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85화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걸까.’
잡아뗄 수 있었다. 내가 그런 게 아니라고. 서명을 흉내 내는 건 너무나 쉬우니까.
하지만 아우라는 솔직하기로 했다. 마지막까지 카를을 속이고 싶진 않았다.
“맞아. 수트라에 있을 때 내가 서명했어.”
아우라가 계약서를 다시 그에게 내밀었다.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고, 난 그의 요구를 들어줬어야 했어.”
카를은 계약서를 쥔 아우라의 하얀 손끝을 바라보았다. 그가 아우라에게 물었다.
“할 말은 그게 다야?”
“뭘 더 말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카를.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라고 했잖아. 너도 봤다시피.”
“그래, 그랬겠지. 잘했어. 이런 종이 쪼가리로 목숨을 건질 수 있다면 몇 번이고 해야지.”
그는 조롱인지 뭔지 모를 말을 내뱉었다.
“그런데 아우라.”
“…….”
“왜 내게 이 계약서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그는 계약서를 가져갔다.
“내가 이걸 내 손으로 보여 주기 전에 말이야.”
“그건…….”
아우라가 한층 더 차분하게 말했다.
“네가 라이언 같은 놈에게 죽을 리가 없으니까. 그래서…… 아무 의미 없는 계약이라고 생각했어.”
카를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평소였다면 여기까지만 했을 거였다. 이 정도 설명이면 마음이 풀렸을 거였다. 아니, 풀고 싶을 거였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계약서를 쓴 건 내가 라이언에게 죽을 리가 없어서고, 발코니에서 그놈과 속닥거린 건 리엘을 위해서였다?”
카를이 피식 웃더니 계약서를 내밀었다.
“가지고 나가. 네 거잖아.”
아우라는 그저 그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카를이 계약서를 그녀 옆의 콘솔 위에 올려 두고 뒤돌아섰다. 아우라가 반사적으로 그를 붙잡았다.
“카를.”
탁.
카를이 그녀를 뿌리치더니 덮치듯 어깨를 잡았다. 흣 하고 그녀가 숨을 들이마셨다. 카를이 잔뜩 굳은 아우라에게 속삭였다.
“네겐 나밖에 없다고?”
비웃음 섞인 조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아니. 나는 너를 믿지 않아, 아우라.”
아우라의 눈에 가늘게 눈물이 고였다. 애써 참아 왔던 감정들이 결국 터져 나오려 했다. 그녀는 하얗게 질린 손으로 그를 밀었다. 카를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방을 나서려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카를이 그녀의 팔을 잡아 세웠다.
“놔.”
아우라가 얼굴을 숨기려 했다. 카를이 거칠게 그녀의 턱을 잡고 눈을 맞췄다. 강제로 맞춘 눈에서 눈물이 주룩 흘렀다.
그 눈물을 본 카를의 눈에 순간 불꽃이 확 이는 듯했다. 그러나 이내 차갑게 사그라들었다.
“아우라. 생각을 해 봤는데…… 네가 말했잖아. 수트라에서 라이언과 너 사이에 있던 일은 내가 본 게 전부라고.”
아우라는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직감했다. 그녀는 사색이 되어 제 턱을 잡은 그의 손을 떼어 내려 했다. 그러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야, 아니야. 그렇지 않아.”
“라이언은 아니라던데. 수트라 성엔 이틀이나 있었잖아.”
“그만…… 제발 그만해, 카를. 그만해야 해.”
“혹시 그것도 굳이 변명하지 않은 건가?”
“카를!”
아우라가 비명처럼 외쳤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우라의 얼굴을 잡아당겼다.
“그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너보다는 라이언 쪽이 더 신빙성이 있어서 말이야.”
카를을 붙잡은 손이 덜덜 떨려 왔다. 눈물이 그의 손을 타고 흘렀다.
아우라가 입술을 물었다. 그녀는 한 마디 한 마디를 꾹꾹 누르듯 내뱉었다.
“……그래. 네가 믿고 싶은 대로 믿어.”
“…….”
“나도 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 테니까.”
카를은 그제야 아우라를 놓아주었다. 그녀는 도망치듯 방을 떠났다.
쾅.
문이 닫혔다. 카를은 텅 빈 눈으로 닫힌 문을 보았다.
“하아…….”
카를은 침대에 주저앉았다. 혼자 남겨지자 세상에 확 바뀐 느낌이 들었다. 모든 것이 껍데기 같았고, 꿈같았다.
그만해 달라는 애걸과 다신 나타나지 않겠다는 말 그리고 그녀의 눈물이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뒤섞였다.
그는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그걸 단번에 다 비웠지만 기분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
아우라는 진심으로 죽고 싶어졌다.
머릿속이 제멋대로 엉켰다. 그녀는 지체하지 않았다. 더 생각하지도 않기로 했다. 불을 찾아 달리는 나방처럼 계단을 올랐다. 더 오를 계단이 없을 때까지.
눈물을 닦고 복도를 걸었다. 복도 끝 방에 병사 두 사람이 서 있었다. 한눈에 봐도 저곳이 엘리제가 있는 곳이었다.
아우라는 병사들 앞에 멈췄다.
“엘리제 영애를 보러 왔다. 문을 열도록.”
병사들은 의아해했다. 분명 아무에게도 보이지 말라는 영애였다. 그런데 황후가 너무나 당당하게 찾아와 영애를 찾고 있었다.
“저, 폐하.”
“감히.”
아우라가 딱 잘라 말했다. 그녀는 핏발 서린 눈으로 병사를 바라보았다.
“어디에 대고 토를 달지?”
“그, 그게…….”
“당장 열라고 했어.”
그래도 병사들은 머뭇거렸다.
‘황후도 들여선 안 된다.’
