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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82)화 (82/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82화

새벽녘, 아우라는 아직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를 안고 잠든 카를의 가슴이 규칙적으로 오르내렸다.

그녀는 카를의 잠든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네가 더 따뜻해.’

그의 그 말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그 이후 이어진 움직임들도.

오늘따라 카를은 느긋하게 움직였다. 함께 있는 이 시간을 조각조각 모두 느끼겠다는 듯이. 그만큼 그가 주는 쾌락은 묵직하고 뭉근했다. 처음에는 견딜 만했지만 이상하게도 시간이 갈수록 그녀를 몰아붙였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부끄러운 교성이 길게 터졌다.

절정에 이르기 직전에는 몇 번이나 숨을 멈췄다. 숨 쉬는 법을 잊기라도 한 것처럼 헐떡이기도 했다. 몇 번이나 눈앞에서 터지던 빛. 그 빛으로 시야가 다 덮일 때쯤에야 모든 게 끝이 났다.

밤 산책. 때아닌 야식.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 침대에서의 일.

‘정말이지…… 이상한 날이야.’

아우라는 잠든 카를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몰래 입을 맞춰 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러다 깨기라도 하면 그 뒤의 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 이상한 날은 여기까지만 하자. 여기까지만.’

아우라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바람을 쐬고 싶어 옷을 대강 챙겨 입고 발코니로 갔다.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었을 때였다. 새벽 찬 공기가 그녀의 옷 안으로 스며들었다.

“하아…….”

문득 현실감이 밀려왔다.

‘엘리제를 찾아야지. 그러니까…….’

아우라는 뒤돌아 카를을 보았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자신을 내려다보던 흔들리는 눈빛. 어쩔 수 없는 불신과 믿고 싶은 마음 사이의 혼돈. 결국 뱉어 내던 한마디.

‘이렇게 또 믿고 있잖아.’

차마 그 말만은 배신할 수가 없었다.

‘……내일 오후에 움직이자. 오전까지는 이 방에서 같이 아침을 맞이하고.’

그때였다.

“!”

아우라가 흠칫 놀랐다. 대체 어떻게 한 건지 순식간에 눈앞에 라이언이 나타났다.

그는 멍과 붓기로 엉망이 된 얼굴로 웃었다. 그리고 조용히 하라는 듯 검지를 세워 입술을 가렸다.

그의 몸에 마법의 빛이 감돌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감히 황제의 방 발코니에 오르지 못했을 거였다.

“카……!”

아우라가 외치려던 순간이었다. 라이언이 그녀의 멱살을 잡고 끌어당겼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그녀의 입을 막았다.

“쉿. 해치지 않을 테니 잠시 대화나 하죠.”

아우라는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라이언이 아우라의 차림을 눈으로 훑었다.

“남편과 아직도 사이가 좋다니. 놀랍군요.”

“…….”

“마지막 제안입니다. 지금 핀의 조각들을 챙겨서 옆방의 리엘을 데리고 나오세요.”

‘리엘이 옆방에 있는 걸 알고 있어.’

리엘이 걸린 이상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가 옆 발코니로 넘어가 리엘에게 해를 끼치는 시간. 아마 몇 초도 걸리지 않을 테다.

그런 아우라의 생각을 라이언이 모를 리 없었다. 그는 가만히 손을 뗐다. 아우라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그를 쏘아보았다.

“그렇게만 해 주시면 엘리제가 있는 곳을 알려 드리죠.”

지금 당장 아우라에게 필요한 정보였다. 그것만 알면 모든 게 해결될 거였다. 그리고 아우라가 아는 한 라이언의 정보에는 거짓이 없었다. 악의만 있을 뿐.

“싫으시다면 제가 손수 리엘을 데려가고요.”

“조용히 꺼져, 라이언. 너 같은 놈에게 더는 도움을 받지 않아.”

“거칠게 굴지 마세요. 부부가 될 수도 있는 사이에.”

조롱과 희롱. 그 모든 행동에 배인 욕망. 아우라는 속이 뒤틀리는 듯했다.

