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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77)화 (77/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77화

엘리제와 남자는 길가까지 쉬지 않고 달려갔다. 남자는 엘리제를 정체 모를 마차로 안내했다. 두 사람이 마차에 타자마자 남자가 마부에게 외쳤다.

“출발해!”

마차 밖으로 채찍이 말 등을 후려갈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차가 급하게 출발했다.

“하아…… 하아…….”

엘리제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로브를 쓴 남자를 물끄러미 보았다.

“……조쉬 님?”

남자가 움찔했다. 그는 조금은 민망한 듯 로브를 벗었다. 얼굴을 확인하자 엘리제가 환하게 웃었다.

“역시 맞았군요……. 감사합니다.”

“아뇨, 뭐. 전 명령을 따르는 것뿐입니다.”

로브를 벗자 어째 더 자신감이 없어진 조쉬였다.

“아닙니다. 오지 않으셨으면 큰일이 났을 거예요.”

“공작가 앞 대로에서 기다리려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혼자 나오시긴 어려울 것 같아서요. 혹시 몰라서 공작가로 가 봤는데 문을 부여잡고 계셔서……. 아니, 그래도 들어가서 싸울 마음은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횡설수설하던 조쉬가 무심코 엘리제의 발을 보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그녀는 맨발이었다.

“신발은…….”

“아, 네. 일이 그렇게 됐습니다.”

엘리제가 민망한 듯 웃었다. 한시름 덜었기 때문일까. 그녀의 웃음이 평소보다 밝았다.

“바, 발은 괜찮으신 겁니까? 어디 찔리셨다거나.”

“괜찮아요. 좀 지저분해진 것뿐입니다.”

조쉬는 생각했다.

‘어쩐다. 아무리 몰래 들이라고 하셨다지만 명색이 공작가 영앤데 맨발로 황궁에 들일 수야…….’

그때 엘리제가 물었다.

“황제…… 폐하의 명령으로 오신 거죠?”

“네, 그렇습니다.”

“그럼 저는 황궁으로 들어가게 되는 건가요?”

“맞습니다. 다만 당분간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숨어 계셔야 합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황제 폐하께서 해 주실 테지만요.”

“그렇군요……. 혹시 그 전에 황후 폐하를 뵐 수 있을까요?”

“그……건 곤란합니다. 바로 모셔 오라는 황제 폐하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알았습니다.”

엘리제는 조쉬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래도 황제를 먼저 만나고 그 후에 황후를 만나야 할 것 같았다.

어찌 됐건 엘리제는 겨우 한숨 돌렸다. 마차는 황궁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고 있었다.

눈치를 보던 조쉬가 대뜸 로브를 벗어 엘리제에게 내밀었다.

“황궁에는 정체를 숨기고 들어가셔야 합니다. 눈에 띄면 테인 공작도 알게 될 테니까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엘리제가 조쉬의 로브를 둘렀다. 남성용 로브가 엘리제를 폭 감쌌다.

‘시원한 향유 냄새.’

조쉬는 조금 머뭇거리더니 이번에는 신발을 벗어 내밀었다.

“이……것도 받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

“맨발로 들어가실 수야 없지 않습니까.”

“아, 아닙니다! 그럼 조쉬 님이 맨발로 가셔야 하잖아요. 드레스가 발을 가려 주니 괜찮습니다.”

“그래도 신으십시오. 저야 아무 놈에게나 빼앗아 신으면 됩니다.”

엘리제는 당황스럽고 미안했다. 남자의 신발을 얻어 신다니.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었다. 격과 예의를 따지기엔 너무 늦었다. 엘리제는 결국 조심스레 신발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임무일 뿐입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렇게 말하는 조쉬의 귀가 빨개졌다.

‘여자가 내 신발을 신다니. 이게 무슨 일이야.’

그 역시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평생 여자라곤 가족밖에 몰랐던 조쉬였다. 어쩌다가 공작가 영애와 이렇게 얽혔는지 모를 일이었다.

“다정한 분이시군요. 조쉬 님은.”

엘리제가 웃으며 말했다. 딴에는 예의를 차린 인사였다. 그러나 그 말에 조쉬의 얼굴이 터져 나갈 듯 붉게 물들었다.

“……임무입니다.”

조쉬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역시, 여자는 무서웠다. 무섭고도…… 사람 속을 간질거리게 하는 데가 있었다.

저 멀리 황궁이 보였다. 그 화려한 전경을 바라보며 엘리제는 침을 꿀꺽 삼켰다.

***

카를이 초조하게 집무실에 앉아 있었다.

‘지금쯤 조쉬가 돌아와야 할 시간인데.’

영 소식이 없어 그는 하염없이 깃펜만 돌리고 있었다.

어제 새벽, 카를은 보고를 받았다. 아우라가 공작가에 사람을 보낸 정황을 포착했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부터 모든 게 발 빠르게 진행됐다. 카를은 아우라의 사람을 돈으로 매수하고 바로 철수시켰다.

‘아우라는 지금쯤이면 잔뜩 화가 났겠군.’

어젯밤의 달콤한 시간은 이렇듯 신기루처럼 사라지는가 싶었다. 하지만 카를은 아쉽지 않았다. 그녀와의 관계는 항상 이런 식이었으니. 이런 일로 미움을 받는다면 얼마든지 받아 줄 수도 있었다.

똑똑똑.

다급한 노크 소리에 이어 문이 벌컥 열렸다. 카를이 반사적으로 외쳤다.

“조쉬?”

“폐하.”

“……테오?”

테오는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카를은 불길한 기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 있나?”

“라이언 대공이 사라졌습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지?”

“가, 간밤에 감옥을 탈출한 것 같습니다.”

카를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러나 이내 냉철하게 물었다.

