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83화
사흘이 지났다. 라이언이 부순 벽은 오늘 아침 새로 지어졌다.
아우라는 아직 황후의 방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녀는 적어도 카를에게 제대로 해명하고 싶었다. 라이언과 그 어떤 작당도 하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래야 카를이 라이언을 쫓는 데에 혼선을 주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사흘간 카를은 제 방에 오지 않았다. 일이 바쁘다고 듣긴 했지만, 아우라는 확신했다.
카를은 아우라를 피하고 있었다.
아우라는 미나와 정원에서 티타임을 가졌다. 사흘 전 아우라가 그녀에게 내린 임무 때문이었다.
“황궁은 좀 뒤져 봤어?”
“네. 시녀들을 이용해 샅샅이 뒤져 보았습니다만…… 엘리제 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
아우라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미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황제 폐하께서 황후 폐하로부터 엘리제 님을 숨기셨다면 정말 황궁 안에 두셨을까요?”
상식적으로는 엘리제를 아주 먼 곳에 두는 게 맞았다. 하지만 상대는 카를이고, 아우라는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카를은…….”
아우라의 입가에 의미 모를 미소가 스쳤다.
“모든 걸 지키고 감당하려 하지. 중요한 건 절대 먼 곳에 두지 않아.”
그러니까 분명 황궁 안에 있을 것이다. 아우라의 눈을 가릴 수 있을 거라고 자신하고 있을 테니.
“미나.”
“네, 폐하.”
“네가 찾을 수 있는 곳에서 다 찾아본 거 맞지?”
“그렇습니다.”
미나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럼 이제 내가 움직여야겠구나.”
“네?”
“당분간 혼자 다녀야겠다. 기사도 따라오지 말게 해다오.”
아우라는 그렇게 말하곤 자리에서 일어나 가 버렸다.
“폐하. 폐하?”
미나가 그녀를 불렀지만 아우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자박자박 걸어가던 아우라가 문득 황궁을 올려다보았다. 수많은 건물 중 눈에 띄는 건 세 개였다. 거대한 크기의 본궁, 멀지 않는 곳의 별궁, 저 멀리 조그맣게 보이는 이궁.
‘황궁에서 시녀장이 들어갈 수 없는 곳. 게다가 사람을 숨길 만한 곳. 그게 가능한 곳은 몇 군데 없지.’
아우라는 가능성을 세 개로 추렸다.
‘이궁, 별궁의 지하, 본궁의 꼭대기 층.’
그리고 하나씩 지워 나갔다. 카를의 마음을 가능한 한 섬세하게 더듬어 보며.
‘카를은 나와 관련한 곳에 엘리제를 두진 않았을 거야.’
그도 은연중에 짐작하고 있을 거다. 아우라가 엘리제에게 느낀 미묘한 감정을.
‘그걸 의식해서라도 나와의 추억이 있는 곳은 무의식적으로라도 피하겠지.’
이궁은 수트라에서 돌아온 아우라와 카를이 잠시 눈을 붙였던 곳이었다. 잠에 취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별궁 지하도 마찬가지였다. 핀을 가지러 가던 새벽, 카를은 아우라를 안고 계단을 내려갔다. 몇 번이나 핀을 포기하라고 그녀를 설득하기도 했고.
그렇다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곳은 본궁 꼭대기 층이었다.
아우라는 고개를 들어 본궁을 바라보았다.
‘정말 저곳에 있을까.’
갑자기 핀이 그녀에게로 훌쩍 가까이 온 느낌이었다. 언제나 각오하고 있었던 그녀의 마지막도.
지금은 그리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모든 계획을 정리해 볼 뿐이었다.
‘먼저 이궁과 별궁 지하에 들러서 확인해 보자. 그리고…….’
아우라가 멍하니 서 있을 때였다. 저 멀리 카를이 걸어오고 있었다. 회의를 마치고 오는 길인지 대신들을 주렁주렁 단 채였다.