라이언이 아우라의 팔을 잡았다. 아우라가 그를 쳐 내려 했지만 손목을 휘어잡는 그가 더 빨랐다. 아우라가 그를 노려보며 속삭였다.

“……이쯤 해 두고 꺼져.”

“이런. 화가 많이 나셨나 봅니다. 수트라에서 제가 너무 거칠었던가요?”

라이언이 빙그레 웃으며 아우라의 손으로 제 뺨을 쓰다듬게 했다.

차가운 피부가 마치 뱀 같았다. 순간 역한 느낌이 올라왔다. 아우라의 입안에 신물이 고였다. 리엘만 아니면 온 힘을 다해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그때였다.

슉-

“억.”

라이언의 가슴에 단검이 하나 꽂혔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아우라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카를이 있었다.

“카를?”

아우라가 중얼거리는 순간, 카를이 발코니로 달려들었다. 라이언은 바로 발코니 난간 너머로 몸을 던졌다.

아우라는 반사적으로 발코니 난간으로 갔다. 그러나 더 빠르게 달려온 카를이 그녀를 붙잡았다.

“지금 대체 뭘 하는 거야!”

카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우라는 화들짝 놀랐지만 당황하지 않으려 애썼다.

“카를, 일단 라이언부터 잡아야-”

“그건 내 부하들이 알아서 해. 난 네게 묻고 있는 거야, 아우라.”

팔을 잡은 손길에 힘이 들어갔다. 아우라는 그제야 이 상황을 이해했다.

카를을 재운 아우라. 마치 밀회 같은 라이언과의 만남.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던 아우라. 라이언의 뺨을 쓰다듬던 아우라. 오해를 받기에 너무 좋았다.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리엘에게 가지 않도록 시간을 끌었을 뿐이야.”

카를이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리엘?”

“카를, 나는-”

“내가 너라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나부터 깨웠을 거야. 이런 오해를 받을까 봐 겁이 나서라도.”

아우라는 말문이 막혔다. 자신이 더 할 수 있는 말이 없어서 답답했다. 게다가 아우라는 변명하는 일엔 익숙하지 않았다.

아우라는 그의 손을 놓았다.

“……다음에 얘기해. 가서 리엘부터 살펴봐.”

“하, 정말…….”

그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하얀 이마가 달빛에 드러났다. 그 밑으로 빛나는 눈빛이 차가웠다. 그는 뭔가를 말하려다가 꾹 눌러 참았다.

잠시 후, 카를이 무감하게 말했다.

“쉬어. 발코니는 잠그고.”

카를은 그대로 방을 나가 버렸다. 쿵 하고 문이 닫혔다. 아우라는 참아 왔던 숨을 뱉어 냈다.

손끝이 떨려 왔다. 라이언의 차가운 뺨. 카를의 뜨거운 분노. 그런 것들이 제멋대로 소용돌이쳐 그녀 안을 파고들었다.

아우라는 침대에 앉았다. 카를이 누웠던 자리를 더듬으니 아직 따뜻했다. 결국 그녀는 그 자리에 누워 웅크렸다. 아우라는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상처받지 마, 아우라. 끝나야 할 시간이 끝난 것뿐이야.’

텅 빈 테라스에 커튼만 나부꼈다.

***

“큭…….”

라이언은 신디온의 부축을 받으며 달리고 있었다. 검이 박혔던 곳이 미치도록 아팠다. 그러나 쓰러져 있을 순 없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기사들이 따라붙고 있었다.

“신, 디온…… 빨리.”

“기다리십시오! 달리면서 마법을 쓰기가 쉽지 않습니다.”

“제길…….”

그때 하필 카를이 깨어날 줄이야. 도망칠 자신은 있었는데 검을 던질 줄은 몰랐다. 정확히 맞힐 줄도.

신디온의 손이 환하게 빛나며 라이언의 환부를 감쌌다. 서서히 상처가 나아 갔다. 갑자기 쏟아부은 마력에 신디온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큽…….”

