음을 돌려 이 방으로 왔다. 거짓말인 걸 알면서도.

그날 밤, 드레스 단추를 풀 여유조차 없어서 모두 뜯어 버렸다. 그리고 아우라가 잠든 새벽, 그는 단추를 하나하나 주웠다. 아우라가 모두 버릴 걸 알면서도.

아우라와의 관계는 항상 그랬다. 카를은 항상 알았다. 거짓말인 것도, 버림받을 것도. 그걸 알면서도 마음을 쏟아부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의 마음 역시 그녀가 다 내다 버린 줄 알았는데.

“이걸 왜…….”

그가 바닥에 앉았다. 홀린 듯 손끝으로 단추를 하나씩 더듬었다. 그리고 그의 손끝에 뭔가가 닿았다.

리본으로 묶은 머리카락 그리고 다 시든 수선화 한 송이.

카를은 그제야 그 말을 떠올렸다.

‘나는…… 내겐 너밖에 없어, 카를.’

한참을 멍하니 그렇게 앉아 있었다. 당장 아우라를 찾아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폐하!”

뒤에서 테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후 폐하께서 엘리제 영애에게 다녀가셨답니다.”

테오가 뭔가를 더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카를에겐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카를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북쪽 탑을 향해 곧게 뻗어 나갔다.

***

끼이익-

아우라는 있는 힘껏 감옥의 철문을 열었다. 어둠 속에서 쥐와 벌레가 흩어졌다. 등줄기에 소름이 끼쳤다.

그녀는 숨을 들이마셨다. 습하고 먼지 섞인 공기가 폐로 스몄다.

사람이란 참 이상했다. 고작 몇 달 황후 생활을 했다고 이 공기가 역했다.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온 것뿐인데도.

조각 같은 달빛이 감옥의 중앙에 펼쳐져 있었다. 다행이었다. 적어도 달빛이 밝은 밤이어서.

아우라는 그 빛 위에 앉았다.

더러운 감옥. 작은 달빛. 카를이 준 검. 그리고 아우라.

모든 게 예전과 똑같았다. 그녀에게 핀이 있다는 것만 빼면.

아우라는 자꾸만 차오르려는 눈물을 참았다. 그러나 이내 그녀의 눈빛이 의연하게 빛났다.

‘……인제 와서 감상에 빠지지 말자.’

품에서 핀 조각들과 단검을 꺼냈다. 그것들은 달빛을 받아 예쁘게 반짝였다.

떨리는 손으로 세 개의 핀을 맞췄다. 하나의 수정구가 된 핀이 부르르 떨리며 희미하게 빛났다.

‘이게 다인가.’

생각했던 것보다 강력하지도, 충격적이지도 않은 반응이었다.

‘고작 이런 것에 수많은 마법사의 마력이 담겨 있다니.’

실시아의 마법이란 참 종잡을 수 없는 것이었다.

아우라는 이번엔 검을 들었다.

사실 어떻게 목숨을 바쳐야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핀 앞에서 죽기만 하면 되는 건지, 아니면 피를 흘려야 하는 건지.

그래서 아우라는 확실한 방법을 쓰기로 했다. 피를 흘리며 죽는 방법을.

“후우…….”

크게 심호흡을 했다. 어쩔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아우라는 카를의 방에서 있던 일을 하나씩 되짚어 보았다. 그의 차가운 표정과 잔인한 말들, 외면당하던 진심까지.

그런 생각들을 하자 두려움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더는 미련도 아쉬움도 없었다.

아우라는 용기가 사라지기 전에 얼른 일을 해내고 싶었다. 검날로 손목을 그었다. 이를 꽉 물어도 극심한 통증이 여실히 느껴졌다.

“……!”

손목이 불에 덴 것처럼 아팠다. 눈물이 절로 후드득 떨어졌다. 하지만 끝까지 검을 쥔 손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여러 번 반복하느니 단번에 끝내는 게 나았다.

검붉은 피가 바닥으로 주르륵 흘렀다.

“하아…… 하아…….”

긴장 때문이었을까.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떨어진 피가 핀을 향해 흐르기 시작했다. 마치 개미가 제 굴을 찾아가듯 스멀스멀 흘러 핀에 스며들었다. 아우라는 비로소 희미하게 웃었다.

‘방법을 제대로 찾았구나.’

달각.

아우라가 검을 조심히 내려놓았다. 할 일을 다 해낸 기분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녀는 바닥에 모로 누워 손목을 핀 곁에 두었다. 핀은 그녀의 피를 조금씩, 그러나 꾸역꾸역 먹어 치웠다. 아우라의 얼굴에 점점 핏기가 사라졌다.

‘이대로 잠들면 모든 게 끝나 있겠지.’

고단한 삶이었다. 행복한 기억이란 제니아에서 멈췄고, 그 후의 삶은 지옥이었다. 그리고 그 지옥의 중심엔 언제나 카를이 있었다.

그는 아우라를 살리기 위해 데블라에 다녀왔다고 했다. 그녀를 죽이려 한 적도 없다고 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아우라는 그의 말을 믿게 됐다. 프릿이란 기사의 이야기를 들어서가 아니었다. 그의 시선, 말투, 표정. 그런 것만 봐도 아우라는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단 한 번도 그녀의 죽음을 바라지 않았다. 다만 아우라 자신이 그 사실을 외면했을 뿐.

