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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70)화 (70/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70화

수트라 성에서의 두 번째 날이 밝았다.

아우라는 창밖으로 수트라의 풍경을 보았다. 눈이 가득 쌓인 세상이 놀랍도록 눈부셨다. 어젯밤의 우중충한 분위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진 듯했다.

아침 식사는 간단한 빵과 커피 그리고 감자 샐러드였다. 염장한 베이컨도 있었다. 식사를 가져온 시녀가 독이 없음을 확인해 보이듯 맛을 봤다. 그쯤 되니 아우라도 더 굶을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식사를 하며 어젯밤 라이언과의 대화를 되새김질했다.

“만약 제가 황후 폐하의 희생 없이 핀의 봉인을 푸는 방법을 알려 드린다면…….”

“!”

“하루만 더 이곳에 계셔 주시겠습니까?”

“그런 건 불가능할 텐데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조건에 들어맞는 이는 저뿐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말장난 같은 겁니다.”

“전 말장난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대공.”

“들어 보시면 좋아하실 겁니다. 부디 하루만 더 시간을 내어 주시죠.”

아무리 라이언의 말이라 해도 혹하지 않을 리 없었다. 죽어야 한다면 죽겠지만, 그게 죽고 싶다는 뜻은 아니니.

똑똑.

노크 소리에 아우라가 식기를 내려놓았다.

‘루안인가?’

“들어와요.”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루안이 아니었다. 둥글둥글한 인상의 남자가 공손하게 예를 차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황후 폐하. 수트라 성의 주치의 신디온입니다. 황후 폐하께서 발목을 다치셨다고 하여 와 보았습니다.”

“아, 그렇군. 부탁하네.”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디온은 그녀의 앞에 앉아 발판을 두었다. 아우라가 그 위에 발을 두었다. 그녀는 창틀에 둔 붕대를 건넸다.

“붕대는 이걸로 다시 감아 주면 좋겠는데.”

“그럴 필요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럴 필요 없다고? 접질린 발은 그래도 며칠 가지 않나.’

“통증은 어떠신가요?”

“걸을 때 조금 걸리적거리는 정도.”

“가벼운 부상이라 다행이군요. 이 정도는 마법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마법?’

아우라가 되묻기도 전이었다. 신디온이 손을 아우라의 발목에 갖다 댔다. 붉은 기운이 발목에 스며들었다.

“다 됐습니다. 발을 디뎌 보십시오.”

아우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보았다. 놀랍게도 발목은 완치되어 있었다.

“이건…… 당신은 마법사인가?”

카사 제국엔 마법사가 희귀했다. 마법을 쓸 줄 알았다면 변방의 의사로 있을 리 없었다.

“마법사는 맞지만 카사인은 아닙니다. 원래는 국경 너머 실시아에 살고 있었습니다만, 몇 년 전 라이언 대공께서 제 능력을 인정해 주셔서 이렇게 궁에 살게 됐지요.”

‘율리우스와 비슷한 경우구나. 실시아의 마법이 생각보다 뛰어나. 무시해선 안 되겠어.’

“대공은 어디 계시나요? 시간이 없어 빨리 뵈어야 해서 말입니다.”

“저야 확실히 모릅니다만, 이리저리 산책하는 걸 좋아하시긴 합니다.”

신디온이 사람 좋게 웃곤 방을 나섰다. 그렇다면 아우라가 할 일은 하나였다. 이 큰 성에서 라이언을 찾아야 했다.

아우라는 방에서 나와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라이언의 방에도, 집무실에도 그는 없었다. 그의 위치를 안다고 하는 사용인도 없었다.

‘정말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결국 그녀는 성을 나섰다. 정원을 한 바퀴 돌고 구석의 커다란 온실도 살펴보았다. 온실의 풀들은 다 썩거나 시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온실 끝자락의 문을 발견했다.

‘이 문은…… 성의 뒤편으로 이어지는 건가.’