분명 그러한 황제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방문이 열리고 엘리제가 나타났다.
“나오시면 안 됩니다.”
병사가 재빨리 그 둘 사이를 막아섰다. 한 병사가 문을 닫으려 하자 아우라가 문틈으로 발을 끼워 넣었다.
“화, 황후 폐하.”
병사들은 당황했다. 황후의 발을 문으로 짓이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들이 당황한 사이 아우라가 문을 열었다.
“엘리제, 긴말할 시간 없어.”
만약 병사들이 없었다면 엘리제는 아우라에게 물었을 것이다.
어째서 그런 울 듯한 얼굴을 하시는지. 정말 핀이라는 게 당신의 목숨을 위험하게 하는 건지. 그럼 지금 이토록 절실하게 죽음을 바라는 건지.
그래도 엘리제는 핀의 조각을 줄 생각이었다. 무엇보다도 아우라를 믿었기 때문이다.
‘3년의 유폐도 견뎌 내고 살아나신 분이야. 함부로 목숨을 버리실 리가.’
엘리제가 소매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그 순간, 아우라가 엘리제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폐하?”
아우라는 정말이지 온 힘을 다해 엘리제를 껴안았다. 울먹이는 숨을 뱉어 내며 아우라가 속삭였다.
“고마워, 엘리제.”
그 목소리에 엘리제의 눈이 동그래졌다.
“폐하?”
“잘 지내.”
아우라는 그 인사만을 남긴 채 뒤돌아 바쁘게 걸어갔다. 아우라는 복도의 어둠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주머니를 쥐고 있던 엘리제의 손은 어느새 텅 비어 있었다.
엘리제의 마음에 그제야 스멀스멀 불길함이 차올랐다.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수를 한 것만 같았다.
“당장…….”
엘리제가 병사에게 말했다.
“황제 폐하께 고하세요. 황후 폐하께서 꼭대기 층에 다녀가셨다고.”
그 시각.
아우라는 바쁘게 계단을 내려갔다. 혹시 병사들에게 잡힐까 봐 중간에는 기사용 계단으로 발길을 옮겼다.
다행히 따라오는 병사들은 없었다. 카를을 부르러 갔을 수도 있겠지만.
카를 생각을 하니 다시금 머릿속이 엉켰다. 그 엉킨 생각이 가슴으로 내려와 마음을 헤집어 놓았다. 아우라는 결국 계단에 주저앉았다.
이마를 짚으니 너무 뜨거웠다. 언제부터 이렇게 열이 났던 걸까. 카를의 비웃음을 봤던 순간부터? 라이언과의 부정을 의심받은 순간부터?
아우라가 눈을 질끈 감았다.
‘카를의 말이 맞아. 몇 번이나 그를 속였잖아. 다…… 다 각오했던 일이야.’
그녀는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밖 저 멀리 뭔가가 아우라를 부르는 듯했다.
황궁 북쪽에 우뚝 선 북쪽 탑. 저 북쪽 탑은 그녀를 지켜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곳에서의 기억을 잊지 말라고. 이곳에서 배운 외로움과 슬픔은 이미 너의 일부이며, 바로 너라고.
그녀는 정했다. 자신이 죽을 장소를.
***
탁.
카를은 빈 술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술병은 이미 비어 있었다. 꽤 많은 양이었는데 취기가 하나도 올라오지 않았다.
“……제길.”
아우라의 눈물을 본 순간, 카를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넌 상상도 못 할 거야, 아우라. 널 살리기 위해 내가 어떤 짓까지 할 뻔했는지. 얼마나 바닥을 기고 있는지.’
마음에도 없는 여자의 드레스를 벗길 뻔했다. 아우라를 위해 그것을 했어야 했는데, 아우라를 생각하니 그럴 수가 없었다.
카를은 정말이지 미칠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를 용서하고 싶었다. 눈물을 닦아 주고 싶었고, 껴안고 싶었다. 그런 자신이 너무 싫어서 이를 꽉 물어야 했다. 그녀를 향한 욕망에 지고 싶지 않았다. 아니, 질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잔인하게 굴었다.
그러니까, 오늘 하루만큼은.
“하아…….”
그는 단추가 몇 개 잠겨 있지 않던 셔츠를 벗어 던졌다. 답답함이 치밀어 올라 마른세수를 하며 방을 돌아다녔다.
분노가 쓸고 지나간 곳에 남는 건 아우라의 얼굴이었다. 카를의 손을 붙잡고 울던 그 얼굴.
‘그만…… 제발 그만해, 카를. 그만해야 해.’
그 표정과 애걸이 진심이 아닐 수가 있을까. 그렇게 끝까지 몰아붙였는데 왜 그 어떤 반격도 하지 않았을까.
아니, 그 눈물이 거짓이라고 해도 뭐가 어떻단 말인가. 설사 라이언과 부정을 저질렀다고 해도 결국 다시 아우라를 찾을 게 뻔한데.
‘내일…… 내일 찾아가 봐야겠어.’
카를이 옷장에서 침실용 의복을 꺼냈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기 위해 단추를 하나하나 풀 때였다.
등에 닿던 손의 감각이 떠올랐다. 거울로 보였던 가느다랗고 하얀 발목도.
‘정말 변명하려고 굳이 나를 기다렸던 건가? 이 밤에?’
언제나처럼 카를을 침대로 끌고 가려는 수작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카를은 분노 때문에 애써 외면했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녀가 평소와는 달랐다는 것을.
‘그래, 내일 꼭…….’
단추를 풀던 카를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그녀의 마지막 말이 메아리처럼 울렸다.
‘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 테니까.’
“……대체 왜 그딴 소리를…….”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카를은 침실을 나섰다. 다급한 발소리가 빈 복도를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