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69화
아우라는 두 번째 핀의 조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미 첫 번째 조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라이언에게 알릴 필요는 없었다.
“……그건가요?”
“네, 맞습니다. 이게 바로 핀이죠. 별것 아닌 얼음 조각처럼 생겼죠?”
라이언이 샹들리에 불빛에 핀을 비췄다. 투명한 핀 조각이 무지갯빛으로 반짝였다. 그는 홀린 듯 그 빛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 조각의 생김새에 의문을 품지 않으시는군요.”
“핀이 세 개로 나누어진 수정구라는 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럼 황제 폐하께 이미 하나 얻어 내셨겠군요.”
“그건 대공의 상상에 맡기지요. 제가 그 조각을 얻고 더는 황궁에 볼일이 없어져서 여기에 있는 건지…… 얻지 못해서 여기에 올 수밖에 없었는지.”
“하긴. 양쪽 모두 그럴듯하군요.”
“…….”
“저는 왠지 황후 폐하께서 적어도 핀을 한 조각 정돈 가지고 계신 것 같지만 말입니다.”
“…….”
“뭐, 이제 저와는 상관이 없죠.”
라이언이 빈 접시에 핀을 떨어뜨렸다.
땡그랑.
날카로운 소리가 식당을 울렸다. 라이언이 또 손가락을 튕기자 시종이 접시를 아우라에게 옮겼다.
그녀는 그것을 만지작거리다가 꽉 잡았다. 딱딱하고 차가웠다.
‘두 번째 핀의 조각…….’
이로써 라이언에게 볼일은 다 끝난 셈이었다.
“그럼 이제 음식을 좀 드세요. 이러다 식겠습니다.”
라이언이 먼저 음식을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우라는 손조차 대지 않았다. 음식, 식기, 냅킨마저도. 어디에 독을 묻혔을지 몰랐다.
라이언은 그런 아우라를 보고 피식 웃었다.
“그럼…… 제가 핀의 조각을 드렸으니 이번엔 황후 폐하께서 말씀하실 차례입니다.”
“뭘 묻고 싶으신가요?”
“핀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계시나요?”
“제 정보원이 알려다 준 바에 의하면, 핀은 제니아인들의 마력을 봉인한 수정구라더군요. 봉인을 푸는 방법은…… 대공께 물으려 했습니다.”
아우라는 과연 라이언이 사실대로 말할까 싶었다.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당신이 죽어야 한다는 말을.
라이언이 무척 반가워하며 말했다.
“그건 알려 드릴 수 있겠습니다. 봉인을 푸는 방법, 그게 참…… 재미있거든요.”
“이야기를 좀 들어 보죠.”
“이번에도 제가 이야기를 하는 건가요?”
“이 자리가 정말 솔직하게 모든 걸 털어놓는 자리라면…… 비밀이 많은 쪽이 할 말도 많기 마련이죠.”
라이언은 포크로 스테이크를 쿡쿡 눌렀다.
“음…… 뭐, 좋습니다. 듣고 기분이 안 좋은 쪽은 제가 아닐 테니까요. 황후 폐하시지.”
“애초에 핀의 존재 자체가 제게 기분 좋은 물건이 아닙니다.”
“하긴, 그렇겠습니다.”
그가 너스레를 떨더니 짐짓 진지하게 말했다.
“황태자가 살아 있을 때 그가 그러더군요. 제니아를 정벌해서 새 황권의 초석을 세우자고.”
“…….”
“그래서 돕기로 했습니다. 나쁘지 않은 생각 같았거든요. 그렇게 해서 황태자와 저 그리고 지금의 테인 공작이 모였죠.”
“나머지 핀 조각의 행방도 알려 주시는 건가요?”
“이미 알고 계실 것 같아서요. 황후 폐하라면.”
라이언이 어깨를 으쓱했다.
“제니아 마법사들의 마력은 강력합니다. 그냥 주술로는 손도 못 댈 정도로요. 강하지만 더럽고 비열한 마법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제가 실시아의 대마법사를 추천했죠. 역시 강하지만 더럽고 비열한 마법사였거든요.”
