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78화
카를이 되물었다.
“별궁으로?”
“그래. 라이언은 나뿐만 아니라 리엘도 노리고 있어.”
“갑자기 리엘을 왜?”
“그는 리엘을 이용해서 핀의 봉인을 해제하려 해.”
“리엘? 네가 아니라? 리엘은-”
“맞아. 리엘은 아홉 살밖에 되지 않아서 봉인 해제의 조건에 맞지 않아. 그래서 대공은 마법을 쓰려 하고 있어.”
“……설마.”
“실시아의 마법으로 리엘을 나이 들게 하려는 거야.”
카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미친 자가……! 아우라, 그 이야기를 왜 지금 와서야 해?”
“그거야…….”
아우라는 라이언에게 그 말을 들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라이언이 자신을 짓누르던 순간의 무력감과 공포. 역시나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라이언이 바로 잡혔잖아. 그래서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
그녀는 카를의 팔을 잡았다.
“그에겐 나보단 리엘이 더 쉬운 타깃일 거야. 특히 별궁에 있을 때는 더욱. 어서 리엘에게 가 봐야 해.”
“이런……. 알았어. 일단 너도 여길 나가.”
카를은 아우라를 데리고 도서관을 나섰다. 그는 대기하고 있던 테오에게 말했다.
“당장 기사들과 함께 별궁으로 가라. 가서 리엘 황녀를 데리고 본궁으로 와.”
“네, 폐하.”
테오는 바로 별궁을 향해 뛰어갔다. 이어 두 사람은 계단을 내려갔다. 아우라는 카를에게 물었다.
“리엘을 본궁으로 데려오게?”
“그래. 내 옆방이 비었으니 그곳에서 지내게 하려고. 네 말처럼 라이언이 데리고 다니는 마법사는 꽤 강한 것 같으니.”
그 말에 아우라는 내심 놀랐다. 카를이 리엘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위급한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거겠지. 마법사는 둘째 치더라도 라이언도 상당히 강하니까.’
계단을 내려가던 카를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뒤를 돌아 아우라를 올려다보았다. 아우라도 덩달아 걸음을 멈췄다.
“왜…… 그래?”
“너는 내 방으로 와.”
“……어?”
“잠시 내 방에서 지내. 라이언을 잡을 때까지만.”
아우라는 진심으로 카를이 장난을 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표정엔 일말의 장난기도 없었다.
“걱정돼서 그러는 거라면 내가 리엘과 같은 방을 쓸게.”
“두 사람이 지낼 만한 방은 아니야. 소파에서 자고 싶은 게 아니라면.”
“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카를이 아우라가 서 있는 계단으로 올라왔다. 그에 맞춰 아우라의 시선도 점점 올라갔다. 카를은 잘 들어 두라는 듯 말했다.
“어쨌거나 라이언의 최종 타깃은 핀을 가진 너야.”
“…….”
“내가 싫은 마음이야 이해하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야.”
아우라는 하마터면 그런 건 아니라고 말할 뻔했다. 엘리제 일로 화가 난 건 맞지만 싫은 것과는 다르다고.
하지만 아우라는 그의 말을 굳이 정정하진 않았다. 대신 더는 토를 달지 않고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알았어. 그렇게 할게.”
“잘 생각했어.”
“라이언이 잡힐 때까지만이야.”
그녀는 다시금 조건을 붙였다. 카를이 피식 웃었다.
“어련하겠어.”
***
“흐흐음…….”
리엘은 유모와 손을 잡고 정원을 걷고 있었다. 요즘 키가 또 커서 며칠 전 새 드레스를 맞추었다. 새 드레스 덕일까. 리엘은 기분이 좋아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교육, 입고 먹는 것, 취미 등등. 리엘은 최고의 환경 속에서 자라고 있었다. 카를은 그런 것에 돈을 아끼지 않고 지원했다.
“황녀님, 이제 곧 글쓰기 선생이 옵니다. 들어가셔야지요.”
유모가 슬쩍 눈치를 줬다. 그러나 이제 막 기분이 좋아진 리엘이 말을 들을 리 없었다.
“싫어. 글쓰기 재미없단 말이야.”
“황녀님. 수업을 열심히 듣다 보면 분명 재미있어지실 거예요.”
유모란 사람들은 왜 저렇게 하나같이 재미없는 말만 하는 걸까. 리엘은 하품이 날 지경이었다.
이 지루함의 해법은 간단했다. 재미가 없으면 재미를 만들면 그만이었다.
리엘이 유모의 손을 놓고 외쳤다.
“술래잡기 시작!”
그리고 정원으로 우다다다 달려가기 시작했다.
“어휴…… 또! 잡히면 바로 들어가시는 거예요! 아셨죠?”
유모는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 듯 리엘을 쫓았다.
정원엔 조경용 쥐똥나무가 작은 미로처럼 심겨 있었다. 리엘은 이 나무 사이로 뛰어다니는 걸 좋아했다. 자신이 동화 속 마법에 걸린 여주인공이라고 생각하면서.
“히히…….”
리엘이 한참을 달렸을 때였다. 뒤를 보니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 유모는 착하고 친절한데 발이 느린 게 단점이었다.
‘어느새 너무 깊이까지 와 버렸네. 이만 돌아갈까?’
“유모?”
리엘은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워낙 길이 미로 같은지라 헷갈렸지만 걷다 보면 나갈 순 있었다.
“유모! 어디 있어? 나 이제 들어갈게.”
