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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79)화 (79/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79화

아우라는 본궁의 복도를 천천히 걷고 있었다. 산책을 하기가 어려워 복도라도 걷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의 뒤에 기사들이 줄줄 따라붙었다. 모두 카를이 붙여 놓은 황제군이었다.

‘곤란하군. 엘리제를 찾아야 하는데.’

알아보기론 테인 공작가는 조용하다고 했다. 조카딸이 사라졌는데 그렇게 쉬쉬할 수는 없었다.

‘엘리제가 핀을 가지고 나온 거야. 그래서 공작가 쪽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겠지.’

그리고 한 가지 더.

‘카를이 엘리제를 데리고 있다면 황궁에 뒀겠지. 신경 쓰이는 건 손안에 둬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니까.’

복도엔 그 어느 때보다 황제군이 많았다. 아우라와 리엘이 있는 층을 수비하기 위해 배치된 자들이었다.

“……흐음.”

아우라가 생각하기엔 이들 중 하나가 엘리제를 숨겼을 것 같았다. 그런 은밀한 일은 황제군이 아니면 해내기 힘드니까.

그러니까, 이 앞에 지나다니는 이 수많은 기사 중 한 명이.

그녀는 지나다니는 기사들을 유심히 살폈다. 대부분 아우라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멀찍이 길을 돌아갔다. 그러나 그들 중 한 사람만이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보며 다가왔다. 테오였다.

“안녕하십니까, 황후 폐하.”

“테오. 고생이 많아요.”

아우라가 싱긋 웃으며 인사를 받아 주었다. 그러자 테오가 꾸벅 예를 차리곤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이상한데.’

테오의 분위기가 뭔가 달랐다. 평소보다 훨씬 사무적이었을뿐더러 묘하게 냉정했다.

테오는 중립을 지킬 줄 아는 신하였다.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지도 않는다. 또한 윗사람을 재고 판단하는 실수도 하지 않는다. 그런 테오가 저렇게 나온다는 건…….

“테오.”

아우라의 부름에 테오가 한 박자 늦게 뒤를 돌았다.

“네, 폐하.”

“황제 폐하께 가는 길인가요?”

“네. 집무실에 잠시 들러 서류를 가져가던 중이었습니다.”

테오가 들고 있던 서류를 들어 보였다. 그리고 고개를 꾸벅 숙이고 다시 가려 했다.

“테오.”

“……예.”

그가 마지못해 다시 걸음을 멈췄다.

“혹시 무슨 일이 있나요?”

“…….”

“테오?”

“……어떤 일을 말씀하시는 건지요?”

‘있구나.’

뭘까 싶었다.

‘태도로 보아하니 엘리제는 아닌 듯한데.’

아우라는 역으로 물었다.

“그대가 수행하는 ‘일’ 중에서 내게 말해야 할 게 있나요?”

“……없는 듯합니다.”

‘그럼 하나밖에 안 남지.’

“혹시 나와 관련하여 폐하께 전할 만한 말이 있나요?”

테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테오가 그토록 동요하는 건 처음이었기에 아우라는 내심 긴장됐다.

“……테오?”

테오는 뭔가 결심한 듯 아우라를 호위하던 기사들에게 눈짓했다. 그들이 눈치껏 자리를 비켜 주었다. 테오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저는…… 저는 황후 폐하께서 황제 폐하의 곁에 계신 게 좋습니다. 계셔 주셔서 감사하다고 생각합니다.”

갑자기 저게 무슨 소리일까. 아우라는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했다. 테오가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래서 계속 계셔 주셨으면 합니다.”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라이언과 계약을 하셨습니까?”

“계약이요?”

“차마 입에 담기도 불경한 내용인지라 직접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기억하시는 바가 없으십니까?”

아우라는 그제야 테오가 이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라이언 대공과 저의 계약서를 입수했나요?”

“그렇습니다.”

아우라는 난감했다.

‘하필 그게 테오의 손에…….’

테오는 강직한 신하였다. 아우라가 뭘 제안하건 계약서를 넘기지 않을 거다. 게다가 오해가 생기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아무리 강압에 못 이겨 서명했다고 해명해 봤자 증거는 없으니까.

“황제 폐하도 아십니까?”

“모르십니다.”

“고할 건가요?”

“만약 황후 폐하께서 그걸 원하지 않으신다면.”

테오가 참 어렵다는 듯 뜸을 들였다.

“계속 황제 폐하의 곁에 있어 주신다고 약속해 주실 수 있다면…… 제 선에서 없애겠습니다.”

아우라는 테오가 카를을 얼마나 생각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또 그녀를 믿고 싶은 마음까지도.

그래서 아우라는 테오에게 미안했다. 그는 하필이면 아우라가 들어줄 수 없는 조건을 내걸고 있었다.

“그런 약속은 못 합니다.”

아우라의 말에 테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그런…….”

그는 겨우 말을 삼켰다. 여기서 더 하면 무례였다. 물론 아우라는 이미 그 말뜻을 알아들었지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거겠지.’

“그러니 약속이 아니라 부탁을 할게요, 테오.”

“…….”

“말씀하신다면 저는 막을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약속을 할 수 없으니 부탁을 하겠다는 거였다. 테오는 그녀의 그런 냉정한 태도에 절망했다. 아우라가 말했다.

“테오. 그래도 변명 아닌 변명을 하자면…… 그 계약서의 서명은 반쯤은 강제로 했습니다.”

“그럼 나머지 반은 뭐란 말입니까?”

테오가 말을 뱉어 놓고 흠칫했다.

“……죄송합니다, 황후 폐하. 실언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아우라가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테오는 그 미소 앞에서 할 말을 잃었다. 이 사람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똑똑한 그조차도 가늠이 안 갔다.

