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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72)화 (72/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72화

라이언은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들어왔다.

“여기까진 무슨 일입니까, 대공.”

“아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충분히 기다린 것 같아 와 봤을 뿐입니다.”

그는 아우라의 차림을 흘긋 보았다.

“뭐…… 보아하니 대답은 나온 듯싶군요.”

라이언이 천천히 아우라에게 다가왔다.

“아주 실망스러운 대답이지만 말입니다. 뭐, 괜찮아요. 대답이야 바꾸면 되니까요.”

아우라가 재빨리 석궁을 들어 라이언을 겨냥했다.

“다가오지 마.”

“석궁이라. 귀엽군요. 저는 활을 더 좋아하긴 합니다만.”

“…….”

“이센도 제 실력으로 보내 줬죠.”

아우라는 그의 말을 이해하는 순간, 적잖이 놀랐다.

‘이센을 죽인 건 라이언이었어…….’

그럼 아우라도 쉽게 죽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철컥.

아우라가 레버를 장전했다.

“한 걸음만 더 오면 쏘겠다.”

“보기보다 터프한 데가 있으셨군요.”

“물러나.”

“더 마음에 듭니다.”

“물러나라고 했다.”

“두려움을 모르시는 분이군요.”

“더한 것도 충분히 겪어서.”

“쏘십시오, 그럼.”

라이언은 아우라를 조롱하듯 팔을 벌렸다. 아우라가 라이언의 옆구리를 겨냥하고 화살을 쐈다.

슉!

그는 화살을 간단히 피했다. 아우라가 다시 레버를 장전했다. 그러나 눈 깜짝할 사이에 라이언이 다가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여기까지만 하시죠. 다치시기 전에.”

아우라는 그를 빤히 보았다.

“이제야 겁을 좀 먹으시는군요.”

“넌 이제야 본모습을 보이는군.”

“당돌한 건 여전하고.”

라이언이 은근슬쩍 말을 놨다. 이 상황의 주도권을 가졌다고 확신한 듯했다. 그는 품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냈다.

“계약서입니다. 뭐, 대충 카를이 죽으면 제게 오겠다는 내용이죠. 서명만 하시면 됩니다.”

“이런 계약서가 의미가 있긴 한가?”

“나중에 제가 황위에 올랐을 때 조카의 부인을 권력으로 빼앗았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아서요.”

당당하게 반역을 예고하는 말에 아우라는 기가 막힌다는 듯 비웃었다. 라이언이 어깨를 으쓱했다.

“저는 정당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서명하지 않겠다면?”

“글쎄요. 일단 핀을 빼앗아 감옥에 처넣고 엘리제 영애를 겁박해서 나머지 핀을 얻어 낼까요? 그럼 봉인은 영원히 못 푸시겠죠.”

‘엘리제를 건드리겠다고…….’

“내가 서명하면? 엘리제에게 마지막 핀을 얻을 수 있도록 날 풀어 줄 수 있나?”

“……좋습니다.”

“펜을 줘, 그럼.”

“담백하시군요. 좀 더 저항하실 줄 알았는데. 일단 이것 먼저.”

라이언은 아우라의 석궁을 빼앗아 가볍게 반 토막 냈다.

콰직.

아우라의 유일한 무기가 그렇게 부서졌다.

라이언은 책상의 펜을 손수 가져다주었다. 아우라는 그 펜으로 계약서에 서명을 휘갈겼다.

“자, 이제 날 놔줘. 내 기사 역시 제자리에 돌려놓고.”

그녀는 계약서를 내밀었다. 라이언은 서명의 잉크가 말라 가는 것을 뿌듯하게 보았다. 그는 계약서를 두 번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기쁘군요. 저와 결혼해 준다고 하시니.”

“조건을 잊으면 안 되지. 카를이 죽으면…….”

라이언이 그녀에게 한 걸음씩 다가왔다. 위화감을 느낀 아우라가 조금씩 물러났다.