율리우스 이야기였다. 아우라는 가슴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에 목이 탔다.
‘라이언이 율리우스를 추천한 거였군. 저자만 아니었어도 제니아는…….’
“그 마법사가 그러더군요. 마력 봉인이 해제되는 걸 막기 위해선 결정적인 희생을 걸어야 한다……. 그래서 황태자가 제안한 게 트루 블러드의 희생입니다. 즉…….”
라이언이 아우라를 보며 싱긋 웃었다.
“당신의 죽음입니다, 황후 폐하.”
침묵이 흘렀다. 한참 동안 눈을 맞추고 있던 라이언이 말했다.
“……알고 계셨군요. 아니, 알고 계심에도 여기까지 오셨군요.”
“내 마음까지 대공께서 알 바는 아닙니다.”
“폐하께서 돌아가시면 제니아인들은 믿고 따른 사람이 없을 텐데요?”
“그건 제니아인들의 사정입니다. 역시 대공께서 알 바는 아니죠.”
라이언이 노골적으로 재미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아이처럼 손끝으로 툭툭 테이블을 쳤다.
“어쨌거나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음식도 잘 먹었고요.”
아우라는 손도 안 댄 접시를 가리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이만 성을 떠나야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여유롭게 여행을 온 건 아니라서요.”
“황후 폐하.”
“네, 대공.”
“하루만 더 계셔 주십시오.”
“곤란합니다.”
아우라는 라이언의 성에 더 있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언제 카를이 들이닥칠지 몰랐다.
“그럼 이건 어떤가요?”
라이언이 턱을 괴곤 말했다.
“만약 제가 황후 폐하의 희생 없이 핀의 봉인을 푸는 방법을 알려 드린다면…….”
“……!”
“하루만 더 이곳에 계셔 주시겠습니까?”
***
루안은 아무래도 불안했다. 아우라가 지금껏 보여 준 태도. 아우라를 단둘이 만나려는 대공의 움직임. 그 모든 것들이 그를 초조하게 했다.
‘안 좋은 예감이 들어.’
그는 방 안을 하염없이 서성였다.
호세가 넘긴 서류를 본 후 아우라는 어쩐지 느낌이 달라진 것 같았다. 마물이 나타났을 때도 필요 이상으로 침착했다. 라이언과 만난 후엔 어떤 체념까지 느껴졌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아우라가 말안장에 숨긴 서류를 봐야 해.’
그는 방문을 열고 나섰다. 문 앞에는 장정 셋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루안이 스쳐 가려 하자 그들이 앞을 막았다.
“비켜라. 난 황후 폐하의 기사다.”
“수트라 성은 경비가 매우 삼엄합니다. 외부인은 혼자 돌아다닐 수 없습니다.”
“내 발을 묶어 두면 누구보고 황후 폐하를 지키라는 거지?”
“저희는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명령의 의도는 알 만했다. 루안과 아우라를 떨어뜨려 놓으려는 속셈일 터다.
루안이 결국 검을 빼 들었다. 그러나 장정들 역시 물러나지 않았다. 까딱하면 그들도 검을 들 기세였다.
“비키지 않으면 베겠다.”
루안이 검을 꽉 잡았을 때였다.
“루안.”
아우라의 목소리에 그가 고개를 돌렸다. 어두운 복도 끝에서 그녀의 모습이 드러났다.
“루안, 무슨 짓이야?”
“아우라.”
“검을 집어넣어. 어서.”
루안은 하는 수 없이 검을 넣었다. 아우라는 세 장정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일인가요?”
“외부인은 혼자 돌아다닐 수 없기에 외출을 삼가라 말씀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럼 제 기사가 저와 함께 다니는 건 괜찮은 건가요?”
“그건…….”
그들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거야 당연히 괜찮습니다.”
“루안, 어디로 가려고 했던 거야? 나와 같이 가.”
루안은 머뭇거렸다. 그녀의 말안장을 뒤지러 간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냥 네가 너무 오랫동안 오지 않길래 찾으러 가려 했어.”
