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76화
아우라의 말은 카를의 많은 것들을 건드렸다. 그의 오기, 흥미 그리고 욕망까지.
카를은 그녀의 청록빛 눈이 자신을 흘겨보는 게 소름 끼치게 좋았다. 자신을 미워하라고 말하는 입술도.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군.’
카를이 다시 그녀의 입술을 파고들었다.
‘네가 그러면 내가 더 미치는데.’
“……읏.”
거친 입맞춤에 아우라가 신음을 흘렸다. 카를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타고 내려왔다. 허벅지를 꽉 잡자 그 뜨거움에 아우라가 눈을 꽉 감았다. 그의 손끝이 아래를 스칠 때 순간 좁아지는 미간이 예뻐 보였다.
카를은 그 미간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리고 그녀의 다리를 잡아 벌렸다. 그가 그녀의 안을 파고들자 아우라가 몸을 틀었다.
“아…….”
그가 완전히 다 들어갔을 때 아우라의 눈에 나른함과 긴장감이 함께 감돌았다.
카를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몸 안에서 터지는 자극에 아우라가 시트를 감아 쥐였다.
“아! 아아…….”
한참을 그렇게 움직이던 카를이 그녀의 다리를 제 어깨에 올렸다. 아우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카를이 다시 안을 파고들자 아우라의 허리가 휘었다.
“아읏!…… 아!”
아우라는 고개를 저으며 이를 물었다. 감당하기 어려운 쾌감이 그녀의 머리끝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카를은 계속 그녀를 연신 몰아붙였다. 아우라의 입에서 교성이 터져 나왔다. 시트를 잡은 손에 가는 핏대마저 섰다.
카를은 그 손을 보며 생각했다.
‘산장에서는 안아 달라고 팔을 내밀었잖아.’
그때의 그 몸짓은 정말 마지막 선물이었던 걸까.
‘하기야, 날 재우고 도망치려면 무슨 짓을 못 했겠어.’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아우라에게 한두 번 당해 본 게 아니었으니. 그러나 그걸 다 알면서도 그녀에게 서운해지는 자신이 우스웠다. 저 고집스럽게 시트를 부여잡은 손이 미워질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아우라가 시트를 스륵 놓더니 카를에게 팔을 뻗었다. 카를이 멈칫했다.
“하아…… 하아…….”
아우라가 밭은 숨을 내쉬었다. 눈꼬리에 눈물이 맺힌 채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
“……안아 줘?”
그의 물음에 아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를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그는 몸을 숙여 아우라를 안아 주었다. 아우라가 그의 목을 꽉 안고 매달렸다.
그는 아우라의 목덜미에 숨결을 뱉으며 생각했다. 자신은 이 품을 벗어날 재간이 없을 거라고.
***
퍽!
간수가 라이언을 감옥으로 밀어 넣었다. 라이언은 지푸라기 속에서 나뒹굴었다.
“네 인생 마지막 날이다. 잘 보내라!”
간수들이 낄낄대며 감옥을 떠났다. 라이언이 그들을 물끄러미 보았다.
‘살다 보니 별 더러운 꼴도 다 보는군.’
그는 지금 재판을 마치고 돌아온 차였다. 죄목은 반역죄. 형벌은 교수형. 라이언 자신도 예견한 결과였다.
라이언은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대어 앉았다. 팔이 등 뒤로 묶여 있어 운신이 쉽지 않았다. 아까 카를에게 맞은 얼굴도 퉁퉁 부어 있었다.
끼이이-
저 멀리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러운 발소리 역시.
“누구요?”
간수가 그쪽을 향해 물었다.
“윽…….”
“으윽!”
간수들이 하나둘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이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로브를 쓴 이가 철장 앞에 섰다. 라이언이 그에게 타박을 줬다.
“너무 늦었잖아.”
“황궁 경비가 좀 삼엄해야죠.”
“어서 문이나 열어, 신디온.”
신디온이 간수의 품을 뒤져 열쇠 꾸러미를 찾았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그가 감옥 문을 열었다.
“줄도 좀 풀어 봐. 어깨가 빠질 것 같아.”