“!”

순식간에 라이언이 아우라를 침대로 밀어 눕혔다. 양 팔목을 잡힌 아우라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라이언을 쏘아보았다.

“무슨 짓이야?”

“너무 기뻐서요. 이왕 일이 이렇게 된 김에…….”

그의 눈꼬리가 유려하게 휘었다.

“오늘을 첫날밤으로 할까 합니다.”

“……!”

“내가 좀 고귀한 걸 좋아하거든.”

라이언의 손이 아우라의 허리를 타고 올라왔다. 마치 뱀이 몸을 감는 것 같아 아우라는 소름이 끼쳤다.

싫었다. 너무 싫어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발악하면 그를 더 자극하게 될 게 뻔했다. 혹은 더 좋아하게 만들거나.

그녀는 필사적으로 떨림을 삼키고 한 마디 내뱉었다.

“……놔.”

“왜? 너도 서명한 걸 보니 아주 싫은 건 아닐 텐데.”

아우라가 그를 피식 비웃었다.

“저 웃기지도 않은 계약서?”

“우스웠다니. 서운하군.”

“우습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인데.”

“어째서?”

훅 가까이 다가온 푸른 눈에 아우라의 얼굴이 비쳤다. 아우라는 그 눈에 대고 똑바로 말했다.

“카를이 너 같은 놈에게 죽을 리가.”

순간 라이언이 아우라의 손목을 더 꽉 잡았다. 아우라가 인상을 찌푸리며 신음을 삼켰다.

“재미있긴 한데, 너무 그렇게 함부로 말하진 마.”

그의 입술이 아우라에게 닿을 듯했다. 아우라가 고개를 돌렸다. 라이언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난 미움받는 거 되게 싫어하거든.”

그는 아우라의 셔츠 단추를 하나 풀었다. 하얀 목덜미가 드러나자 그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아우라의 등줄기에 땀이 흘러내렸다.

‘시간을……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 해. 루안이 올 때까지만이라도.’

“그래서, 그 방법이라는 게 뭔데?”

“방법?”

“내가 죽지 않아도 핀의 봉인을 풀 방법.”

“아하. 그게 이제야 궁금해졌어?”

라이언이 단추를 또 하나 풀었다. 아우라는 비명이 튀어나오는 걸 꾹 참았다.

“그래, 궁금해.”

“고귀하신 황후 폐하께서 원하시니 말씀해 드리죠.”

그는 아우라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넘겨 주었다.

“황궁에 트루 블러드는 또 있잖아.”

“설마…… 리엘? 12년을 기다리겠다고?”

“황후 폐하, 여기는 수트라입니다. 요 앞 국경만 건너면 온갖 괴이한 마법들이 판을 치고요.”

아우라의 눈이 커졌다.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짐작이 갔다.

“설마……!”

“생물을 나이 먹게 하는 마법 정도는 확보해 놓지 않았겠습니까? 아직은 짐승들에게나 쓰고 있고 높은 확률로 불구가 되지만…… 어차피 죽을 거니까 상관없잖아요.”

“어떻게 그런 짓을!”

아우라는 더는 견딜 수 없어 소리를 질렀다. 그 발상을 듣는 것만으로도 속이 역겨울 지경이었다.

“이거 놔! 당장!”

“쉿. 얌전히 있는 게 네게도 좋을 거야.”

그가 아우라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려던 순간이었다. 아우라가 눈을 꽉 감았다.

벌컥!

문이 다급하게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황급히 달려오는 발소리, 놀란 라이언의 욕설, 사람을 연신 때리는 둔탁한 소리, 누군가 바닥에 고꾸라지는 소리. 그런 것들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아우라는 그제야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익숙한 뒷모습의 남자가 라이언의 멱살을 잡고 서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라이언은 축 늘어진 채였다.

“……카를?”

