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74화
아침 해가 막 떠오를 무렵, 카를과 아우라는 황궁 근처에 도착했다.
아우라는 내심 신경이 쓰였다. 사냥제에서 도망친 황후를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겉으로 티는 안 내도 속으론 손가락질할 게 뻔했다.
아우라가 멍하니 황궁을 올려다볼 때였다. 갑자기 카를이 말을 옆길로 몰았다.
“어딜 가는 거야?”
아우라가 물었다.
“이궁.”
“이궁에는 왜?”
“공식적으로 너는 이궁에 요양 간 걸로 되어 있으니까. 오늘 저녁에 나랑 같이 본궁으로 환궁하면 돼.”
아우라는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 와중에 그런 수까지 써 놓은 카를이 대단했다.
하지만 그 덕에 아우라는 걱정 하나를 덜었다. 이대로 환궁을 해도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두 사람은 이궁 앞에 도착했다.
이궁은 아늑한 시골의 전원을 흉내 낸 별장이었다. 입구엔 커다란 연못이 있었고, 나무다리를 지나야만 정원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정원 가운데에 있는 건물은 소박한 단층이었다.
이궁에 들어가자마자 아우라는 목욕부터 했다. 추운 수트라에서 지낸 여파였을까, 더운물에 몸이 녹는 듯했다. 자연스레 잠이 쏟아졌다.
아우라는 비몽사몽 한 상태로 욕실에서 나왔다. 카를 역시 목욕을 마치고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침대는 하나뿐이었다.
“나는 좀 자야겠어, 카를. 졸려서 죽을 것 같아.”
그러니 좀 나와 달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카를이 손을 뻗어 아우라를 끌어당겼다.
“죽는다는 소리 하지 말라니까.”
카를은 아우라를 끌어안고 침대에 누웠다. 아우라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와 자신의 몸에서 같은 향유 냄새가 났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 향을 맡으니 뿌리칠 힘도 사라졌다.
‘그래도…… 수트라에서 본 걸 말해 줘야겠지.’
아우라는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라이언에겐…… 군사가 많아. 황실을 위협할 만큼.”
“알고 있어.”
“라이언을 따르는 실력 좋은 마법사가 있어. 이름은 신디온이야.”
“마법사라……. 알았어.”
“그리고…… 수트라에서 이센의 어머니를 만났어.”
“리안을?”
“응……. 병에 걸려서 실시아의 마법이 필요하대. 수트라가 아니면 치료를 받기가 어려운가 봐.”
“……그렇군.”
“이센은 어머니 때문에 배후를 밝히지 못했던 것 같아. 라이언이 어머니에게 해를 끼칠까 봐 무서워서.”
“이센이 죽은 걸 리안이 알아?”
“……내가 알려 줬어.”
카를이 그녀의 머리칼을 넘겨 주었다. 하얗게 드러난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다정한 입맞춤에도 아우라는 반응이 없었다. 그녀는 그만큼 피곤과 잠에 취해 있었다.
“네가 굳이 그런 거북한 일을 왜.”
“누군가는 해야 할 것 같아서. 또…… 제대로 말해 줘야 상처를 덜 받을 테니까…….”
아우라의 말이 녹아내리듯 느릿해졌다. 이미 반 정도는 잠이 든 것 같았다. 카를은 더 말을 붙이지 않고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우라의 손이 카를의 뺨을 더듬었다. 잠에 취한 그녀가 중얼거렸다.
“이센은…… 그러니까 너도 그만…….”
이윽고 아우라는 잠들어 버렸다. 카를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너도 그만 이센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
“……알았어.”
카를이 대답했지만 아우라는 더는 말이 없었다.
카를은 이센의 일을 다 털어 냈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아우라의 말을 들어서일까. 마음 한구석이 조금 가벼워진 것도 같았다.
그는 아우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착해 빠진 주제에 사람을 버리고 떠나다니.’
카를은 아우라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못된 짓인 걸 알지만 그는 잠시 그렇게 멋대로 굴었다.
이건 그녀가 한 짓에 비하면 복수라고 할 것도 없었다. 고작 이런 걸로 화가 풀리려 하는 카를 자신이 황당할 정도니.
그는 그녀를 더 꽉 껴안고 눈을 감았다.
***
잠시 후.
‘목말라…….’
아우라가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제 허리에 감긴 카를의 팔을 조심히 걷어 냈다. 그는 세상모르고 잠이 들어 있었다. 자기 전에 수트라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잘은 기억나지 않았다.
협탁 유리 주전자에 물이 가득했다. 아우라는 물을 한 잔 따라서 마셨다. 식도를 적시니 정신이 살아나는 듯했다.
‘돌아왔구나. 황궁에.’
되돌아왔다 뿐이지 손해 본 건 없었다. 두 번째 핀의 조각도 얻었고, 봉인을 푸는 법도 알아냈으니.
문제는…… 옆에 누운 남자였다.
어린 시절 그녀가 한눈에 반했던 아름다운 흑발의 소년. 그 소년이 자라나 한 침대에 함께 누워 있었다. 그녀가 몇 번이나 도망쳐도 결국 그의 옆자리였다.
아우라는 웅크리고 앉았다. 그리고 복잡한 생각을 미뤄 두고는 한참 그를 바라만 보았다.
창문으로 쏟아지는 아침의 햇빛, 강이 흐르는 소리, 잠든 카를, 이궁의 따뜻함과 평화.
아우라가 조심스레 카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웠다. 온순한 짐승의 털처럼.
그녀는 살며시 그의 품 안으로 몸을 뉘었다.
쿵, 쿵, 쿵, 쿵…….