카를이 아우라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그대로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그의 눈빛은 냉담했다. 정원의 나무 한 그루를 보는 것보다 못할 정도로.
아우라는 자기도 모르게 그를 부르고 말았다.
“폐하.”
카를이 걸음을 멈추고 아우라를 돌아보았다. 대신들이 알아서 길을 비켜 주었다. 그러나 그는 다가오지 않고 물었다.
“무슨 일이오?”
그 순간, 아우라는 카를에게 큰 거리감을 느꼈다.
제국의 황제와 멸망한 국가의 왕족. 수많은 대신을 이끄는 그와 홀로 서 있는 자신. 앞으로 할 일이 많은 그와 죽는 일밖에 남지 않은 자신. 그리고 그 거리감을 증명하는 듯한 카를의 멀고도 차가운 시선.
이상한 일이었다. 그 모든 것들이 아우라의 마음을 오히려 가볍게 했다.
“……아닙니다. 회의하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아우라가 웃으며 말했다. 카를은 그녀의 미소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게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이오?”
“네, 그렇습니다.”
“황후가…….”
카를이 무감하게 말했다.
“아직 내 방에 있다고 들었소.”
“…….”
“황궁의 소란이 끝났으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도 좋을 것 같소.”
아우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카를을 보았다. 당연히 나갈 생각이었지만 축객령을 내릴 줄은 몰랐다. 마치 귀찮은 일을 쳐 내듯이.
카를은 대답을 듣지 않고 떠났다. 대신들이 그 뒤를 따랐다. 테오만이 불안한 눈으로 아우라를 한 번 볼 뿐이었다.
***
카를은 집무실로 들어섰다. 답답한지 타이부터 풀어 헤치는 그에게 테오가 조심스레 말했다.
“폐하.”
“왜.”
날 선 반응이었다. 아우라의 만난 일로 예민해진 게 분명했다.
‘이러라고 그걸 보여 드린 게 아닌데.’
테오는 사흘 전 카를에게 계약서를 보여 주었다. 카를은 그것을 한 번 읽고는 제 주머니에 넣었다.
반응이라곤 그게 다였다. 그는 분노도 슬픔도 없는 얼굴로 돌아섰다. 그리고 남은 건 차가운 냉담이었다.
“아무래도 황후 폐하와 제대로 된 이야기를-”
“테오.”
“네.”
“수트라 쪽은 어떻게 됐지?”
“아.”
‘아침에도 보고를 드렸는데. 거의 다 진압했다고.’
테오는 알고 있었다. 그가 정말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건 아우라에 대해 떠들지 말라는 신호였다.
그래도 테오는 다시 보고했다.
“진압은 다 끝났습니다. 조쉬의 기습이 잘 먹혀 전력 손실이 크진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수트라를 지키기 위해 모인 줄로 알고 있어 항복한 자들도 꽤 됩니다.”
“라이언은.”
“아직…… 못 찾았습니다.”
카를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실시아로 갔을 거다.”
“실시아로 말입니까?”
“수트라가 먹혔으니 실시아 마법사들을 모으러 갔겠지.”
‘이렇게 된 이상 제니아 마법사들을 꼭 자신의 전력으로 만들어야 할 테고.’
결국 이 문제 역시 핀이 걸려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그에게 핀은 골칫거리였다.
지금으로서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라이언이었다. 그가 야욕을 가진 한 언젠가 아우라에게 다시 접근할 것이다.
카를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우라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파지는 듯했다.
“나가 봐.”
“예. 폐하, 오늘도 잠은…….”
카를은 지난 사흘간 제 침실에 들어가지 않았다. 가끔 소파에서 쪽잠을 잤을 뿐 제대로 눈을 붙이지도 못했다.
“오늘은 내 방에서 자도록 하지.”
아우라는 제 방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렇게 짓누르듯 말했으니 안 갔을 리가 없었다. 그 자존심에.