라이언의 재촉에 신디온이 품에서 작은 단검을 꺼냈다. 그는 그것으로 라이언의 팔을 묶은 밧줄을 잘랐다. 라이언이 어깨를 빙빙 돌리며 굳은 몸을 풀었다.
“진짜 죽는 줄 알았어. 군사들은?”
“주 전력은 실시아 설산에 숨겨 뒀습니다.”
“전력 손실은 어때?”
“황제군에게 많이 죽긴 했습니다. 실시아에서 용병을 재모집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쓸데없이 돈만 나가겠군. 일단 실시아로 가야겠어. 아오…….”
라이언이 제 퉁퉁 부은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얼굴이 이래서야 어디 쪽팔려서 그 앞에 설 수 있겠나.”
“가는 길에 상처를 치료해 드리죠. 바로 실시아로 가실 겁니까?”
“아니.”
그가 피식 웃었다.
“아쉬워서 이대로는 못 떠나지.”
***
이른 아침, 공작가에 마차가 도착했다.
마차에서는 테인 공작과 엘리제가 내렸다. 그들은 피곤한 기색으로 공작저로 들어섰다.
“쉬어라, 엘리제. 나도 좀 쉬어야겠구나.”
“……쉬세요, 삼촌.”
엘리제가 떨떠름하게 인사했다. 테인 공작은 하품을 하며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엘리제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테인 공작의 애인은 무희였다. 그녀는 종일 공작에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공작은 그런 무희에게 푹 빠져 시도 때도 없이 몸을 주물럭댔다.
그 앞에서 엘리제는 몇 번이나 역겨움을 참았다. 끌려온 마당에 할 일도 없어서 그저 내내 먼 산을 보는 게 최선이었다.
‘정말…… 얌전히 기다리라는 황제 폐하의 말만 아니면…….’
엘리제는 제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피곤함에 한숨을 내쉴 때였다.
“후우…….”
툭.
뭔가가 유리창을 쳤다. 엘리제가 무심결에 창을 보았다.
툭.
작은 돌이 유리창에 부딪혔다.
‘……혹시?’
그녀는 일단 방문을 잠갔다. 테인 공작가는 말단 하녀 하나까지 공작의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문을 잠근 후에야 엘리제가 창문을 열었다.
슉.
뭔가가 날아와 창문틀에 꽂혔다. 편지가 매달린 작은 화살이었다.
엘리제는 얼른 화살을 뽑아서 방으로 들어왔다. 심장이 쿵쿵 뛰어 대고 있었다. 편지를 여니 유려한 필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때가 되었으니 핀을 가지고 나와 주길 바람. 뒷일은 모두 이쪽에서 책임지겠음. 지금부터 되도록 빨리 일을 진행하도록. 핀을 가지고 공작저를 나오는 순간 내 사람이 영애를 보호할 것임.」
발신인은 적혀 있지 않았다. 황제일 수도, 황후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건 결론은 똑같아. 일단 핀을 가지고 나가야 해.’
엘리제는 편지의 한 부분을 자세히 보았다.
「되도록 빨리 일을 진행하도록.」
그럼 망설일 이유 같은 건 없었다. 엘리제는 이미 너무 많은 걸 참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구두를 빤히 보았다. 굽도 높고 소리도 잘 울리는 구두였다.
‘격을 갖출 때가 아니지.’
구두를 벗고 조심스럽게 방을 나섰다. 하녀와 하인들의 눈을 피해 아래층으로 갔다. 맨발인 덕에 발소리는 전혀 나지 않았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테인 공작의 집무실이었다. 주위를 둘러본 엘리제가 슬쩍 그 안으로 들어섰다. 어둑하게 커튼이 쳐진 집무실 가장 안쪽. 언제나 멀찌감치 보기만 했던 작은 금고가 있었다.
금고 열쇠의 위치는 일찍이 봐 두었다. 공작의 집무실 책상 마지막 칸.
엘리제가 서랍을 열었다. 온갖 잡동사니가 가득했다. 그녀는 서둘러 서랍을 뒤졌다.
