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81화
고작 밥 한 끼.
그건 참 사소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 간절한 데가 있었다.
‘내일이면 또 죽자고 싸울 거잖아. 넌 엘리제를 찾겠다고 난리를 칠 테고, 난 그걸 막을 거고. 그러기 전에 잠깐 쉰다고 생각해.’
카를이 정원에서 했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이런 시간은 영원히 다시 안 올지도 몰랐다.
‘하여간…… 오늘은 정말 이상한 날이야.’
밤 산책에 야식이라니. 이쯤 되니 아우라는 반쯤 체념했다. 꼬인 하루 따위 그냥 꼬일 대로 꼬여 버리라지.
잠시 후, 요리사가 헐레벌떡 식당으로 뛰어 들어왔다. 얼굴을 보아하니 자다가 깬 게 분명했다.
“황제 폐하, 황후 폐하. 어서 오십시오.”
“……잠을 깨워 미안하오.”
아우라가 민망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황후 폐하. 드시고 싶은 요리가 있으신지요?”
“빠르게 되는 것 아무거나.”
카를이 아우라의 말에 덧붙였다. 그것도 아주 당당하게.
“배가 충분히 부를 만한 걸로 준비하도록.”
“아…… 네! 마침 적당한 게 있습니다.”
요리사는 후다닥 나왔다.
‘불길한데…….’
아우라는 괜히 물로 목만 축였다.
이윽고 요리사가 트레이를 밀고 왔다. 그는 식탁에 커다란 접시를 올렸다. 뚜껑을 여니 정말이지 거대한 오리 구이가 김을 내뿜고 있었다. 당황한 아우라가 말했다.
“이, 이건 너무 크잖소.”
한 가족이 만찬을 해도 부족하지 않을 크기였다. 얼마나 열심히 요리를 한 건지 요리사가 땀을 훔치며 말했다.
“초벌을 해 놓은 오리가 이것밖에 없어서요. 더 필요한 건 없으십니까?”
“없소. 잠을 깨워 미안하네. 어서 가서 쉬도록.”
“네. 그럼 맛있게 드십시오.”
요리사는 뒷걸음질을 치며 나갔다. 아우라는 카를을 보았다. 그도 오리의 크기에 내심 놀란 것 같긴 했다. 그러나 이내 아우라에게 손짓했다.
“먹어. 배고프다며.”
아우라가 나이프와 포크를 들었다. 엄두가 나지 않아 망설이던 때였다. 카를이 능숙하게 살을 발라내 접시에 놓아 주었다.
“……고마워.”
“다 먹지 않아도 좋아. 눈치 보지 말고 먹어.”
“내가 언제 눈치를-”
아우라가 한마디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한때 눈치를 봤던 것도 사실이니까.
아우라는 포크로 오리고기를 찍어 먹었다. 입안에 따뜻한 온기와 감칠맛이 퍼졌다. 그렇게 우물우물 고기를 먹는 걸 카를은 가만히 보기만 했다.
“……너는 안 먹어?”
“남으면 먹을게.”
“이걸 다 먹을 리가 없잖아. 먹어.”
카를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다 먹을 수도 있잖아.”
“정말, 내가 이걸 어떻게-”
아우라가 양손으로 거대한 오리 구이를 가리켰다. 그녀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 표정에 카를이 긴장했다.
밤 산책을 하자고 했던 것도, 들어가겠다는 걸 붙잡은 것도, 식당으로 끌고 온 것도 자신이었다. 대체 왜 이렇게 제멋대로냐고 따지고 들면 할 말이 없었다. 같이 걷고 싶고 뭔가를 먹이고 싶은 욕심이 너무 컸나 싶었다.
“하핫!”
아우라가 대뜸 웃음을 터트렸다. 얼른 표정을 가다듬었지만 이미 늦었다.
“큼, 그러니까 이 커다란 걸 어떻게-”
그녀는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하하…… 아, 정말…….”