“미안. 이야기가 길어져서. 잠깐 들어갈까?”
“그래, 들어와.”
두 사람은 루안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우라, 핀은 구했어?”
아우라가 주머니에서 두 개의 핀 조각을 꺼내 보였다. 루안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일단 얻을 건 얻은 셈이었다.
“핀의 봉인을 푸는 법은?”
“……아직 듣지 못했어.”
“뭐? 그럼…….”
“하루만 이곳에 더 있자, 루안.”
그 말에 루안이 놀랐다.
“……진심이야? 너, 대공을 믿지 못하잖아.”
“하루 정도는 여유를 가져도 될 것 같아서. 내일도 제대로 듣지 못하면 유감없이 떠날게. 하루만 나와 더 머물러 줘.”
그건 부탁이었다. 그리고 루안은 한 번도 그녀의 부탁을 거절해 본 적이 없었다.
“……좋아. 그렇게 해. 네가 떠나지 않으면 나도 떠나지 않아.”
“고마워.”
아우라가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 방은 이 복도 끝이야. 필요하면 찾아오도록 해. 그리고 루안.”
“응.”
“내일 내 호위를 맡을 필요는 없어. 방에서 쉬도록 해.”
“그건 안 돼. 그자는 위험하잖아. 너도 알다시피…….”
“알지만 그편이 대공과 대화를 나누기에 편한 것 같아서.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아우라는 잘 자라는 듯 웃으며 그의 방을 떠났다. 루안은 문밖을 흘긋 보았다. 어김없이 병사들이 방 앞을 지키고 있었다. 루안의 발을 묶어 놓기라도 하려는 듯이.
루안은 확신했다. 아우라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내일…… 어떻게든 마구간으로 가야 해.’
***
수트라의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뿌드득…… 뿌득…….
라이언은 눈이 쌓인 정원을 걷고 있었다. 어깨에 걸친 모피 망토가 무거웠다. 목덜미를 스미는 추위가 전신에 퍼지는 듯했다.
그는 세상에서 추운 게 가장 싫었다. 그래서 평생 산 수트라 땅도 싫었다.
다섯 살 때, 그는 어머니와 황궁에 간 적이 있었다. 그곳은 따뜻하고 사람들은 밝았다. 할 수만 있다면 춥고 척박한 수트라로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천하다’는 말을 듣기 전까진.
어린 라이언이 늦은 밤 어머니 릴리안 카사를 찾았다. 황실의 객실에 묵고 있던 릴리안이 제 아들을 반갑게 맞았다.
“어서 와라, 라이언. 형님들과는 재미있게 놀았니?”
형님들이라 해도 모두 스무 살 이상 많은 남자들이었다. 릴리안은 그들 틈바구니에 라이언을 끼워 넣고 싶어 했다.
“네, 재미있었어요. 맛있는 것도 많이 주시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해 주셨어요.”
“재미있는 이야기?”
“네. 어머니, 천하다는 게 뭐예요?”
“……뭐라고?”
“형님들이 그랬어요. 저와 어머니는 천한 거라고.”
라이언이 릴리안의 은발을 작은 손으로 쥐었다.
“이게 그 증거래요.”
릴리안은 라이언을 확 끌어안았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라이언, 꼭 기억해라. 너는 고귀해. 그 누구보다도 고귀해.”
“……네.”
릴리안은 충혈된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았다. 그곳에 카사의 금발 놈들이라도 있다는 듯이.
그녀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라이언. 며칠 전에 태어난 그 아이, 너도 봤지? 검은 머리 후궁에게서 태어난 그 아이 말이야.”
“제 조카요? 카를이라고 했어요.”
“그래. 그런 아이를 보고 천하다고 하는 거야. 라이언, 네가 아니라…… 그 아이가.”
라이언의 발길이 어느새 아우라의 방 앞에 닿았다. 그는 닫힌 방문을 가만히 보았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던 불빛이 사라졌다. 잠이 들 준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라이언은 문고리를 잡았다.
‘고귀함이라…….’
그는 피식 웃더니 문고리를 놓았다.
아직 그에겐 하루의 시간이 더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