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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84)화 (84/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84화

카를은 팔짱을 끼고 엘리제를 보았다.

그는 왜 아우라가 엘리제를 의식했는지 이제야 좀 알 것 같았다. 확실히 둘은 닮은 구석이 있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이 고지식한 면이 그랬다.

‘어쨌건, 언제가 됐건 엘리제와 아우라는 만나게 돼. 지금은 그 시간을 유예하고 있을 뿐.’

엘리제를 더 붙잡아 두는 것도 한계였다. 엘리제가 하루에도 몇 번씩 복도의 계단을 바라본다고 하지 않는가.

“엘리제.”

“네, 폐하.”

“내가 모종의 이유로 핀의 조각을 황후에게 넘기지 말라고 한다면 그렇게 해 주겠나?”

“……아니요.”

“내가 여기서 그 조각을 빼앗기 전에 내놓길 권유한다면?”

엘리제의 눈이 커졌다. 말이 좋아 권유지 협박이었다. 

“왜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으나…….”

“진심이야, 엘리제. 그러니 말 돌리지 말고 대답을 해. 아니면 그 조각을 내놓던가.”

카를이 딱 잘라 말했다. 갑자기 뒤바뀐 분위기에 엘리제는 당황했다. 이곳은 황궁이었고, 자신은 카를의 도움으로 숨은 상황이었다. 주도권은 어디까지나 카를에게 있었다.

‘드려야 하는 건가. 내겐 힘이 없는데. 이분은 황제 폐하고.’

어쩔 수 없이 그러겠노라 고개를 끄덕이려 할 때였다. 문득 아우라의 말이 떠올랐다. 훈트 산을 떠나기 전 엘리제를 껴안으며 그녀는 분명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영애의 목적을 포기하지도 말고. 끝까지 물어 잡아.’

끝까지 물어 잡지 못해 공작 위를 빼앗겼다. 테인 공작의 속내를 다 알면서도 수줍은 소녀처럼 숨어만 있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긴 싫었다. 아우라와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게다가 핀은 제니아인들과 관련 있는 물건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카를이 아닌 아우라에게 가는 게 맞았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지금으로서 생각나는 방법은 이것 하나뿐이었다.

“핀의 조각은 제가 입은 드레스 속의 안쪽 주머니에 있습니다.”

엘리제는 치마를 꽉 잡았다. 그녀는 카를을 똑바로 보았다.

“그것을 빼앗고 싶으시다면 제 옷을 벗기고 몸을 더듬으셔야 합니다.”

이런 말을 남자에게, 그것도 황제에게 하는 건 엄청난 수치였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목소리가 치욕스러울 정도로 떨렸다.

그래도 해야 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를.

“그렇게 해서라도 가져가셔야겠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반면 카를은 미동조차 없었다. 여차하면 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드레스를 벗길 것 같았다.

카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흠칫 놀란 엘리제가 숨을 멈췄다.

그는 엘리제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엘리제는 애써 초연한 척 앉아 있을 뿐이었다.

테이블에 그의 손이 올라왔다. 엘리제의 머리 위로 그늘이 졌다. 카를은 그녀를 비스듬히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러나 엘리제는 그와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엘리제 테인.”

긴장감과 치욕감에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약속이니까요.”

“그 물건이 황후의 목숨을 앗아 간다면? 그래도 그대는 그걸 넘기겠나?”

놀란 그녀가 그제야 카를을 보았다.

“그게 무슨…….”

“자세한 설명은 해 줄 수 없어. 하지만 거짓말은 아니지.”

엘리제는 혼란스러운 듯했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다 한들 그건 제가 황후 폐하께 핀의 조각을 드리지 않을 이유이지, 폐하께 드릴 이유가 되진 않습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엘리제의 드레스를 벗기는 것.

엘리제가 건 승부 역시 그것이었다. 카를이 엘리제의 드레스를 벗기지 못할 거라는 것.

“너.”

“……예.”

“정말로 아우라를 닮아 가고 있군. 그것도 거슬리는 부분만.”

카를의 눈에는 정말로 그랬다. 제국의 황제에게 맨몸으로 오기를 부리는 모습이. 그리고 결국에는, 기어이 이겨 먹는 그 모습이.

“다시는 내게 승부수를 던지지 마, 엘리제 테인.”

카를이 물러났다. 그는 문으로 향하며 말했다.

“그땐 정말로 드레스건 뭐건 다 찢을 테니까.”

쾅.

문이 험하게 여닫혔다. 엘리제는 참았던 숨을 터트리듯 내뱉었다.

“허억……! 하아…… 하아…….”

그녀는 손등으로 뺨을 훔쳤다. 눈물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

아우라의 예상대로였다. 이궁에도, 별궁의 지하에도 엘리제는 없었다. 이제 남은 곳은 본궁의 꼭대기 층이었다.

아우라는 또각또각 계단을 올랐다. 그러나 꼭대기 층을 얼마 남기지 않았을 때 되돌아 내려왔다.

그녀는 황제의 방으로 향했다.

지난 사흘간 그랬던 것처럼 카를은 오늘도 침실에 없었다. 아우라는 그의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수납장을 하나씩 열어 보다가 옷장 옆의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엔 온갖 검들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카를은 무기에 특별한 애정을 쏟는 사람은 아니었다.

한참 상자를 뒤지던 아우라가 중얼거렸다.

“……찾았다.”

다시는 꺼내 보기 싫다는 듯 상자 가장 아래에 놓인 검. 그 검은 아이러니하게도 보라색 벨벳 천에 소중히 싸여 있었다.

벨벳 위로 만져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아우라가 카를을 찔렀던 단검이었다.

