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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80)화 (80/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80화

“때가 되면 말해 주지.”

카를은 그렇게 말하곤 바로 방을 나섰다. 엘리제는 더 할 말이 있는 눈치였지만 카를은 모른 척했다

‘엘리제도 언제까지 가만히만 있진 않을 텐데.’

엘리제는 고지식한 성격이었다. 게다가 아우라를 내심 동경하는 눈치였다. 그러니 어떻게든 아우라와의 약속을 지키려 애쓸 거였다.

‘알현실 앞에서 아우라가 엘리제를 가로채게 둬선 안 됐는데.’

하지만 이미 엎어진 일. 이제부터 어떻게 아우라를 막아 내느냐가 중요했다.

카를은 계단을 내려와 황제의 방을 향해 걸었다. 침실에 아우라가 있다는 게 새삼 떠올랐다.

방을 합치자는 제안은 충동적이었다. 하지만 말을 뱉어 놓고 나니 확신이 생겼다. 지금 같은 상황에선 그 방법이 최선이라고.

싫다고 한다면 억지로라도 끌고 올 작정이었다. 엘리제를 빼앗긴 마당에 같은 침대를 쓰는 건 당연히 싫을 테니.

그런데 아우라는 생각보다 쉽게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하는 수 없다는 듯한 그 체념의 눈빛. 그런 걸 생각하면 카를은 웃음이 났다.

‘그럴 때 보면 한없이 물렁물렁한 사람 같은데. 하여간 신기해.’

계단을 내려오는 그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종일 밖에도 잘 못 나갔을 텐데. 답답해하고 있으려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카를이 걷고 있을 때였다. 꿍 하고 다리에 뭔가가 부딪혔다.

“……삼촌.”

리엘이었다.

리엘은 바닥에 넘어진 채 카를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는 유모가 어쩔 줄 모르고 서 있었다.

‘이런.’

아무리 아이라도 카를은 리엘이 불편했다. 아무리 나쁜 놈이었을지언정 자신이 리엘의 아버지를 죽인 건 사실이었으니.

카를이 말없이 리엘을 일으켜 주었다. 그리고 다시 갈 길을 가려다가 어렵게 입을 뗐다.

“……괜찮니?”

“괜……찮아요. 그냥 심심해서 뛰어다니다가…….”

“미안하구나. 앞으론 앞을 잘 보고 다니도록 하지.”

카를의 사과에 리엘이 배시시 웃었다. 그 미소가 카를의 발길을 잡았다. 그는 리엘의 앞에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필요한 게 있으면 삼촌에게 뭐든 말하고.”

“그럼…… 황후 폐하를 보내 주세요. 황후 폐하랑 잘래요.”

“……뭐?”

“저랑 황후 폐하가 더 친하니까요.”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군. 애들이란 원래 이런 건가.’

카를이 못 알아듣자 리엘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황후 폐하가 그랬어요. 삼촌이랑 친해져서 낮이고 밤이고 같이 놀려고 삼촌 방으로 갔다고요.”

잠시 눈만 깜빡이던 그가 리엘에게 되물었다.

“……황후 폐하가 정말 그랬어?”

“네. 그러니까, 제가 더 황후 폐하와 친하니까 제 방에서 같이 놀게 해 주세요.”

“……하하.”

카를이 결국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쩌나. 그건 안 되겠는데.”

***

똑똑.

노크 소리에 소파에 앉아 있던 아우라가 고개를 들었다. 문이 열리고 카를이 들어섰다.

아우라는 어제 방을 옮겼다. 카를은 그녀가 잠든 후에야 돌아왔고, 깨기 전에 떠났다. 그들이 이렇게 방에서 마주친 건 처음이었다.

“내 방 들어오는데 노크하려니 기분이 이상한데.”

“안 해도 상관없어.”

아우라가 보던 책에 다시 시선을 두었다.

‘테오가 계약서에 대해선 말하지 않기로 한 모양이네.’