아우라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러지 않고서 여기까지 올 수 있긴 해? 그를 증오하지 않으면서 핀을 완성할 수 있었을까?’

딱 한 번, 그 증오가 완전히 걷힌 순간이 있었다.

카를과 마주 앉아 오리고기를 먹었던 그 밤. 거대한 오리고기를 두고 웃음이 터져 나온 순간.

그 웃음 끝에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 평범한 순간이 너무 소중하고 예뻐서.

아우라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기도했다.

‘나를 잊어, 카를.’

새로운 여자를 만나고, 아이를 낳고, 이따금 그녀가 떠오르면 쓴웃음을 짓고, 그렇게 세월에 묻어 서서히 잊어 가고. 아우라는 그렇게 그가 행복해지길 바랐다.

그때였다. 문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쾅!

누군가가 문을 벌컥 열었다.

“아우라!”

카를이었다. 그는 아우라의 피 흐르는 손목을 보고 사색이 되었다.

아우라는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아찔할 정도로 어지러웠다.

‘대체 왜 너는 항상……. 왜, 왜 뒤늦게 와서는…….’

편하게 죽는 것조차 방해하는 걸까.

아우라가 바닥의 검을 다시 쥐었다. 그가 달려오기 전에 제대로 끝낼 작정이었다. 그녀가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아우라! 안 돼!”

카를이 그녀를 향해 달려왔다. 그녀는 눈을 꽉 감고 제 가슴을 향해 힘껏 내려찍었다.

“…….”

아우라는 통증 대신 압박감을 느꼈다. 온몸을 뜨겁게 덮는 그 느낌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카를이 그녀를 껴안고 있었다.

검을 쥔 그녀의 팔에 뜨거운 피가 흘렀다. 아우라의 것이 아니었다. 얼마나 다급했던 건지 카를이 검날을 꽉 쥐고 있었다.

떨리는 아우라의 눈과 침착한 카를의 눈이 마주쳤다. 아우라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렀다.

카를이 피가 흐르는 그녀의 손목을 제 손으로 꽉 쥐었다. 통증이 상당할 텐데도 아우라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카를이 말했다.

“소용없어, 아우라. 봉인은 풀리지 않아.”

아우라의 눈이 혼란에 잠겼다. 그녀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네게 준 핀은 가짜니까.”

“!”

그제야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뭔가를 묻고 싶은 듯 입을 벙긋했다. 그러나 이내 할 말을 잃고 멍하니 그를 보기만 했다.

‘아우라. 나는 절대 네가 핀을 다 모으게 두지 않아.’

‘이 게임에서 넌 절대 날 못 이겨.’

‘네가 나를 수십 번을 속인다 해도, 너는…… 절대 그럴 수 없어.’

절대, 절대, 절대. 그 ‘절대’의 의미를 아우라는 이제야 깨달았다.

잔인한 절망감이 그녀에게 휘몰아쳤다.

그녀는 제 몸이 저 밑으로 쑥 빠지는 기분을 느꼈다. 누군가 그녀의 영혼을 억지로 끌어 내리는 것 같았다.

“……아.”

단말마 같은 신음이 튀어나왔다. 아우라는 그대로 눈을 감아 버렸다.

***

북쪽 탑 앞에 테오가 대기하고 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그의 몸을 스쳤다.

‘여름도 다 끝나 가네. 어쩐지 아쉬운데.’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무심코 그쪽을 본 테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 폐, 폐하……!”

카를이 아우라를 안고 있었다. 아우라의 손목에 감긴 피에 젖은 손수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카를의 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폐하! 손이! 이게 대체……!”

“테오.”

“예, 예! 폐하.”

“난 황후를 이궁으로 데려다 놓겠다. 당장 황궁의와 시녀장을 이궁으로 데려와.”

“이, 이궁으로요? 황후 폐하의 방으로 모시는 게…… 그, 그리고 폐하께서도 손을…….”

흔치 않게 당황하던 테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카를의 시선이 너무나 서늘했기 때문이다.

“……명 받들겠습니다.”

테오가 황궁의를 부르기 위해 달려갔다. 카를이 아우라를 안은 채 걷기 시작했다.

“…….”

이윽고 카를이 이궁에 도착했다.

그는 침대에 아우라를 조심히 눕혔다. 흠뻑 젖은 손수건을 가만히 쥐어 보았다. 저 안쪽에서 미약하게 맥이 뛰었다.

그때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왕진 가방을 든 황궁의였다.

“화, 황후 폐하?”

그는 경악하며 아우라에게 달려갔다. 누가 봐도 황후가 자결에 실패한 상황이었다.

카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 일이 새어 나가면 자네부터 가만두지 않겠어.”

“예, 예! 물론입니다. 함구하겠습니다, 폐하. 그 전에 상처를 보겠습니다. 상처를…….”

황궁의가 떨리는 손으로 젖은 손수건을 풀었다. 검이 긋고 지나간 자리에 피가 배어 나왔다.

“치명상은 아닌 듯합니다. 하지만 깊이 베였고, 근육의 손상도 있을 테니 회복에 시간이 꽤 걸리실 겁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만 흉터가 남는 건 어쩔 수 없는…….”

황궁의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카를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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