다시 외쳤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리엘은 한참을 자박자박 걷기만 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리엘은 문득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히 등 뒤로 인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누, 누구지? 유모가 이럴 리는 없는데…… 여기서 나가야 해.’
타다닥……!
리엘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쥐똥나무 안에서 누군가가 리엘을 따라왔다. 그 기척은 마치 쥐처럼 빨랐다.
‘어, 어떡해……. 누가 좀 도와줘……!’
리엘의 눈에 눈물이 어렸다. 이런 공포감은 난생처음이었다. 그때 리엘이 마주친 수풀에서 손이 쑥 나왔다.
“꺄악!”
리엘이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황녀님!”
“황녀님! 괜찮으십니까?”
어디선가 기사들이 나타나 리엘을 일으켰다.
“저, 저기! 손이……!”
리엘이 벌벌 떨며 수풀을 가리켰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수풀을 망연히 바라보던 리엘이 와앙- 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모든 일이 빠르게 처리됐다. 리엘과 리엘의 짐은 바로 본궁으로 옮겨졌다. 소식을 들은 아우라가 바로 리엘을 찾아왔다. 리엘은 아직도 히끅히끅 울고 있었다.
“리엘.”
“……으아앙!”
아우라를 보자 리엘이 더 서러워진 듯 울음을 터트렸다.
“그만 울어. 뚝.”
“히끅……! 히끅…… 귀, 귀신을 본 것 같아.”
“이야기 들었어. 정원에서?”
리엘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언이 분명해. 좀 더 빨리 리엘을 보호했어야 하는데.’
아우라는 죄책감에 리엘을 꼭 안아 주었다. 이 어린애는 어른들의 끔찍한 사정을 몰라야 했다. 라이언이 리엘을 두고 세운 계획마저도.
‘할아버지가 자신을 위협하려고 했다는 것보다는 귀신 쪽이 더 나을지도.’
아우라가 리엘을 놓아주며 말했다.
“귀신은 나도 본 적이 있는데.”
“뭐……? 정말이야?”
리엘이 그새 흥미를 보였다. 애들의 기분이란 참으로 변화무쌍한 법이었다.
“그럼. 딱 네 나이 때였나. 왕궁의 동산을 걷다가 나무에서 튀어나온 손을 봤지.”
“그, 그래서?”
“나도 너처럼 도망쳤어. 무서우니까.”
“맞아! 너무 무서워. 그다음에 또 나온 적 있어?”
리엘이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물었다. 아우라가 웃으며 리엘의 머리를 넘겨 주었다.
“아니. 내가 듣기론 그런 귀신은 평생 한 번밖에 못 본대.”
“엣…… 그래?”
리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좀 아쉬운 것 같기도 하고.”
“푸핫.”
아우라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쉽다니. 방금까지 무서워서 울고 있던 주제에. 이 황녀의 용기라는 건 정말 가늠이 안 됐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있어, 리엘. 어디로 나가고 싶으면 꼭 내게 이야기하고. 난 옆방에 있으니까.”
아우라의 짐은 이미 카를의 방으로 옮겨진 상태였다. 짐이라고 해 봐야 옷 몇 벌 정도지만.
리엘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삼촌 방에 있다고?”
“응.”
“……왜?”
‘아차.’
설명하기가 애매했다.
‘적이 나타났다고 하면 겁을 먹을 텐데. 어떻게 말해야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려나.’
“음…… 내가 요즘 황제 폐하와 많이 친해져서.”
“원래는 안 친했어? 부부잖아.”
생각보다 날카로운 구석이 있는 꼬맹이였다. 아우라가 애써 웃었다.
“친……했지.”
“그럼 더 친해진 거야?”
“그래. 말도 못 할 만큼 친해져서, 낮이고 밤이고 같이 놀고 싶어서 내가 놀러 왔어. 이제 됐지?”
“그렇구나.”
리엘이 이제야 이해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우라는 리엘이 뭔가를 더 묻기 전에 얼른 방에서 나와 버렸다.
***
테오는 지하 감옥을 수색 중이었다. 라이언이 갇혀 있던 바로 그 감옥이었다.
“흠…….”
‘별것 없을 것 같긴 한데. 마법을 사용한 것도 확실해 보이고. 뭐, 그래도 확인은 해 봐야겠지.’
그는 땅바닥의 지푸라기를 손으로 훑었다. 지푸라기 곳곳에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카를이 라이언을 주먹으로 때렸던 흔적이었다.
테오가 지푸라기 사이에서 뭔가를 집었다. 뿌리째 뽑힌 어금니였다.
“이야…… 꽤 아팠겠는걸?”
‘이렇게까지 때린 폐하도 대단하긴 하지만.’
듣자 하니 대공이 황후에게 몹쓸 짓을 저지를 뻔했다고 했다. 테오가 카를이었어도 눈이 뒤집힐 상황이었다.
‘그래도 그런 식으로 감정을 내보이시는 분이 아니신데.’
카를은 화가 나면 검을 뽑지 주먹을 휘두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데블라에서도 그런 감정적인 폭력을 써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테오는 지금의 카를이 더 보기 좋았다. 울분을 터트릴 줄 안다는 건 그만큼 아낀다는 뜻이니.
“응?”
테오의 손끝에 뭔가가 걸렸다. 그는 지푸라기 사이에서 그것을 끄집어냈다. 그것은 두 번 접힌 종이였다.
‘이건…… 계약서 같은데?’
테오가 그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이내 그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