아우라는 내심 안심이 되었다. 카를과 그런 무의미한 갈등을 겪고 싶지 않았다.

카를이 거울 앞에서 커프스를 풀고 셔츠를 팔꿈치까지 접어 올렸다. 그는 거울에 비치는 아우라를 보며 물었다.

“바빠?”

“왜?”

“안 바쁘면 산책 가자.”

아우라는 고개를 들어 거울 속 카를을 보았다. 그는 어서 대답하라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야밤. 두 사람의 관계. 라이언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

그 어떤 것도 밤 산책에 어울리진 않았다. 물론 종일 궁 밖으로 나가지 못해 답답하긴 했지만.

아우라가 멀뚱히 있자 카를이 덧붙였다.

“이유가 필요해?”

“가지 않아야 할 이유가 더 많은 것 같아서.”

“우리가 요즘 부쩍 친해져서 낮이고 밤이고 같이 놀려고 네가 여기로 왔잖아.”

그 말에 아우라가 이마를 짚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안 봐도 뻔했다.

‘리엘이 말했구나.’

“리엘이 내가 네 방에 왜 왔는지 물어보길래. 라이언이 리엘과 나를 표적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는 할 수 없잖아. 그래서 그냥 둘러댄 것뿐이야.”

아우라는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은 대체 왜 변명을 하고 있는 걸까.

“알아. 그랬겠지.”

카를이 저벅저벅 다가왔다.

“그래도 그 거짓말에 조금 더 장단 맞출 순 있는 거잖아.”

“…….”

“지금 안 가면 내일 밤까지 못 나갈지도 몰라.”

그 말을 듣자 아우라는 다시 한번 답답함이 몰려왔다.

갈등하는 그녀에게 카를이 손을 내밀었다. 아우라는 못 이기는 척 그 손을 잡았다. 그러자 카를이 그녀를 단번에 일으켰다.

두 사람은 본궁 앞 정원으로 나갔다. 곳곳에서 라이언을 찾는 수색이 계속되고 있을 텐데 정원은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 평화로웠다.

카를은 여유로워 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 아우라는 마음이 놓였다. 언제 라이언이 나타나도 그가 그녀를 지켜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우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면 좀 이상해.”

“뭐가?”

“라이언은 왜 굳이 핀의 봉인을 해제하려 하는 걸까.”

“라이언은 제니아인들에게 인기가 좋아. 너도 알다시피.”

맞는 말이었다. 제니아인들은 라이언의 끝없는 관심과 구호품에 넘어간 지 오래였다.

‘카를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제니아인들의 편지까지 받았어. 라이언의 목숨을 구해 달라고 애걸하는.’

“그가 정말 황궁을 칠 생각이라면 제니아의 마법사를 전력으로 쓰고 싶을 거야.”

아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아우라는 수트라에서 보았던 군사들을 떠올렸다. 황실의 군대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대군이었다.

‘마법사가 있으면 좋겠지만 필수는 아닐 거야. 황실군도 마법사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잖아.’

게다가 아우라에게 쉽게 핀의 조각을 내어 주던 일. 봉인을 푸는 방법을 알려 준 일. 그 모든 것이 한 가지 가능성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우라가 카를의 팔을 잡았다.

“카를, 그 사람.”

카를이 걸음을 멈추었다. 아우라가 그에게 말했다.

“뭔가 절박해 보였어.”

“……더 설명해 봐.”

“나를 도와 핀을 깨고 싶은 정도가 아니라…… 핀이 꼭 깨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

“예상 가는 이유라도 있어?”

사실 이렇다 할 확실한 이유는 없었다. 괜한 소리를 했나 싶었다.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아니. 느낌일 뿐이야.”

“그게 어떤 느낌인데?”

카를이 진지하게 되물었다. 그녀가 마치 중요한 정보라도 쥐고 있는 것처럼.

아우라는 말을 골랐다.

‘라이언이 핀 이야기를 할 때마다 어떤 느낌을 받았더라. 그 여유작작한 얼굴 뒤에 숨은…….’