카를은 멍해졌다. 아우라가 저렇게 환하게 웃는 건 처음이었다. 눈 모양이 둥글어지고, 입꼬리가 높이 올라가고, 하얀 치아를 보일 정도로.
“왜 웃어?”
“너무 이상하잖아. 이 밤에 너랑 식당에 온 것도 말이 안 되는데 이렇게 거대한 오리 구이라니. 세상에, 이렇게 커다래도 되는 거야? 정말 오리가 이 한 마리밖에 없었을까?”
아우라가 웃으며 카를에게 물었다.
“하하.”
순간 카를도 웃음이 터졌다. 오리 따위는 전혀 우습지 않았다. 그냥 아우라가 웃으니 따라 웃게 됐다. 마치 본능처럼.
“자다가 일어나서 제정신이 아니었나 보지.”
그 말에 아우라가 또 입을 가리고 웃었다. 웃으라고 한 말도 아니었는데. 뭐가 우습다고 저렇게 예쁘게 웃어 주는 걸까 싶었다.
“그러게 왜 깨워서는. 못 말려, 정말.”
아우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눈에는 눈물마저 맺혀 있었다. 그녀는 큰 결심이라도 하듯 양손에 식기를 잡았다.
“좋아. 먹어 보는 거야.”
아우라는 겨우 웃음을 멈추고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카를은 턱을 괴고 그녀를 가만히 보았다.
그는 오래전 아우라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엘리제를 후궁으로 들이겠다고 거짓말을 했을 때였다. 아우라는 엘리제에 대해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웃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어. 내가 잃은 걸 가지고 있었잖아.’
카를은 그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말 며칠을 고민했는데도. 참다못해 아우라에게 다짜고짜 웃어 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럼 뭐라도 알 수 있을까 싶어서. 물론 아우라는 그마저도 해 주지 않았지만.
그때 카를이 내린 결론은 이랬다. 아우라는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다고.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서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아우라는 엘리제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게 아니었다. 그녀가 그리워하는 건 유폐되기 전 자신의 모습이었다. 이를테면 도서관에서 카를에게 웃어 주었던 그 소녀를.
그리고 지금, 카를은 좀 더 확실한 결론을 내렸다.
엘리제까지 갈 것도 없었다. 예전의 그 소녀가 돌아오더라도 눈앞의 이 여자는 못 이길 것이다.
***
새벽이 다 되었을 때 두 사람은 식당을 떠났다. 식탁에는 꽤 많이 먹은 오리고기와 빈 와인병이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오리고기의 맛, 야식, 리엘의 성장에 대한 각자의 생각들. 이야기는 황제의 침실에 들어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방문이 닫히자마자 카를이 먼저 입을 맞춰 왔다. 입술을 부드럽게 빨아들이자 아우라가 눈을 감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혀가 얽혔다. 카를의 혀가 아우라의 혀를 밀며 그녀의 입안으로 들어섰다. 아우라는 그의 힘에 밀려 서서히 뒷걸음질을 쳤다.
그녀의 등이 벽에 닿았다. 제법 많이 마신 와인 때문일까. 마주치는 시선이 몽롱했다. 카를이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학습 능력이 떨어지나 봐.”
그의 손이 아우라의 허리에 감겼다. 슬슬 올라가 손이 등의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내가 잠들면 네가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툭, 툭, 툭. 등의 단추가 풀려 갔다. 벌어진 드레스 사이로 그의 손이 들어왔다.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에 아우라는 소름이 번지는 걸 느꼈다.
“널 보면 자꾸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돼.”
“…….”
“뭐, 비웃던가.”
체념과 욕망이 뒤섞인 말. 그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며 아우라를 원하고 있었다. 묘한 정복감에 아우라의 아랫배가 간지럽게 찌릿했다.
아우라가 그의 얼굴을 잡고 입을 맞추었다. 그의 혀를 부드럽게 감아 보고 입안을 유영했다. 그 움직임에 조금 놀란 듯한 카를에게 아우라가 말했다.
“마음 놔. 오늘은 정말 아무 짓도 안 할게.”