아우라는 문을 열고 나섰다. 문밖으로는 가파른 둔덕이 있었다. 아우라는 치마를 잡고 어렵게 둔덕을 올랐다.

“!”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수많은 군사가 그 아래에서 훈련을 하고 있었다.

‘대공의 군사인가? 수가 너무 많아. 황실이 허락한 수를 훨씬 넘었어.’

“황후 폐하?”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아우라가 휙 돌아섰다. 그곳에는 라이언이 서 있었다.

“대공, 이건…….”

“너무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마십시오, 폐하.”

라이언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이왕 다 보신 거, 숨김없이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하세요.”

“이 군사를 다 쓰는 한이 있더라도 제니아를 독립시켜 드리겠습니다. 폐하의 목숨을 지켜 드리며 핀의 봉인도 풀어 드리지요.”

“…….”

“그 충성의 의미로 제가 지금껏 제니아인들을 성의껏 돕지 않았습니까.”

그건 마치 달콤한 꿈같은 말이었다. 그래서 아우라는 더욱 믿을 수 없었다.

‘……덫이야.’

아우라의 표정을 살피던 라이언이 말했다.

“아, 혹시 카를이 무서우신가요? 만약 그가 보복을 한다면…….”

그가 제 군사들을 가리켰다.

“성심성의껏 막아 드리겠습니다.”

“그건 반역입니다, 대공.”

라이언은 아니라고 하지 않았다. 아우라는 한 걸음 물러서며 물었다.

“대체 내게 뭘 바라는 거죠?”

“카를이 죽으면 나와 재혼해 주십시오.”

“……지금 나와 장난치는 건가요?”

“장난처럼 보이십니까?”

그는 빙긋 웃었다. 아우라는 침을 꿀꺽 삼켰다. 당황한 티를 내서 좋을 게 없었다. 일단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해야 했다.

‘카를이 죽으면, 이라는 조건을 붙였어. 반역을 일으키겠다는 뜻이야. 하기야, 그게 아니라면 이 많은 군사를 어디다 쓴단 말인가.’

아우라가 침착하게 말했다.

“그걸 약속하지 않으면 제 희생 없이 봉인을 풀 방법을 알려 주지 않을 건가요?”

“음…… 사실 그 점을 아직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너무 치사하게 구는 것 같잖습니까.”

“그럼, 대공.”

“네, 폐하.”

“시간을 좀 주시죠. 생각할 시간을.”

“생각해 주신다니. 영광입니다.”

라이언이 환하게 웃었다.

“도망치시거나 제 뺨을 후려치실 줄 알았거든요.”

“……그럴 리가요. 아무튼 대공의 말은 잘 알아들었습니다. 검토해 보죠.”

“말씀이 참…….”

“…….”

“서운할 정도로 제게 아무 마음이 없으시군요.”

“마음까지 드려야 하나요? 대공의 제안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그건 불가능할 듯싶은데요.”

“카를에겐 주신 것 같아서요.”

“……안 줬습니다.”

아우라는 뒤돌아 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라이언이 그녀에게 따라붙으려던 때였다.

“전하.”

병사 하나가 산길을 올라 라이언을 찾았다.

“무슨 일이냐?”

병사가 속삭이듯 말했다.

“황제가 마물 지대까지 왔습니다.”

“……상황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마물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전력의 손실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그래? 그곳 마물들도 상당히 강한데……. 황제군의 힘이 대단하군.”

라이언은 산 아래 집합한 군대를 보곤 입꼬리를 올렸다.

“조금 이르게 써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예?”

“군대를 데려가서 황제를 막아. 가능하다면 당연히 죽이고.”

***

아우라는 바쁜 걸음으로 둔덕을 내려왔다. 온실을 지나 성 앞을 성큼성큼 걸었다.

‘이곳을 떠나야 해. 당장.’

라이언은 위험한 자였다. 그를 도와 목숨을 건사한다고 한들 결국 그에게 이용당할 것이다.