다시는 듣지 못할 줄 알았던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슬쩍 그의 품을 더 파고들었다.
아우라는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소리가 반가울 리 없을 테니까.
***
이른 오후에 황제 부부는 본궁으로 돌아왔다. 모든 일이 자연스럽게 처리되었다. 황후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으며 황제는 그간 쌓인 일을 처리했다.
먼저, 반역자부터.
카를은 지하 감옥으로 갔다. 그곳에는 라이언이 얌전히 갇혀 있었다.
“문을 열어.”
카를의 말에 간수들이 감옥 문을 열었다. 그는 그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라이언의 멱살을 잡고 일으켰다.
어쨌거나 명목은 심문이었다. 그러나 카를은 그런 걸 할 마음 따윈 없었다.
퍽!
카를이 있는 힘껏 라이언의 얼굴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폐하!”
“폐하! 안 됩니다!”
조쉬와 테오가 카를을 뜯어말렸다. 카를의 주먹이 기계처럼 라이언의 얼굴에 연신 꽂혔다. 끔찍한 소리와 함께 그 하얀 얼굴이 점점 피로 물들어 갔다.
카를은 라이언의 멱살을 잡은 채 벽에 밀어붙였다.
“네가 황후에게 한 짓을 기억하나?”
라이언은 고통에 얼굴을 찡그렸다. 그래도 입가의 웃음은 여전했다.
“왜 제가 억지로 한 짓이라 생각하십니까? 조카님.”
“…….”
“저와 황후 폐하가 그 순간에만 한 침대를 썼을까요? 황후 폐하께서는 이틀이나 수트라에 계셨는데요.”
그 말에 카를의 눈이 번뜩였다.
퍽!
그의 주먹이 이번에는 라이언의 명치에 꽂혔다. 라이언은 신음조차 제대로 내뱉지 못하고 입만 쩍 벌렸다.
“……어억…….”
라이언이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더할 나위 없이 창백해진 얼굴로 배를 감쌌다.
카를이 검을 빼 들었다.
“폐하! 절대 안 됩니다. 참으십시오!”
조쉬가 카를의 팔을 잡고 늘어졌다. 그 모습에 라이언이 킥킥댔다.
“놔.”
카를이 조쉬에게 매섭게 말했다. 까딱하면 조쉬에게도 검을 휘두를 기세였다.
보다 못한 테오가 나섰다.
“폐하,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안 됩니다.”
“이런 식?”
되묻는 말투가 서늘했다. 그러나 테오는 카를을 위해 다시금 용기를 냈다.
“공식적인 절차 없이 황족을 처형하면 그 수습이 어렵습니다. 또 대공은 북부 지방에서 국민의 신임을 얻은 자입니다.”
“아- 그래. 욕하라지.”
카를은 그런 것 따윈 무섭지 않았다. 국민의 신임이야 있다가도 사라지고 없다가도 생기는 법이었다.
카를이 검을 다시금 꽉 쥐었을 때였다. 테오가 얼른 덧붙였다.
“더불어 안센나의 제니아인들과도 문제가 생길 겁니다.”
“…….”
“대공은 오랜 구호로 제니아인들 사이에서 인지도가 높습니다. 이대로 처형하시면 그들 또한 황실에 불만을 가질 겁니다. 적어도 공식적인 판결과 절차는 갖추셔야 합니다, 폐하.”
제니아인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도 이렇다 할 정치적 영향력이 없는 소수. 하지만 그들이 아우라의 국민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달랐다.
카를은 결국 검을 내렸다. 두 측근은 그제야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카를은 분노가 한풀 꺾인 표정으로 조쉬에게 물었다.
“조쉬, 수트라 군사에 대한 조사는 끝났나?”
“네. 반역의 증거로 충분합니다.”
“테오, 오늘 안으로 라이언을 재판에 넘겨.”
“네, 폐하.”
카를이 마지막으로 라이언을 쏘아보고는 감옥을 나섰다. 두 측근 역시 얼른 그를 따랐다.
그들의 뒷모습이 사라질 무렵, 라이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쿨럭!”
그의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피뿐만이 아니었다. 하얀 돌 같은 것도 하나 굴러 나왔다. 그건 라이언의 어금니였다.
“하하…….”
라이언이 대뜸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대어 앉았다.
“충견이 제 주인의 앞길을 막는군.”
그는 생각했다. 카를은 자신을 죽이고 이 감옥에서 나갔어야 했다고.
***
그 시각.
카를과 두 측근은 지하 감옥을 나왔다. 어두운 감옥 안과는 달리 밖은 화창했다.
카를은 생각 같아선 라이언의 몸을 갈가리 찢어 개에게나 주고 싶었다. 그는 어렵게 화증을 삼키고 테오에게 물었다.
“테오, 그간 별일 없었나?”
“있었습니다. 안 그래도 보고를 드리려 했습니다.”
“무슨 일이지?”
“테인가 집사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어디에 있다던가?”
“그게…… 외진 바닷가의 여관에 며칠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 그 동네에 머물러 있거나 혹은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갔을 수도 있습니다. 워낙 신상 모를 이들이 모인 동네라 시간이 좀 걸릴 듯합니다.”
‘그 말은 찾는 건 시간문제란 뜻이군.’
또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우라를 다시 데려왔다는 안도감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잊어선 안 됐다. 상대는 어디까지나 아우라였다.
‘아우라는 슬슬 엘리제에게 접근할 거야. 엘리제 역시 유언장에 가까워질수록 핀을 아우라에게 줄 준비를 하겠지.’
막아야 했다. 무슨 짓을 해서건.
“조쉬.”
“네.”
“엘리제를 만나야겠어. 준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