라이언이 이를 꽉 물고 통증을 참았다. 그는 신디온의 팔을 꽉 붙잡았다.

이윽고 황궁 담장이 보였다. 높고 까마득한 담장이었다.

“치료는 그만하면 됐어. 일단 여길 나간다.”

“북문으로 갑니까?”

“벽을 부숴.”

“……예?”

“벽을 부수라고!”

라이언이 매섭게 고함을 질렀다. 그 소리에 기사들의 발소리가 더 바빠졌다. 신디온은 놀란 것도 잠시, 이번에는 담장을 향해 마력을 퍼부었다.

담장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두 사람은 그대로 황궁 밖으로 도망쳤다.

“잡아라!”

기사와 병사들이 그 뒤를 재빨리 따라갔다. 마지막에 도착한 건 카를과 두 측근이었다.

카를이 얼굴을 찌푸렸다.

‘결국 이딴 식으로 도망을 가겠다 이건가. 역시 처음부터 목표는 아우라였던 거야.’

“조쉬.”

“네.”

“전군을 이끌고 수트라로 가. 북부의 군사 경계선을 지키는 병사들도 모두 모집해서 수트라의 군대를 없애고 돌아오도록.”

“네.”

라이언이 죽으면 어떻게든 이용해 보려고 했던 군대였다. 그러나 라이언이 이렇게 도망친 이상 방법은 하나였다.

다 없애는 것.

돌아서는 카를에게 테오가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폐하! 갑자기 라이언이 폐하의 방 발코니에서 떨어지다니요.”

“잠에서 깨어 보니 황후와 만나고 있더군. 그래서 내가 검을 던졌다.”

‘황후 폐하와 만나고 있었다고?’

테오는 애써 놀란 마음을 숨겼다. 신하 된 입장에서 감히 황후를 의심할 순 없었다. 하지만 모든 것들이 한 가지를 가리키지 않는가. 일단 그가 아직 없애지 않은 계약서부터.

테오가 주먹을 꽉 쥐었다. 더는 모른 척해선 안 됐다. 그는 황후의 사람이 아닌 황제의 사람이므로.

“저, 폐하.”

“뭐지?”

카를이 테오를 보았다. 단단한 눈빛이었지만 지친 기색도 역력했다.

테오는 침을 꿀꺽 삼켰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다음 날 아침, 엘리제는 방에서 나섰다. 그러자 병사들이 앞을 막아섰다.

“나오시면 안 됩니다.”

“조쉬 님께서 꼭대기 층은 마음대로 다녀도 된다고 하셨어요. 답답해서 그러니 산책 삼아 조금만 걷고 싶어요.”

사실 조쉬가 엘리제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었다. 다만 엘리제로선 그나마 이름을 댈 이가 조쉬밖에 없었을 뿐이다.

병사들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들에게 조쉬는 높디높은 곳에 있는 상관이었다. 게다가 엘리제는 공작가 영애. 이 이상 길을 막긴 어려웠다.

“그럼 저희가 따라가겠습니다.”

“……그러세요.”

엘리제는 그렇게 복도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창밖에서 그녀가 보이지 않도록 창 쪽을 막아섰다.

그런 답답한 산책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서늘한 공기에 엘리제는 간간이 몸을 떨었다. 그리고 복도의 끝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계단을 만났다.

‘이 계단을 내려가면 황후 폐하를 뵐 수 있는 거겠지.’

반역자 문제가 있으니 유언장 찾는 걸 미루는 거야 이해했다. 하지만 어째서 황후를 만나게 해 주지 않는 건지 모를 노릇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병사들이 계단 앞을 막아섰다.

“이만 들어가시지요.”

병사의 말에 엘리제는 하는 수 없이 돌아섰다.

‘아무래도 황후 폐하께선 내가 여기 있는 걸 모르시는 게 분명해.’

그녀는 다짐했다.

‘항상 수정 조각을 지니고 있어야겠어. 기회가 되는 대로 어떻게든 드리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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