‘설사 내 희생 없이 핀을 깨는 방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건 내가 찾겠어. 저자의 도움은 받지 않아.’

일단은 루안에게 이 소식을 알려야 했다. 그런데 성으로 들어가려던 그때, 누군가가 아우라에게 다가왔다.

“황후 폐하?”

그녀는 중년의 여인이었다. 분명 아름다운 사람이었으나 심약해 보였다. 낯빛도 그리 좋진 않았다.

“저를 기억하시는지요. 저는 리안 카사입니다.”

“리안…… 카사라면…….”

아우라는 크게 놀랐다. 그녀는 이센의 친모이자 선황의 마지막 후궁이었다.

리안이 상냥하게 웃으며 물었다.

“결혼식 때 뵈었는데요. 인사를 한 번 나눈 게 고작이었지만 말입니다.”

“기억합니다, 리안 님. 그런데 어……째서 여기에 계시는지요?”

“이센과 함께 여행하던 중에 병이 나서 머물고 있습니다.”

‘병이 있구나. 그래서 안색이 좋지 않은 거였어.’

“지금은 수도로 간 이센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말에 아우라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라이언은 이센의 죽음조차 그녀에게 말해 주지 않은 것 같았다.

리안이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차라도 한 잔 대접하고 싶습니다. 수트라의 차 맛은 굉장히 독특하거든요.”

아우라는 거절하려 했다. 한가롭게 차나 마시고 있을 때가 절대 아니었다. 그런데 리안의 손이 심상치가 않았다.

‘……떨고 있잖아.’

마치 제발 자신의 말을 들어 달라는 듯 절박한 떨림이었다.

병사들이 의심이 담긴 얼굴로 슬슬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아우라가 싱긋 웃었다.

“좋지요. 대접해 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제 방으로 가시지요.”

리안의 방은 성의 꼭대기 층에 있었다. 몸이 아픈 중년 여인의 방 위치로는 적절하지 않았다. 마치 일부러 운신을 불편하게 하려는 것 같았다.

아우라와 리안이 방에 들어섰다. 리안은 찻주전자와 잔을 꺼내 왔다.

“창가 테이블에 앉으세요, 황후 폐하.”

“네, 감사합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리안은 차를 따라 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아우라는 조급해졌다.

‘이렇다 할 말은 안 하고 있어. 괜히 시간 낭비를 하고 있는 걸까.’

“이곳의 마법은 정말 대단합니다. 마법이 아니었으면 저는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거예요. 대공께서 살펴 주신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을 하면서 리안이 종이에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병사들이 우리 말을 듣고 있을 겁니다. 오래 있으면 의심을 살 거고요. 하나만 질문해도 될까요?」

아우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리안의 펜을 가져와 이렇게 적었다.

「서로 하나씩 질문을 교환하면 되겠습니다. 먼저 적으시죠.」

리안이 급히 펜을 가져갔다.

「이센은 살아 있나요?」

아우라는 그 질문 앞에서 할 말을 잃었다. 그녀의 반응에 리안은 이미 뭔가를 읽어 낸 듯했다. 리안이 얼굴을 가리고 소리 죽여 울기 시작했다. 아우라는 고민 끝에 이렇게 적었다.

「이센 황자는 대공의 반역에 가담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은 비밀에 부쳐졌습니다. 장례는 성대하게 치러졌습니다.」

리안은 그 글을 찬찬히 읽곤 고통을 삼키는 듯 눈을 꽉 감았다.

“다행이군요. 일이 그렇게 되었다고 하니.”

그녀는 밖의 병사들을 의식하듯 말했다. 하지만 빈말은 아닐 거였다. 반역 혐의가 비밀에 부쳐지고 장례가 성대하게 치러졌다는 게 위로가 되었을 테니.

“차 맛이 무척 좋습니다. 어디의 차인가요?”

아우라가 물었다. 리안은 차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아우라는 서둘러 글씨를 썼다.

「이곳을 나가려 합니다. 몰래 도망칠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세요.」

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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