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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71)화 (71/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71화

카를이 이끄는 황제군은 마물 지대에서 머물고 있었다.

마물이 찢기고 잘리는 소리. 떨어져 나간 마물의 몸뚱이가 바닥에 갈리는 소리. 그런 몸뚱이를 말발굽으로 짓밟는 소리.

그런 아비규환 속에서도 그들은 조금씩 나아갔다.

“수트라 성까진 얼마나 남았지?”

카를이 조쉬에게 물었다.

“곧입니다!”

“일단 진군한다! 따라오는 마물은 후방에서 처리한다.”

“네!”

카를이 말고삐를 당겼다. 그는 마물들 사이를 재빠르게 빠져나갔다.

저 멀리 수트라 성이 언뜻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그 앞을 개미 떼 같은 군단이 막고 있었다.

“……저자들은!”

조쉬가 놀라 외쳤다.

“폐하, 수트라의 군대 같습니다. 대화를 시도할까요?”

“기다려.”

황제군은 황실의 깃발을 들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말에서 내리거나 예를 표하지 않았다.

“뭔가 이상합니다.”

조쉬의 말에 카를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들에게 전해. 화살이 날아올지도 모르니 조심하라고.”

“네.”

“만약 화살이 날아오면 막자마자 반격한다. 재장전을 할 시간을 주지 마라.”

“네, 알겠습니다.”

조쉬가 바쁘게 다니며 명령을 전했다. 카를은 수트라군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저들은 내가 누군지 알고 있다. 그런데도 저대로 있겠다는 건…… 라이언이 작정을 한 거야.’

카를이 검을 꽉 쥐었다. 

그때였다.

슈슈슉!

화살이 비처럼 날아들었다. 기사들이 순식간에 방패로 머리 위를 막았다. 말 몇 마리만이 고꾸라져 넘어졌다.

카를이 큰 소리로 외쳤다.

“공격하라!”

기사들이 맹렬하게 그들에게 달려갔다. 선두에 선 카를이 수트라군 한가운데를 파고들었다.

그는 이제 마물이 아니라 인간의 몸을 자르고 찔렀다. 그의 검은 자비도 망설임도 없었다. 마치 데블라로 돌아온 것처럼.

실력이야 황제군이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숫자였다.

황제군은 대군이 아니었다. 황명을 받잡아 임무를 수행하는 소수 정예 군단에 가까웠다. 그에 비해 수트라군은 그 수가 너무 많았다.

‘수의 열세는 체력의 문제로 이어지지.’

카를은 아군을 살폈다. 기사들은 여전히 강했지만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이미 이곳까지 한시도 쉬지 않고 달린 탓이 컸다.

‘그럼 답은 하나뿐이야. 우두머리를 치는 것.’

그는 이번엔 적군을 둘러보았다. 카를과 마찬가지로 전쟁터를 관망하는 이가 있었다. 그는 카를과 눈이 마주친 순간 비장하게 검을 뽑았다.

카를이 검을 다시 그러쥐고 말을 몰았다. 그 역시 카를을 향해 달려왔다.

챙!

검과 검이 맞부딪쳤다. 카를이 반갑다는 듯 말했다.

“네가 우두머리구나.”

“영광입니다, 황제 폐하.”

넉살이 좋은 자였다. 오직 싸움이 목적이었으면 카를도 꽤 즐거웠을 거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나를 알면서 칼을 겨눴으니 너는 지금부터 반역자다.”

챙!

두 사람의 검이 또 한 번 맞붙었다. 이제 승패는 힘에 달려 있었다. 카를의 팔에 힘줄이 돋았다. 서서히 검이 상대방 쪽으로 밀렸다.

“물론 네 주인인 라이언도.”

카를이 힘껏 검을 밀어붙였다. 상대의 검이 삐끗하더니 자신의 목을 그어 버렸다. 그는 그대로 말에서 떨어지더니 숨을 거뒀다.