아우라가 중얼거렸다. 카를이 그제야 쓱 뒤를 돌았다. 그는 라이언을 바닥에 내버리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의 눈은 분노로 들끓고 있었다.

안도감도 잠시, 아우라는 각오했다. 실망, 증오, 비난. 그 어떤 것이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카를의 시선이 그녀의 흐트러진 옷매무새에 닿았다. 떨고 있는 손끝과 창백한 안색도 한 번씩 보았다. 서서히 그의 얼굴에서 분노가 사라지고 걱정이 어렸다.

“괜찮아?”

카를이 물었다.

그 순간이었다. 아우라의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

차라리 카를은 아우라를 비난했어야 했다. 어떻게 두 번이나 그런 식으로 도망칠 수 있는 거냐고 따져 물었어야 했다. 탑에서 나왔을 때조차 건네지 않았던 말. 지어 주지 않았던 표정. 그런 걸 인제 와서 건네다니.

아우라의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아우라.”

카를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아우라는 그에게 안기는 대신 그의 옷깃을 꽉 붙잡고 고개를 숙였다.

‘……괜찮냐고?’

괜찮지 않았다. 카를을 그런 식으로 버리고 온 일도. 라이언에게 나쁜 짓을 당할 뻔한 것도. 봉인을 풀기 위해선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것도.

사실은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그러나 괜찮지 않다는 말은 끝까지 삼켰다. 여기서 마음을 드러내 버리면 모든 게 무너질 것 같았다. 이대로 이 품을 파고들어 버리면 헤어 나올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돌아가자.”

카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우라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순 없었다. 어떻게 돌아갈 수 있겠는가. 그런 식으로 카를을 버리고 왔는데.

아우라는 두려웠다. 그의 곁에선 이렇게 자꾸만 휘청이고 약해지고…… 결국 상처만 줄 거였다. 훈트 산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우라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제발 날 놔 달라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망토를 벗어 아우라의 몸에 둘러 주었다. 익숙한 체취와 체온. 그런 것들이 아우라를 훅 둘러쌌다.

“돌아가자, 아우라.”

카를이 아우라를 안아 들었다.

***

수트라 성 앞에 황제군이 모여 있었다.

아까 황제가 수트라군의 우두머리를 쳤다. 그 후 수트라군은 우왕좌왕하더니 국경 쪽으로 달아났다. 국경 너머는 실시아 땅인지라 더는 따라붙을 수 없었다.

황제군의 옆에는 라이언을 태운 마차가 있었다. 그는 카를에게 심하게 맞아 의식을 잃었지만 도착할 무렵엔 깨어날 것이다. 혹시 모르니 모든 문에 못질을 해 놓긴 했지만.

이윽고 수트라 성에서 카를이 나왔다. 그는 제 망토로 온몸을 두른 아우라를 안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조쉬가 안도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카를은 그녀를 제 말에 앉혔다. 얼굴을 가린 망토 사이로 눈물 자국이 선연했다. 저항을 하는 것도 무의미하겠지만 이미 그럴 힘을 잃은 듯했다.

“잠깐만 기다려.”

카를이 그녀에게 말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황제군과 조금 떨어진 곳. 그곳에 루안이 서 있었다. 카를은 그에게 걸어갔다.

언제부터 내리기 시작한 건지 두 사람 사이에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나?”

카를이 물었다. 루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꼭 드려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두 사람은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소리는 수트라의 거센 바람에 흩어져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다만 그들의 입김만이 간간이 하늘로 퍼질 뿐이었다.

이야기 끝에 루안이 꾸벅 인사를 했다. 그리고 말 등에 앉아 있는 아우라를 한번 물끄러미 보고는 그곳을 떠났다.

카를이 돌아와 말에 올라탔다. 그는 뒤에서 한 손으로 아우라를 안았다. 아우라는 망토 자락을 꽉 쥐었다.

카를이 모두에게 외쳤다.

“황궁으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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