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75화
아우라는 황후의 방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미나가 달려와 그녀를 반겼다.
“황후 폐하!”
미나가 울음을 터트렸다. 시녀들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시녀장을 보았다. 그녀들은 모두 황후가 이궁에 다녀온 줄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우라는 시녀들에게 눈짓했다. 그녀들이 눈치껏 자리를 피했다. 시녀들이 나가자 미나가 얼굴을 감싸고 울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폐하.”
“울지 말고 차근차근히 말해 봐. 내가 없는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지?”
미나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제 동생이, 호세가 황제 폐하께 모든 걸 말했다고 했어요……. 편지의 내용도…… 지금까지 폐하께 전달한 모든 정보도…….”
그렇다면 루안을 만나기도 전에 카를은 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소리가 된다. 아우라가 핀의 정보를 안다는 것을.
어쨌거나 이젠 엎질러진 물이었다.
“괜찮아, 미나. 진정해.”
“하지만…….”
미나는 미안함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했다.
“죄송해요, 폐하. 제 동생을 부디 용서해 주세요.”
그녀는 아우라가 호세에게 벌을 내릴까 무서웠다. 또 벌을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호세는 황립 아카데미로 돌아가서 학업을 계속하라고 해. 앞으로 내 일에 손 떼라고 전하고.”
“……폐하. 요, 용서해 주시는 건가요?”
“그래. 그러니 걱정하지 마.”
“감사드려요. 감사드려요, 폐하…….”
미나와 호세를 탓할 마음은 애초에 없었다. 호세는 최선을 다했다. 모든 정보를 털어놓은 건…….
‘카를의 앞에서 그걸 숨기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긴 하지.’
“후우…… 일단 좀 쉬어야겠어.”
아우라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러다 그녀는 협탁의 꽃다발을 보고 멈칫했다.
“이건…….”
사냥제 전날 밤 카를이 가지고 왔던 푸른 꽃이었다. 어쩐 일인지 꽃은 거의 시들지 않았다.
아우라는 그 꽃잎을 손으로 툭툭 건드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분명 수트라까지 다녀왔는데, 마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 같아.’
이 꽃은 묘하게 카를과 닮은 듯했다. 그 집요함과 지치지 않는 집념이 특히 그랬다.
아우라는 그렇게 한참을 꽃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무심코 창밖을 내다볼 때였다.
저 멀리 조그맣게 북쪽 탑이 보였다.
참 묘한 일이었다. 저 탑을 바라보면 마음의 잡음이 사라졌다. 마치 탑이 어서 네 할 일을 하라고 속삭이기라도 하는 듯.
아우라는 꽃에서 손을 뗐다.
‘그래. 이젠 루안도 떠났어. 나머지 일은 나 혼자 알아서 해야 해.’
“미나.”
“네, 폐하.”
“테인 공작가의 엘리제 영애를 만나야겠어.”
“엘리제…… 영애를요?”
아우라의 눈이 반짝였다.
“그래. 아무도 모르게, 둘만.”
***
늦은 밤, 테인 공작가의 상황을 알아보던 미나가 돌아왔다. 와인을 마시고 있던 아우라가 미나를 맞았다.
“엘리제와 연락은 됐어?”
“그게…… 테인가는 수도에 없다고 합니다.”
“수도에 없다고?”
아우라가 와인 잔을 내려놓고 되물었다. 미나가 대답했다.
“네. 테인 공작이 애인과 함께 근교로 여행을 갔는데 엘리제 영애도 함께 데려간 것 같습니다.”
“하! 공작도 속이 좋군. 애인과의 여행이라.”
아우라는 그를 한껏 비웃었다.
‘엘리제는 일부러 끌고 간 거겠지. 제가 없는 동안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이렇게 보면 엘리제도 아직 멀었어.’
어쨌거나 지금으로선 그들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아우라는 답답함에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언제쯤 돌아온다고 하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늦어도 모레에는 도착한다고 합니다.”
“그래, 엘리제가 돌아오면……. 아니, 돌아오자마자 공작 몰래 접촉해서 내게 데려오도록 해. 무슨 말인지 알았지?”
“네, 폐하.”
미나가 꾸벅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아우라는 창문 밖의 밤하늘을 보며 생각했다.
‘카를도 분명 엘리제를 찾고 있을 거야. 내가 카를보다 먼저 만나야 해.’
엘리제를 만나기만 하면 아우라가 유리한 게임이었다. 어쨌건 핀을 받기로 한 쪽은 아우라였으니.
똑똑.
다시 노크 소리가 울렸다. 문이 열리고 미나가 들어섰다.
“폐하, 황제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모셔. 잔을 하나만 더 가져다주고.”
“네, 폐하.”
미나가 빈 와인 잔을 하나 더 두고 방을 나갔다. 이윽고 카를이 방으로 들어섰다. 아우라는 두 개의 잔에 와인을 채웠다.
“어서 와.”
아우라는 퍽 상냥하게 굴었다. 엘리제를 찾고 있다는 조급함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카를이 아우라의 옆에 앉았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듯 표정이 좋지 못했다.
“무슨 일 있어?”
“오늘 라이언에 대한 즉결 재판이 있었어. 죄목은 반역죄였고.”
“벌써?”
“미룰 이유 같은 건 없으니까.”
하기야 수트라의 군대가 황제군을 공격했다. 그건 명백한 반역이었다. 황족이 아니었다면 재판까지 갈 것도 없이 목이 떨어졌을 일이었다.
“그래서? 결과는?”
“교수형. 내일 오전에 집행될 거야.”
“그렇구나.”