아우라가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

“아, 혹시 엘리제 영애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나요? 황제 폐하께서 데려오셨을 텐데.”

테오는 하마터면 답을 말할 뻔했다. 이 궁의 꼭대기 층에 있노라고.

“모릅니다, 폐하.”

“으흠. 그렇군요.”

아우라가 한 번 더 빙긋 웃어 보이곤 뒤돌아 가 버렸다. 테오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조쉬가 무섭다 무섭다 하더니…….”

정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었다. 특히 뒤 같은 건 돌아보지도 않겠다는 저 마음가짐이.

***

라이언과 신디온은 황궁의 북쪽 탑 뒤편에 숨어 있었다. 병사들이 궁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그나마 이쪽이 인적이 드물어 숨어 있을 만했다.

가끔 병사를 마주쳐야 할 때는 신디온이 힘을 썼다. 그저 그런 병사 한둘 현혹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정신력이 강한 기사들이라면 달랐겠지만.

신디온이 라이언에게 말했다.

“어서 빨리 실시아나 수트라로 가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여긴 너무 위험합니다.”

“그래도 여기에 내가 원하는 것들이 다 있으니까…… 발을 떼기가 어렵단 말이지.”

그가 원하는 건 세 가지였다. 핀, 핀의 봉인을 풀어 줄 리엘 그리고…… 아우라.

“리엘이라도 데려왔다면 눈 딱 감고 떠났겠는데 말이야.”

라이언이 신디온에게 슬쩍 눈치를 줬다. 신디온이 큼 하고 시선을 돌렸다.

오늘 아침 신디온이 리엘을 납치하려 했다. 별궁 정원에 숨어드는 것까진 성공적이었다. 리엘이 유모를 따돌리고 혼자 논 것은 운이 좋았고.

라이언이 말했다.

“그때 황제군이 왔다는 건 내가 리엘을 노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는 뜻이야.”

“그렇겠죠.”

“즉 황후가 황제에게 일러바쳤다는 뜻이지.”

그렇게 말하는 라이언의 푸른 눈이 서늘하게 반짝였다.

“난 그런 생각을 하면 참 화가 난단 말이야.”

쉬울 거라고 생각했다. 남편에게 외면받고 3년을 유폐당한 여자. 게다가 국민을 위해 죽을 운명에 처한 여자.

‘그 죽음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고 해도 넘어오지 않다니…….’

참 어렵고 어려웠다. 그러나 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뭐, 그래도 계약서를 흘리고 왔으니 곧 황제의 곁을 떠나고 싶어지겠지.’

“가자, 신디온.”

“네, 전하.”

신디온은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참 대단한 사람이었다. 반역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으면서 황궁을 떠나길 아쉬워하다니.

“북쪽 문으로 가시죠. 제 부하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

“그 부하에게 테인 공작가의 상황 역시 알아보라고 전했습니다.”

“잘했네. 기회가 되면 그곳에서 마지막 핀 조각을 가져오면 되겠어.”

그리고 그 조각으로 황후와 다시 이야기해 볼 작정이었다. 그때쯤이면 황후도 황제와 사이가 퍽 벌어져 있을 테니까.

그들은 북쪽 문까지 재빠르고 조용히 나아갔다. 신디온이 문지기를 마법으로 현혹했다. 병사가 넋 나간 얼굴로 문을 열어 주었다.

“전하, 신디온 님.”

기다리고 있던 신디온의 부하가 다가왔다. 라이언이 물었다.

“그래. 공작가는 어때?”

“그게…… 엘리제 영애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공작가가 발칵 뒤집혔어요.”

“뭐? 엘리제가?”

“네. 하지만 내부에서 쉬쉬하는 것 같습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요.”

라이언이 멈칫했다. 몇 가지 경우의 수가 그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전하?”

신디온이 불안하게 그를 불렀다. 라이언이 대뜸 뒤를 돌았다.

“난 다시 들어가 봐야겠어. 신디온, 따라와.”

“네?! 전하! 어째서요?”

라이언은 아직 닫히지 않은 문틈 사이로 몸을 슬쩍 넣었다. 신디온이 하는 수 없이 그를 따랐다.

“겨우 나왔는데…… 대체 왜요?”

혼란 가득한 그의 얼굴을 보고 라이언이 피식 웃었다.

“황후 폐하께 볼일이 생긴 것 같아서.”

***

카를은 종일 정신이 없었다. 좀처럼 라이언의 흔적을 찾기가 어려웠다. 차라리 무슨 짓을 벌이면 쉬울 텐데 그는 쥐새끼처럼 숨어만 있었다.

그에겐 마지막 일과가 하나 남아 있었다. 바로 엘리제를 보는 일이었다. 황궁 꼭대기 층에 다다르자 계단을 지키는 병사들이 길을 비켜 주었다.

엘리제가 묵는 방은 복도의 가장 안쪽에 있었다. 노크를 하고 문을 열자 엘리제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폐하.”

“미안하군. 사람을 데리고 와 놓고 찾아오질 못해서.”

“조쉬 님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대공…… 아니, 반역자가 탈옥했다고요.”

카를이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둘러보았다. 어슴푸레한 달빛만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밤에는 지내기 쉽지 않겠군.”

엘리제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그 때문에 그녀는 밤이 되어도 촛불 하나 켤 수 없었다.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엘리제가 의연하게 말했다.

“빨리 반역자 문제를 해결하고 공작가 유언장 수색을 계속하지. 그때까지는 기다려 줬으면 해.”

“네, 물론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래. 그럼 또 들리지.”

카를이 방을 나서려 했다. 그때, 엘리제가 어렵게 입을 뗐다.

“저, 폐하.”

“뭐지?”

“저는 언제쯤 황후 폐하를 뵐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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