테오는 조용히 집무실을 나섰다. 카를은 자리에 앉아서 깃펜을 들었다. 해결해야 할 일이 잔뜩이었다.
서류를 읽던 카를이 한숨을 쉬었다.
탁.
그는 펜을 내던지듯 내려놓았다.
“젠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창가로 갔다. 창문을 열고 바람을 맞았다.
저 멀리 방금 아우라와 만났던 장소가 보였다.
‘폐하.’
그녀가 카를을 불렀을 때 그는 기대하고 말았다. 혹시 어떤 변명이라도 하는 게 아닐까. 믿어 달라고 말해 주는 게 아닐까.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그런 말은 없었다.
아우라는 항상 그랬다. 그가 자신을 믿는 것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녀의 머릿속엔 제니아와 핀 생각밖에 없으니.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도 지금은 그냥…… 그냥 너와 있는 거야.’
돌이켜 보면 그렇게 잔인한 말이 없었다. 그를 상처 주기 위한 말이었다면 정말 탁월했다.
카를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가 순수하게 자신을 봐 주는 건 증오할 때뿐이라고. 그런 순간에만 그 눈에 예쁜 생기가 도니까.
그리고 이런 생각들은 카를의 마음을 한없이 차갑게 했다.
‘그래. 믿어 달라고 말하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만약 아까 그녀가 믿어 달라고 했다면 그는 화를 참지 못했을 거였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대신들의 앞에서 따지고 몰아붙였을 거다.
그리고…… 용서했을지도 몰랐다. 말이 되는 변명이라도, 되지 않는 변명이라도.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그녀는 아우라니까.
그래서 카를은 이 일을 흐지부지 넘길 생각이었다. 굴욕적인 용서를 하느니 차라리 작은 증오를 품고 싶었다.
증오가 주는 아픔과 달콤함. 그걸 알려 준 이는 다름 아닌 아우라였으니.
똑똑.
노크 소리에 이어 테오가 들어왔다. 그는 조급한 얼굴로 다가와 말했다.
“폐하.”
“무슨 일이야?”
“테인 공작가 집사의 소재를 확실히 파악했습니다.”
***
늦은 밤, 카를이 엘리제를 찾아왔다.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많이 답답할 텐데, 잘 기다려 줘서 고맙군.”
“아닙니다. 절 위해 애써 주시고 계신걸요.”
“엘리제 너를 위해서라기보단 제국을 위해서지. 정확히는 황권을 위해서.”
카를이 노골적으로 속을 밝혔다. 그는 오늘따라 날이 서 있었다.
엘리제는 긴장됐지만 차분하게 물었다.
“혹시…… 집사와 관련된 소식이 있는 건가요?”
카를이 고개를 끄덕였다.
“찾았어. 집사를.”
“……! 정말입니까?”
“정확히는 그의 무덤을.”
“……네?”
엘리제가 놀라서 입을 가렸다.
“집사가…… 죽었다고요? 사, 삼촌의 짓이죠?! 불쌍한 사람…….”
그녀는 진심으로 집사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유언장 때문이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 그리고 절망은 한 박자 뒤에 찾아왔다.
“그럼 유언장은 삼촌이…….”
“아니, 엘리제. 그 집사는 병으로 죽었어. 어촌에서 배를 타고 나가면 갈 수 있는 섬에 몸을 숨기고 있었더군. 테인 공작에게 쫓겨 간 거겠지. 그러다가 풍토병이 들어 머지않아 죽었다고 해.”
“그럼 유언장은 섬에 있겠군요.”
“일단 찾는 중이야. 그가 묵었던 집과 그 근처를 중심으로.”
“감사합니다, 폐하. 만약 모든 일이 제자리를 찾는다면 테인가는 황실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겁니다.”
“부디 그래 주길 바라. 내게 주기로 했던 걸 잊지 말고.”
“네, 기억하겠습니다. 그런데 폐하.”
카를이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이제는 황후 폐하와의 약속을 지키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