우두머리를 잃은 군대가 순간 우왕좌왕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황제군이 더 강하게 밀어붙였다.

카를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수트라 성이 더 가까워져 있었다.

‘……아우라.’

저곳에 아우라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라이언이 이렇게까지 카를을 막을 리 없었다.

그는 성문을 향해 말을 달렸다.

***

루안은 문틈으로 밖의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병사들의 경계 태세가 점점 무너지는 게 눈에 보였다. 멀거니 방문을 지키는 게 지루한 듯했다.

밖에 있는 세 명의 경비병 정도는 쉽게 해치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웬만해서는 이 성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어쨌거나 지금 자신은 아우라의 사람이었으므로.

하지만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아우라는 어딜 갔는지 돌아오지 않고 있어. 조금 있으면 경비병들이 교체될 테고. 그 전에 저들을 상대하는 게 나아.’

루안은 검을 검집째로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등 뒤로 숨긴 채 천천히 문을 열었다.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에 경비병이 문 앞으로 왔다.

“……기사님?”

그때 문 뒤에서 검집이 튀어나와 그의 명치를 억세게 찍었다.

“억……!”

그는 그대로 고꾸라졌다. 뒤늦게 경비병 둘이 달려왔다. 그러나 그들은 루안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루안은 그들을 순식간에 쓰러뜨리고 어두운 복도를 달려갔다.

‘마구간으로 가야 해.’

잠시 후 마구간에 도착한 루안이 서둘러 말을 찾았다. 말은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묶여 있었다.

루안은 아우라의 말안장에서 서류를 빼냈다. 그 안에선 귀퉁이가 그을린 편지들이 나왔다. 루안은 그 내용을 서둘러 읽었다.

「경애하는 황태자 전하. 전하께서 보내신 편지는 잘 읽었습니다. 저를 믿어 주시고, 실시아의 마법을 존중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핀을 나눠 가질 사람으로 라이언 대공과 테인 공작가의 웨일 테인은 믿을 만한 분이겠지요? 그럼 두 분께도 제가 따로 편지하겠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 언제나 경계를 늦추지 마셔야 합니다.」

「그나저나 명석하십니다! 트루 블러드의 목숨이라니요. 그 조건이면 제니아인들은 절대 봉인을 해제할 수 없을 겁니다. 핀의 봉인을 풀기 위해선 정말 많은 피가 필요합니다. 어린아이의 피만으로는 봉인이 풀리지 않으니 따님이신 리엘 전하를 걱정하시진 않으셔도 됩니다.」

“……내가 지금 뭘 본…….”

루안이 더듬거렸다.

아무리 다시 읽어도 그 내용은 똑같았다.

‘봉인을 풀려면 아우라가 죽어야 한다고?’

루안은 문득 떠올렸다. 아우라가 편지를 봤을 때 지었던 그 체념 섞인 미소를.

“……이런.”

그는 어지러운 나머지 말 등에 몸을 기댔다.

‘나는 아우라가 죽는 것을 돕고 있었던 거야.’

이럴 줄 알았다면 황궁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마력을 잃어도 잃은 대로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루안은 황제를 떠올렸다. 아우라가 핀을 찾는 걸 탐탁지 않아 하던 황제. 욕망과 불안이 뒤섞여 있던 그의 시선. 이제야 그 모든 것들이 이해됐다.

‘그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구나.’

루안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당장 아우라를 찾아서 이곳을 나갈 작정이었다. 어떻게든 그녀를 설득해서 핀을 포기하게 할 작정이었다.

설득이 안 되면, 핀을 빼앗을 수밖에 없었다. 

‘죽도록 날 미워하겠지만, 아우라가 죽는 것보단 나아.’

그렇게 루안이 마구간을 나서려던 순간이었다. 한 부대의 병사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

“기사님, 외부인은 혼자 돌아다녀선 안 된다고 말씀을 드린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어젯밤 그의 방 앞을 지킨 장정이었다. 부대를 통솔하는 걸 보니 직급이 꽤 높은 듯했다.