‘찾았다.’
사치스러운 은열쇠가 손에 들어왔다. 그녀는 열쇠를 금고의 자물쇠에 꽂아 넣고 돌렸다.
철컥.
자물쇠가 시원스럽게 풀렸다. 엘리제가 금고를 여는 순간이었다.
벌컥.
별안간 집무실 문이 열렸다. 엘리제가 깜짝 놀라 문 쪽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목욕 가운을 입은 공작이 있었다.
“이, 이…… 계집이!”
테인 공작이 엘리제에게 달려들었다. 엘리제는 얼른 금고의 주머니를 빼냈다.
‘도망쳐야 해!’
엘리제가 책상을 돌아 테인 공작을 피했다. 공작이 재빨리 그녀 쪽으로 몸을 날리듯 손을 뻗었다.
“이익!”
그의 손끝이 엘리제의 머리 장식을 잡아당겼다. 그녀의 금발이 흐드러지듯 풀어졌다.
엘리제는 미친 듯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집무실을 나와 공작가 복도를 달렸다. 태어나서 이렇게 빨리 달려 본 적이 없었다.
“저 계집을 잡아! 어서!”
테인 공작이 외쳤다. 사용인들은 ‘저 계집’이 테인 공작의 조카라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이 그것을 깨달았을 때 엘리제는 이미 문을 나서고 있었다.
“뭣들 하는 거야! 잡아!”
테인 공작이 계단을 내려오며 외쳤다. 그제야 하인 몇 명이 재빨리 문밖으로 달려 나갔다.
엘리제는 정원을 가로질렀다. 잔디를 밟는 맨발의 느낌이 생경했다.
‘문밖으로만 나가면, 문밖으로만……!’
“아가씨! 엘리제 아가씨!”
뒤에서 하인들이 그녀를 불렀다. 그들과 엘리제의 거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엘리제가 공작가 대문 앞에 섰다.
“아가씨?”
문지기들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그녀는 문고리를 잡았다. 잠금을 풀 순 있었지만 고리가 워낙 무거워서 속도가 더뎠다.
“아가씨를 잡아! 어서!”
뒤따라오던 하인이 외쳤다. 엘리제는 힘껏 문고리를 옆으로 당겼다. 철컹하고 문이 열렸다. 그때 하인들이 그녀의 양팔을 잡았다.
“아가씨, 이러시면 안 됩니다.”
“돌아가시죠.”
엘리제가 매섭게 그들을 쏘아보았다.
“물러나라.”
언제나 순하던 공작가의 아가씨였다. 그녀의 이런 모습에 하인들이 흠칫했다.
하지만 그들이 따라야 할 건 아가씨가 아니라 공작이었다. 결국 그들이 힘을 썼다.
“아가씨, 들어가시죠.”
“죄송합니다, 아가씨.”
그들이 엘리제를 공작가 건물로 끌어당겼다.
‘안 돼. 이대로 잡혀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을 거야.’
엘리제는 손을 휘젓다가 대문 문고리를 부여잡았다.
끼릭.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그때였다. 로브를 쓴 한 남자가 재빠르게 문틈 사이로 달려 들어왔다.
“누, 누구냐!”
하인이 놀라 물었다. 문지기는 얼른 검을 뽑았다.
로브를 쓴 남자는 검을 검집째 빼 들었다. 문지기들이 검을 휘둘렀다. 그는 공격을 가볍게 받아치곤 문지기의 명치와 목을 쳤다.
“억!”
“으윽…….”
“아가씨를 데려가!”
한 하인이 남자의 앞을 막아서며 외쳤다. 그러자 다른 하인이 엘리제를 억세게 끌어당겼다. 문고리를 잡고 있던 엘리제의 손이 미끄러졌다.
“읏…….”
그녀가 속절없이 끌려가려던 때였다. 남자가 하인의 팔목을 후려쳤다. 딱 하고 뼈가 나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으아악!”
하인이 엘리제를 놓자마자 남자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뛰십시오!”
남자가 외쳤다. 엘리제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 목소리는……!’
두 사람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