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68화
루안이 빠르게 마물의 숫자를 세었다.
“셋…… 다섯…… 여덟…… 열하나! 아우라, 위험하니 바위 뒤로 숨어 있어.”
“나도 싸울 수 있어, 루안.”
“북부의 마물들은 강해. 어서!”
“난 괜찮아.”
철컥.
아우라가 석궁의 레버를 장전했다. 이미 죽음을 각오했기 때문일까. 아우라는 이상할 정도로 두렵지 않았다.
슈웅-
화살이 날아가 달려오는 마물의 배에 맞았다.
-캬악!
마물이 그대로 쓰러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기뻐할 새도 없이 아우라는 계속 화살을 쏘았다. 화살은 마물들을 하나둘 쓰러뜨렸다.
한편 루안 역시 거침없이 마물을 베어 냈다. 마지막 열한 번째 마물이 그의 검에 숨통이 끊겼다.
“후……. 아우라, 괜찮아?”
“응, 멀쩡해.”
“여길 떠야겠어. 피 냄새를 맡고 마물들이 더 몰려올 거야.”
아우라는 피로 물든 황무지를 바라보았다. 이곳은 하나같이 끔찍한 것투성이라 그녀 역시 어서 떠나고 싶었다.
“그래, 어서 가자.”
아우라가 말에 올라타려 할 때였다.
-끼이이이야악!
화살을 맞고 쓰러져 있던 마물 한 마리가 아우라에게 달려들었다.
“!”
아우라는 석궁으로 마물을 겨냥하려 했지만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마물이 그대로 아우라를 덮쳤다.
“윽!”
아우라는 그대로 쓰러졌다. 마물의 손톱이 하늘로 치솟았다. 그 순간, 아우라는 자기도 모르게 외쳤다.
“……카를!”
삭-!
예리한 소리와 함께 마물의 등이 갈라졌다. 검의 주인은 죽은 마물을 멀리 던져 버렸다.
“루안…….”
“아우라! 괜찮아?”
“어어…… 괜찮아.”
루안이 놀란 아우라를 일으켰다. 루안의 검에는 찐득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조금 전 일격 때문에 그의 얼굴에도 피가 점점이 물들어 있었다. 아우라는 손수건을 꺼내 피를 닦아 주었다.
“대단해, 루안. 검술을 이렇게까지 익히다니. 쉽지 않았을 텐데.”
그러나 루안은 거친 숨을 내쉬며 아우라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아우라가 루안의 얼굴을 다 닦았을 때였다.
루안이 아우라의 손목을 잡았다.
“왜 그래?”
“아우라, 너…….”
그가 무슨 말을 하려던 때였다.
“아우라 황후님이십니까?!”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두 사람이 놀라 돌아봤다. 그곳엔 겨울 갑옷을 입은 한 무리의 기사단이 있었다. 그들의 깃발은 분명 눈꽃 모양이었다.
“맞소. 그대들은 라이언 대공의 군사인가?”
아우라의 말에 기사들이 모두 말에서 내렸다. 그들은 아우라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기사단장으로 보이는 자가 앞으로 나섰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희는 대공 전하의 군사로, 마물 지역의 경비를 맡고 있습니다.”
“여기가 마물 지역이었군. 어쩐지…….”
“위험한 지역입니다. 어서 저희와 함께 대공께로 가시지요.”
수트라의 기사단을 만나다니. 아우라는 마음이 한시름 놓였다.
“그러도록 하지. 가자, 에밀.”
아우라는 수트라 기사단을 의식해서 말했다. 루안은 말없이 말에 올라탔다.
사실 루안은 다시 한번 물으려 했다. 정말로 카를을 좋아하는 게 아니냐고.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지금이라도 아우라가 황궁으로 돌아갔으면 했다. 어차피 황궁에 더 핀이 없다면 이제 루안과 자경단에게 맡기면 되는 것 아닌가. 가슴이야 아프겠지만 그는 아우라의 행복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루안은 기사단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하필이면 지금 저자들이 나타나선…….’
아무래도 중요한 물음을 할 기회를 놓친 듯했다.
***
수트라는 마물 지대와 멀지 않았다. 아우라와 루안은 빙산 지대를 지나 수트라로 입성했다. 도시는 조용하고 한산했다.
아우라는 기사단장에게 물었다.
“그런데 자네들은 내 정체를 어떻게 알았지?”
그들은 아우라를 보자마자 ‘아우라 황후’가 맞느냐 물었다. 아우라가 이곳으로 온다는 걸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마치 그녀를 기다린 듯했다.
“대공께서 오래전부터 저희에게 엄명을 내리셨습니다. 수트라 부근에서, 특히 수도와 연결되는 길목에서 여인을 발견하면 즉시 보호하라고요. 아우라 황후님께서 언제 오실지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그렇게까지?’
라이언은 끈질긴 데가 있었다. 안센나에서 루안에게 했던 말만 해도 그랬다.
‘그분이 원하는 건 다 내가 가지고 있으니 어서 날 찾아 달라고. 이쪽은 절박하다 못해 몸이 달아 있다고 말이야.’
그 집착 아닌 집착이 아우라는 못내 찝찝했다.
하지만 인제 와서 물러날 순 없었다. 아우라는 목적이 확실했고, 그것을 위해 모든 걸 걸 수 있었다.
수트라 성은 도시의 중앙에 있었다. 성은 황궁 못지않게 컸다. 게다가 눈과 얼음에 쌓여 있어서 환상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분명 매력 있는 도시이긴 하지만…… 환경이 척박해서 발전하기엔 한계가 뚜렷해.’