죽어야 한다면 아우라는 이 검으로 죽고 싶었다. 그게 아우라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마지막 같았다.

벨벳을 걷고 검을 잡았다. 오랜만에 잡아 보는 검은 차갑고 딱딱했다. 갑자기 현실감이 확 밀려오며 손이 떨렸다.

두려웠다. 하지만 두려움마저도 견뎌 내야 했다. 이 결정을 한 이는 바로 그녀 자신이었으니.

아우라는 검을 허리춤에 차고 실내용 가운으로 그것을 가렸다.

이제 나가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계단을 오르고 꼭대기 층에서 엘리제를 만나 마지막 핀의 조각을 얻어야 했다. 그곳에 엘리제가 없을 수도 있지만 그녀의 직감이 말해 주고 있었다. 엘리제가, 핀이 그곳에 있다고.

그런데 이상하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카를과 나눈 이야기가 귓가에 선했다.

‘황후는 황궁의 소란이 끝났으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도 좋을 것 같소.’

냉담하고 건조한 말이었다. 차라리 화를 냈다면 나았을 정도로.

‘이런 식으로 떠나고 싶진 않아.’

죽기로 마음먹은 상황이었다. 더 상처받을 것도, 기대할 것도 없었다. 그냥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대화를 해 보고 싶을 뿐이었다.

그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아우라가 등을 펴고 문을 바라보았다. 문고리가 돌아가고 문이 열렸다.

카를이 침실로 들어섰다. 그는 아우라를 무덤덤하게 보았다.

“왜 아직 여기 있어?”

“아…….”

막상 얼굴을 보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문을 열어 둔 채로 방으로 들어왔다.

“늦었어. 어서 가.”

문틈 사이로 보이는 어둠. 그것은 카를의 말처럼 서늘했다.

카를은 거울 앞에서 소매의 커프스를 풀기 시작했다. 거울에 비친 그의 얼굴이 보였다. 지극한 피로감이 엿보였다. 마치 긴 싸움을 하고 돌아온 사람 같았다.

“카를. 할 말이 있어.”

“해.”

그가 커프스에 이어 타이를 풀었다. 풀어 버린 타이는 침대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쳤다.

“라이언이 찾아왔던 밤에 널 깨울 수가 없었어. 라이언은 나뿐만 아니라 리엘도 노리고 있었고, 소리를 질렀다간 그가 옆방 발코니로 넘어갈 것만 같아서-”

“그건 이미 했던 말이잖아.”

카를이 말을 잘랐다.

“같은 말 여러 번 듣는 취미 없어. 할 말이 그게 다라면 나가.”

그는 이번엔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어 내리기 시작했다. 아우라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그러나 아우라는 겁날 게 없었다. 그녀에겐 이 말을 전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아마도 마지막일 테니까.

그녀는 용기를 내 카를에게 다가갔다. 넓은 등에 손바닥을 댔다. 카를이 멈칫했다.

“그날 밤은 정말 그렇게 보내고 싶었어. 얌전히 너와 아침을 맞이하고 싶었고.”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카를에게 간지럽게 닿았다. 카를은 거울로 아우라를 찾아보았다. 체구가 작은 그녀는 그에게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작고 창백한 발만이 보일 뿐이었다. 자주 다쳐서 그를 속상하게 만들곤 했던 발.

카를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았어. 알았으니 가.”

“잠이 잘 오지 않아서 발코니로 갔고, 라이언과 마주쳤어. 엘리제가 있는 곳을 알려 준다기에 됐다고 했어. 그런 놈의 도움을 다시는 받고 싶지 않았으니까.”

“알았다고 하잖아.”

그가 다시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아우라가 셔츠를 꽉 쥐었다. 그리고 결국 이 말을 하고 말았다.

“믿어 줘, 카를.”

카를의 손은 결국 단추를 다 풀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비로소 뒤를 돌았다.

“믿어 달라고?”

“……그래.”

“너는 지금껏 수없이 날 속였잖아. 안센나로 갈 때도, 수트라로 갈 때도. 날 원하는 척하면서 결국 버리기를 반복했지.”

“카를.”

“그 모든 일들, 다 넘어가 줬잖아. 네가 라이언과 뭘 작당했다고 해도 넘어가 줄게. 항상 그래 왔으니까. 그런데…….”

“…….”

“어째서 널 믿어 주기까지 해야 하지?”

카를의 입가에 비웃음이 어렸다.

“내가 그렇게 우스워 보여?”

카를이 그녀에게 바짝 다가섰다. 분노도 애정도 없는 냉소. 그런 것들이 아우라를 얼어붙게 했다. 그 압박감을 버티기 어려워 아우라가 뒷걸음질을 쳤다.

툭.

아우라의 등이 벽에 닿았다. 겁먹은 표정 앞에서 카를이 뭔가를 꾹 눌러 참았다.

“가.”

그리고 돌아섰을 때였다. 아우라가 고개를 숙인 채 외쳤다.

“정말로, 그런 게 아니야. 적어도 라이언은!”

아우라의 입술이 떨렸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재고 계산할 것도 없이 말이 튀어나왔다.

“나는…… 내겐 너밖에 없어, 카를.”

침묵이 흘렀다. 아우라는 그의 표정을 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카를은 짙어진 눈으로 아우라를 가만히 보았다. 그는 뭔가를 결심한 듯 몸을 휙 돌려 서랍장으로 갔다.

서랍장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카를이 두 번 접힌 종이를 아우라에게 내밀었다.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네가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서.”

“…….”

“그런 소리를 하기 전에 이것부터 설명해야 할 것 같은데.”

아우라는 종이를 받아 펼쳤다. 그녀는 그 내용을 한눈에 알아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라이언과 아우라의 이름이 적힌 계약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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