결과는 예상했지만 아우라는 기분이 이상했다. 그렇게 유들유들하고 여유 넘치는 사람이 교수형을 당하다니. 어쩐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제니아인들 쪽에서 불만이 있을 수도 있어. 반발이 심하면 네가 설득을 해 줬으면 해.”
“그렇게 할게. 그나저나 이센의 어머니는?”
“돈을 좀 써서 실시아에서 치료받을 수 있게 하려고. 황궁으로 오라고 해 봤자 마음만 안 좋을 테고.”
“하긴. 아들을 잃은 후궁이 황궁에 있어 봤자…….”
씁쓸한 현실이었다. 아우라가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시고 그에게 물었다.
“일단 알았어. 혹시 할 말이 있어?”
“물어볼 게 있어서.”
“물어.”
아우라는 카를이 엘리제를 찾고 있느냐고 물을 줄 알았다. 그렇게 묻는다면 일단 아니라고 잡아뗄 작정이었다. 그가 믿을 린 없겠지만.
카를은 그녀를 향해 살짝 돌아앉았다. 소파 등받이에 팔꿈치를 받치곤 턱을 괸 채 잠시 아우라를 바라보았다.
‘……뭘 물으려고 저러는 거지?’
잠시 후 카를이 입을 열었다.
“수트라에서 내가 널 발견했을 때, 네가 라이언에게 위협을 당하고 있었잖아.”
말이 좋아 위협이었다. 아우라는 그 순간을 떠올리는 순간 굉장히 불쾌해졌다. 마치 뱀이 몸을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그랬지.”
“혹시 수트라에 있던 동안 그런 일이 더 있었어?”
침묵이 흘렀다.
‘그런 걸 왜 묻는 걸까.’
나쁜 일을 당한 부인을 버리는 남편은 많았다. 그게 보통 남자들의 정조 관념이었으니.
아우라는 떠보듯 되물었다.
“그랬다면?”
카를의 눈이 빛났다.
“교수형이 아니라 지금 가서 그 자식의 사지를 찢어 죽이려고.”
“그리고?”
“송장은 개에게 던져 줘야지.”
“그리고?”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줄게. 내 상상력은 여기까지라. 그러니 솔직하게만 말해.”
아우라는 라이언과 한 계약서를 떠올렸다. 그러나 그걸 입 밖으로 내려면 많은 걸 말해야 했다. 수트라에서 라이언과 대치한 상황이나 그의 위협들. 계약서를 썼음에도 일어난 상황들.
그 일들을 굳이 입 밖으로 내고 싶진 않았다. 적어도 지금은.
‘라이언은 내일 죽어. 그럼 다 없던 일이 되는 거야.’
아우라는 와인 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네가 본 게 다야. 그냥…… 그럴 뻔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카를은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상냥한 손길과는 다르게 그는 조금 짜증이 난 표정이었다.
“왜? 그 일이 신경 쓰여?”
“어.”
“정말 아무 일도-”
“네 해명을 듣자는 게 아니라.”
“……그럼?”
“그냥 내가 후회돼서 그래.”
아우라의 귓가를 맴돌던 카를의 손이 그녀의 귓바퀴를 만졌다.
“내가 조금 더 빨리 갔어야 했어.”
아우라는 귀가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그녀는 민망한 마음에 카를에게 와인 잔을 쥐여 주었다.
“와인, 안 마셔?”
“안 마셔.”
탁.
카를이 테이블에 다시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우라의 얼굴을 감싸더니 입을 맞췄다. 그는 그녀의 아랫입술을 머금으며 부드럽게 간지럽혔다.
아우라는 그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받아 줘야 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받아 주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그녀는 그를 밀어낼 수도, 잡아당길 수도 있었다.
카를이 망설이는 그 손에 깍지를 꼈다. 아우라는 결국 눈을 감고 카를에게 길을 내어 주었다. 그녀의 입안으로 들어온 혀가 안을 유영했다. 카를이 입술을 떼고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입에서 와인 향기 나.”
“그거야 와인을 마셨으니까.”
“이러다가 내가 먼저 취할 것 같은데.”
“설마.”
“정말이야. 봐.”
그는 다시 입을 맞춰 오기 시작했다. 그의 혀가 좀 더 깊숙하게 입안을 파고들어 아우라의 혀를 괴롭혔다. 아우라는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가 결국 그의 혀와 얽혔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카를의 입술은 신기하게도 와인 없이도 달콤했다.
그러다 번뜩 이런 생각이 끼어들었다.
‘카를도 엘리제를 찾고 있겠지. 나보다 먼저 엘리제를 만나려 할 거야.’
그런 그와 이렇게 입을 맞추는 건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기에 묘하게 흥분이 되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카를이 아우라를 안아 들고 침대로 갔다. 그는 아우라의 드레스에 달린 단추를 하나씩 풀며 그녀를 관찰하듯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차분하고 천연덕스러운 데가 있었다. 마치 자신은 아무 꿍꿍이가 없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카를이 피식 웃었다.
‘시침을 떼다니. 분명 엘리제를 찾고 있을 거면서.’
카를이 이번에는 제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툭 하고 그의 셔츠가 침대 밑으로 떨어졌다. 그는 아우라를 밀어 눕히고 또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왜…… 그래?”
“미워서.”
“뭐가?”
“그새 또 도망갈 생각밖에 안 하는 게.”
그녀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가 입을 맞췄다. 드레스 안으로 들어온 손이 가슴을 쥐었다. 밉다는 말이 없는 소리는 아닌 듯했다. 평소보다 손길이 짓궂었다. 그는 그녀의 드레스를 천천히 벗겨 냈다.
그때, 아우라가 그의 목을 잡아당겼다. 가까이 마주친 눈이 똑바로 카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미워해.”
아우라가 카를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걸 알면서도 날 다시 데려온 건 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