“자세한 정황은?”

“조력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지하 감옥 입구에 많은 간수가 죽어 있었습니다.”

사형수의 감옥까지 가는 길은 뛰어난 병사와 간수들이 지키고 있었다. 웬만한 실력자가 아니고서야 그들을 다 죽일 수 있을 리 없었다.

“……어떤 방식으로 죽었지?”

“이렇다 할 상처는 없이 숨만 끊겨 있었습니다.”

“……마법이군.”

“그런 듯싶습니다.”

카를은 그제야 떠올렸다. 수트라에 다녀오던 날, 아우라가 이궁에서 했던 말을.

‘라이언을 따르는 실력 좋은 마법사가 있어. 이름은 신디온이야.’

‘그자구나.’

“멀리 가진 못했을 거다. 황궁과 수도를 샅샅이 뒤져.”

“네, 폐하.”

테오가 고개를 숙였다. 카를은 그런 테오를 보며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아니, 라이언을 찾는 건은 내가 지휘한다.”

“폐하께서 직접 말씀이십니까?”

“그는 황후를 찾으려 할 거야. 황후에게 가야 해.”

라이언은 목숨을 부지하자고 이대로 도망갈 사람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한 번은 더 아우라에게 접근할 거다. 끈질기게.

카를과 테오는 집무실에서 나왔다. 그때, 저 멀리 조쉬가 달려왔다.

“폐하! 다녀왔습니다.”

“그래. 임무는?”

“엘리제 영애는 꼭대기 층에 모셨습니다.”

황궁의 꼭대기 층은 선대 황족의 후궁을 위한 공간이었다. 카를의 대에선 그런 여인들이 없었기에 한 층이 그대로 빈 상태였다.

“바로 올라가 보시지요.”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조쉬, 엘리제에게 조만간 내가 찾아가겠다고 말을 해 놔.”

“네? 하지만…….”

테오가 잔말 말고 명령에 따르라는 듯 조쉬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조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테오를 보았다.

카를이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테오는 조쉬에게 귓속말을 했다.

“라이언 대공이 탈옥했어.”

“뭐?!”

조쉬가 놀라 큰소리로 외쳤다. 테오가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댔다.

“쉿. 긴급 상황이야. 군사를 풀어야 해.”

“후우…… 그래야겠군.”

“엘리제 영애에게는 네가 잘 말해 놔.”

테오가 조쉬의 어깨를 툭툭 치곤 카를을 따라갔다. 조쉬가 구시렁거리며 꼭대기 층으로 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왜 또 나야…….”

***

아우라가 소식을 들은 건 아침 무렵의 일이었다. 공작저에 접근하기로 한 사람이 돌연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뒤늦게 사람을 새로 보냈지만 이미 늦었다. 엘리제는 한 남자와 함께 공작저에서 도망쳤다고 했다. 카를의 짓이 분명했다.

울컥한 아우라는 혼자 조용한 곳에 있고 싶었다. 특히 카를이 오지 않을 만한 곳에서.

그녀가 선택한 곳은 황족 전용 도서관이었다. 사서에게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명령한 후 가장 깊은 곳으로 왔다.

그녀는 햇빛이 들어오는 고요한 창가에 서서 화를 식혔다.

알고는 있었지만 허무했다. 어젯밤 카를과 함께한 시간은 어디로 간 걸까. 이렇듯 해가 뜨면 얼굴을 붉힐 일밖에 남지 않는데.

‘아니, 카를을 생각해서 뭘 어쩌겠다고? 그가 엘리제를 어디에 뒀을지 생각해야지.’

아우라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저벅, 저벅…….

저 멀리서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 아우라가 고개를 돌렸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는데. 누구지?’

길게 늘어선 책장 때문에 발소리의 주인공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소리를 듣고 남자라는 것 정도만 짐작할 뿐.

그리고 잠시 후, 책장 사이로 그 주인공이 모습을 보였다. 아우라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는 천천히 카를에게로 다가갔다. 그에게 바짝 다가선 그녀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엘리제를 어디에 뒀어?”

카를은 대답 대신 그녀에게 물었다.

“대체 왜 혼자서 여기 있어?”

“넌 어떻게 알고 왔는데?”

“네 시녀장.”

‘미나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말해 둘걸.’

카를이 다시 물었다.

“왜 혼자서 여기에 있냐고 물었잖아.”

아우라는 그의 날 선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화를 내야 할 쪽은 아우라 자신이었다.

“혼자 마음을 가라앉히러 왔어. 방에 있으면 네가 찾아올 것 같아서.”

“하아…….”

카를이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우라도 다시 물었다.

“그래서, 엘리제는 어디에 있지?”

“……안 알려 줘.”

아우라가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됐어. 내가 찾으면 돼.”

아우라는 그대로 카를을 스쳐 가려 했다. 그런 그녀를 카를이 붙잡았다.

“라이언이 탈옥했어.”

“……뭐?”

아우라가 놀라 되물었다.

“네가 말했던 신디온이란 마법사가 도운 것 같아. 지금 황궁을 뒤지는 중이야. 다음엔 수도를 중심으로 수배를 할 생각이고.”

그녀는 그제야 카를이 여기까지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깨달았다. 연신 그녀에게 왜 혼자 있는 거냐고 따지듯 물은 것도.

‘내가 라이언과 마주칠까 봐 그런 건가.’

아우라는 자신이 참 우습다고 생각했다. 어째서 이런 일로 마음이 풀리려 하는 건지. 카를이 자신에게 그토록 큰 훼방을 놓았는데 저 퉁명스러운 걱정이 대체 뭐라고.

그런데 그 순간, 아우라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아우라가 카를의 팔을 잡았다.

“카를. 당장 별궁으로 사람을 보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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