“하하, 거짓말.”
그러나 그 입맞춤이 그를 건드린 건 분명했다. 그가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묻고 빨아들였다. 그 자극에 아우라가 가는 신음을 뱉었다.
“읏…… 정말이야.”
“안 속아.”
그가 아우라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리고 성큼성큼 침대로 걸어가 그녀를 눕혔다.
“설사 아무 짓도 안 한다고 해도 머리엔 핀 생각으로 가득 차 있겠지.”
카를이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며칠 전에도 그랬잖아. 내내 엘리제 생각뿐이었으면서.”
이마에 연신 닿던 입술이 아우라의 귀로 이어졌다. 귓바퀴를 살짝 물자 아우라가 움찔했다.
“아……! 간지러워.”
카를이 그녀의 옷을 천천히 벗겨 냈다. 허리와 가슴을 만지는 손길에 아우라는 점점 녹아내릴 듯했다.
그래도 이 말만은 꼭 하고 싶었다. 그녀는 카를의 얼굴을 잡고 눈을 맞췄다.
“오늘은…… 오늘은 정말 아니야.”
“…….”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도 지금은 그냥…… 그냥 너와 있는 거야.”
카를의 목울대가 오르내렸다. 그녀를 침대까지 데려온 여유로움이 일순간 사라졌다. 이윽고 그가 아우라의 손을 잡더니 손등에 입을 맞췄다.
“역시, 학습 능력이 없어.”
아우라의 기분 탓이었을까. 그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검고 시니컬한 눈동자. 그 눈동자는 분명 흔들리고 있었다.
“이렇게 또 믿고 싶어지잖아.”
그 말에 아우라가 미소를 지었다. 양팔을 들어 카를을 감싸 안았다. 카를이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그의 열기와 흥분이 온몸으로 스몄다.
그의 입술이 목덜미에서 점점 내려갔다. 쇄골을 지나 가슴뼈를 핥았다. 봉긋한 가슴으로 올라간 입술이 그대로 그 끝을 머금었다.
“으응…….”
아우라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가슴의 끝을 빨아들이고 가볍게 씹는 자극이 찌릿하게 퍼져 나갔다. 그의 손이 다른 쪽 가슴을 꽉 쥐었다.
“아읏!”
놀란 아우라가 그의 머리카락을 쥐었다. 그러자 그가 짧게 웃음 짓고는 다시 올라와 입을 맞췄다.
젖은 가슴의 끝을 그가 손끝으로 쓸었다. 어쩐지 따끔한 느낌에 아우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손길이 가슴과 갈비뼈를 지났다. 그리고 그녀의 납작한 배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따뜻해.”
아우라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가 귓가에 속삭였다.
“네가 더 따뜻해.”
그 말을 증명하듯 그의 손이 따뜻한 곳을 찾아들었다. 다리 사이로 들어온 손이 아래에 닿았다. 미끈거리는 아래를 파고드는 손길은 상냥했지만 자극적이었다. 게다가 평소보다 더 깊이 들어오는 느낌에 아우라는 자기도 모르게 그를 끌어안았다.
“아…… 잠깐…….”
“쉬…… 괜찮아, 괜찮아.”
카를이 그녀를 달래듯 귀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잔뜩 달아오른 귀를 물끄러미 보더니 그 안을 혀로 핥았다.
“앗! 그만…….”
놀란 아우라가 고개를 틀었다. 그러나 카를이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더 깊은 곳을 파고드는 혀와 손가락. 그것들이 아우라의 안을 완전히 헤집어 놓는 것 같았다. 아우라의 몸 안에 쾌락이 점점이 번져 갔다.
“아아! 제발…….”
아우라가 울 듯한 얼굴로 눈을 꽉 감았다. 카를이 아쉽다는 듯 그녀를 놔주고 몸을 세웠다.
“하아…… 하아…….”
아우라는 몽롱한 눈으로 카를을 올려다보았다.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은 그가 사랑스럽다는 듯 아우라를 보고 있었다.
아우라가 카를에게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