루안이 검집에서 검을 빼 들었다.

“황후 폐하는 어디에 계시지?”

“아하. 황후 폐하께서는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황후 폐하께 가겠다. 막으면 베겠다.”

“음…… 그건 곤란합니다.”

그가 비죽 웃었다.

“대공께서 황후 폐하께 볼일이 있으셔서 말입니다. 지금쯤이면 출발하셨겠군요.”

병사들이 한 걸음씩 마구간으로 들어왔다. 루안은 그들을 경계하며 천천히 물러났다.

“대공께서 특별히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황후 폐하와의 대화가 끝날 때까지 기사님과 말동무나 하라고 말입니다.”

루안이 이를 아득 물었다. 대공의 술수가 무엇이건 당장 아우라에게 가야 했다.

‘수는 많아도 길이 좁아서 한꺼번에 덤비진 못한다. 하나씩 처리하는 거야.’

선공을 기다려 줄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루안은 검을 꽉 부여잡고 달려 나갔다.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다. 루안은 군사들을 정신없이 베었다. 그러나 베어도 베어도 새 병사들이 끝도 없이 들이닥쳤다.

‘제길. 대체 병사 수가 얼마나 많은 거지?’

얼마나 그렇게 싸웠을까. 루안의 검과 팔이 피로 젖기 시작했다. 적의 피에 검 손잡이가 미끈거릴 지경이었다.

‘젠장…… 마법만 쓸 수 있었어도!’

루안이 거친 숨을 몰아쉴 때였다. 병사들 사이에 숨어 있던 대장 격인 자가 씩 웃으며 나왔다. 그는 지금껏 루안이 지치길 기다린 것 같았다.

깡!

“하아…….”

루안이 깊게 심호흡을 했다. 검을 다시 부여잡고 자세를 취했다.

“죽어라아아아!”

상대가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루안이 있는 힘껏 그의 공격을 막았다.

깡!

‘이런……!’

거짓말처럼 루안의 검이 부러졌다. 상대의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검을 높게 쳐들었다.

그때였다. 상대가 움찔하더니 눈을 하얗게 까뒤집고 쓰러졌다.

루안은 눈앞에 선 이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황제 폐하…….”

카를이 루안에게 물었다.

“아우라는 어디 있지?”

***

아우라는 승마복을 입고 짐을 챙기고 있었다. 짐이라고 해 봤자 핀과 약간의 돈 그리고 석궁이 전부였다.

그녀는 리안과의 필담을 떠올렸다.

“수트라 성 북서쪽 숲으로 가면 작은 샛길이 하나 있습니다. 성으로 식료품이 들어올 때 사용하는 것이죠. 해가 완전히 지면 문을 닫으니 어서 가세요.”

리안은 이센의 죽음에 대해 더 묻지 않았다. 그가 대공에게 이용당하고 죽었다는 걸 눈치챈 듯했다.

아우라는 리안에게 이렇게 물었다.

“같이 가시겠어요?”

리안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병에 걸렸다는 말은 사실입니다. 실시아의 마법으로 겨우 목숨을 연명하고 있죠. 여기 있으나 나가나 죽은 목숨인 건 마찬가지입니다. 짐이 되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재빠르게 덧붙였다.

“라이언이 데리고 다니는 신디온이라는 마법사가 있습니다. 위험한 자이니 조심하세요, 폐하.”

‘신디온…….’

아우라는 자신의 발목을 고쳐 주던 신디온의 눈웃음이 떠올랐다. 순간 등허리에 소름이 쫙 끼쳤다.

‘어서 루안에게로 가서 몰래 여길 떠나자. 시간이 없어.’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아우라는 불길함을 직감하고 석궁을 손에 쥐었다.

끼이이-

문이 열렸다. 아우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황후 폐하, 어딜 가십니까?”

“……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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