그녀는 성으로 오면서 도시를 유심히 살폈다. 도시엔 일반 시민보다 군사와 용병이 훨씬 많았다. 그나마 보이는 시민들은 아마 그들의 가족일 것이다.
그들은 이윽고 성문 앞에 도착했다.
끼이이-
거대한 성문이 열리더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아니나 다를까, 라이언이 있었다.
“황후 폐하!”
라이언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우라는 말에서 내려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입니다, 대공.”
“정말 꿈만 같군요.”
그는 아우라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온 사방이 푸른빛이 도는 수트라. 그 모든 것이 대공과 잘 어울렸다. 속 모를 눈빛마저도.
“제가 너무 늦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 라이언이 눈웃음을 지었다.
“늦지 않으셨습니다. 폐하께서 원하시는 것들이 아직은 이 성에 있으니까요.”
‘아직은, 이라고…….’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그는 얼른 덧붙였다.
“추우시겠습니다. 들어가시죠.”
“네. 감사합니다, 대공.”
그들은 성안으로 들어섰다.
쿵.
등 뒤로 성문이 닫혔다.
“성문은 항상 이렇게 닫아 놓으시나요?”
“북부니까요. 마물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지 않습니까.”
라이언이 문득 루안을 보았다. 루안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저 친구도 함께군요. 황후 폐하의 기사 말입니다.”
“두 사람, 안센나에서 만났다고 했죠?”
“네. 아주 충성스러운 친구더군요.”
라이언이 낮게 웃었다. 루안은 무표정할 뿐이었다.
그들은 성 내부로 들어섰다. 단열과 보온에 온 힘을 쏟은 듯 보기보다 따뜻한 성이었다.
“저녁 식사부터 하시지요.”
라이언이 말에 아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대공과 함께하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아, 다만…….”
라이언이 웃으며 말했다.
“충성스러운 기사의 식사는 저희가 따로 준비해 드리죠.”
아우라는 그 말의 의미를 바로 알아들었다.
‘단둘이 대화하자는 의미구나.’
라이언은 아우라를 극진하게 대접했다. 뜨거운 물과 고급 향료로 목욕을 한 그녀는 옷을 갈아입었다. 그가 준비해 준 겨울 드레스는 조금 무거웠지만 따뜻하고 포근했다.
루안은 아우라가 혼자 라이언을 만나는 걸 걱정했다. 그러나 황족은 황족이었고, 기사는 기사였다. 아우라는 결국 라이언과 단둘이 식당에 마주 앉았다.
식당은 따뜻했으나 고요하고 어두웠다. 흰 두건을 쓴 시녀들이 유령처럼 돌아다니며 식탁에 음식을 올렸다.
‘분위기만으로 사람을 위축시키는 곳이야.’
한편 라이언은 기분이 좋은지 시종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렇게 제 성에 와 주시다니, 정말 꿈만 같습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지요. 그런데 이곳에서 혼자 지내시는 건가요?”
라이언은 미혼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대공인데 이 큰 성에 혼자라니. 뭔가 이상했다.
“네.”
“교류하는 여성도 없으신가요?”
“없습니다.”
‘라이언은 올해로 스물일곱 살이 되었어. 혼기가 다 찼을 텐데. 어째서?’
하지만 그건 단순한 호기심일 뿐, 아우라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특히 황궁에서 도망친 지금은 더 그랬다.
“황궁에선 대체 어떻게 나오셨나요? 황제 폐하께서 황후 폐하를 보내 주실 리가 만무한데. 게다가 기사 하나 달랑 붙여서.”
라이언이 잔에 와인을 따르며 물었다. 그는 이미 아우라가 도망쳤다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아우라 역시 그 점을 굳이 숨기고 싶진 않았다.
“재주껏 나왔습니다.”
“하하…… 별로 말씀하시고 싶지 않으신가 봅니다.”
라이언이 손가락을 딱 하고 튕기더니 와인 잔을 가리켰다. 시종이 와인을 아우라의 앞에 가져다 두었다.
“드십시오.”
그러나 아우라는 마시지 않았다.
“그나저나 발을 다치신 것 같던데요. 괜찮으십니까.”
“조금 삐었어요. 괜찮을 겁니다.”
라이언이 턱을 괴고 아우라 쪽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정확히는 테이블 아래의 아우라의 발을. 목욕 때문에 붕대는 풀었으나 붓기는 남아 있었다.
“아까 보니 붕대를 정말 잘 감았던데요. 기사가 감아 준 건가요?”
“…….”
“아니면 황제 폐하?”
“네, 그렇습니다.”
“저런. 지금쯤 황제 폐하의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겠습니다. 이토록 아끼는 부인이 사라져 버렸으니.”
“대공.”
라이언이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저는 대공을 믿고 수도에서 수트라까지 왔습니다. 말장난을 하고 싶진 않아요.”
“…….”
“핀을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그 어떤 대화도 행동도 없습니다.”
“안 드리면요?”
라이언이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안 드리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아우라가 미소를 지었다.
“핀을 주시지 않으면 이런 대화에 참여하지도 않겠다는 겁니다.”
아우라는 라이언의 농담에 넘어가 줄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라이언은 생각했다.
‘제법이긴 해. 꽤 급박한 상황일 텐데 티가 안 나.’
라이언은 아우라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의 말을 들어 주는 것 같으면서도 중요한 순간마다 그의 예상을 빗나가는 게.
“제가 장난이 심했군요. 당연히 드려야지요. 여기까지 오셨는데.”
라이언이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아우라는 한눈에 그것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그것은 분명 두 번째 핀의 조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