“……생존이 달린 느낌.”

“…….”

“그런 느낌이었어.”

“생존이라.”

카를은 가만히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희미하게나마 짐작 가는 바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기억해 둘게.”

카를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더니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우라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모범적인 황제 부부가 된 것 같았다. 중요한 사안을 논의하고, 서로를 존중하고, 대화에 귀를 기울이는.

그래서 그만두고 싶어졌다. 이런 분위기의 산책은.

“산책은 이만하면 된 것 같아. 들어갈래.”

아우라가 몸을 돌리려 했다. 그런 그녀의 팔을 카를이 잡았다.

“조금만 더 걸어.”

그는 반쯤 강제로 그녀를 끌었다. 아우라는 엉겁결에 그를 따라 계속 걸었다.

“어, 언제까지 걸어야 하는 건데?”

“글쎄. 마음 같아선 아침까지.”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내일이면 또 죽자고 싸울 거잖아. 넌 엘리제를 찾겠다고 난리를 칠 테고, 난 그걸 막을 거고. 그러기 전에 잠깐 쉰다고 생각해.”

아우라는 놀랐다. 카를이 억지 아닌 억지를 부려서가 아니었다.

‘엘리제……. 세상에, 엘리제를 잊고 있었어.’

아우라는 이 밤 산책을 어떻게든 이용했어야 했다. 카를을 떠보고 속여서 엘리제를 숨긴 곳을 캐냈어야 했다.

하지만 아우라는 그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의 곁에서 마음을 놓고 산책을 했다. 마치 진짜 부부라도 된 양 속 좋게.

이럴 순 없었다. 이건 그녀가 아는 자신이 아니었다.

“아니. 나는, 난…… 들어갈래.”

“꼭 그래야 할 이유라도 있는 거야?”

“그게…….”

평소라면 이유를 댈 필요까지 있느냐 쏘아붙였을 거였다. 그리고 뒤돌아 가 버리면 그만인 일이었다. 하지만 너무 당황스러워서일까. 그녀는 변명을 찾고 있었다.

“배가…… 고파서.”

아우라는 자신이 뱉어 놓고도 어이가 없었다.

‘배가 고프다니. 어린애도 아니고.’

어이가 없는 건 카를도 마찬가지 같았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우라를 보았다.

“정말이야?”

“아니, 그게…….”

아우라가 한 걸음 물러났다. 대체 어디서부터 일이 이렇게 꼬였나 싶었다. 리엘이 카를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했을 때부터?

카를이 아우라의 손을 잡았다.

“가자, 그럼.”

그가 본궁을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아우라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야 이 밤 산책을 끝내나 싶었다.

그러나 카를이 향하는 곳은 방이 아니었다. 그는 엉뚱한 복도로 아우라를 이끌었다.

“어딜 가는 거야?”

“배고프다며.”

그가 그녀를 데려간 곳은 식당이었다. 식당 앞에서 아우라가 또 당황했다.

“난 뭘 먹을 생각은-”

“들어가.”

카를은 그녀를 식당으로 밀어 넣었다. 막 정리를 마치고 나가려던 청소부가 그들을 보고 놀랐다.

“폐, 폐하?”

“요리사를 데려와. 깨워서라도.”

“아, 예! 알겠습니다.”

야밤이었다. 새벽에 일어나야 하는 요리사는 이미 잠들었을 것이다. 청소부는 후다닥 식당을 나섰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카를.”

아우라가 뭐라고 말하건 카를은 그녀를 의자에 앉히고 잔에 물을 채웠다.

“배가 고프면 뭘 먹어야지. 당연하잖아.”

“내가 그럴 마음이 없다고 하잖아.”

“한 번만.”

카를이 물 잔을 그녀의 앞으로 밀었다.

“한 번만 그냥 군말 없이 받아 줄 순 없는 거야?”

“…….”

“고작 밥 한 끼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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