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67화
사냥제가 끝났다. 황후가 몸이 좋지 않아 먼저 환궁한 것 빼곤 특별할 것 없이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국무 회의가 열렸다.
카를은 대신들과 함께 회의장에 들었다. 그들은 이런저런 사항을 카를에게 전달했다. 카를은 능숙하게 해결책을 내놓거나 짧은 토의를 이어 갔다.
이상한 점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냥제의 여파인지 젊은 황제는 그저 조금 피곤해 보일 뿐이었다.
“아 참, 황후 폐하의 몸은 좀 어떠십니까?”
한 대신이 물었다.
“아, 황후 말인가.”
카를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사실 황후가 얼마 전 비가 오는 날에도 많이 앓았지. 요즘 무리를 많이 한 것 같아서 이궁으로 요양을 보냈소.”
이궁은 황궁 구석에 있는 황족 전용 별장이었다. 워낙 아늑하고 조용한 곳이라 아이를 낳은 여자들이 쉬곤 하는 궁이었다.
“갑자기 요양을 가셨다고요?”
“그렇소. 워낙 힘들어하기에 오늘 아침에 바로 보냈지. 최소한의 시녀들만 붙여서 말이오. 황후가 휴 식 중이니 이궁 출입은 엄금이오.”
“아…… 네, 그렇군요.”
대신들은 좀 어리둥절했지만 따지고 들 일은 아니었다. 아우라 황후가 건강한 타입은 아니니.
“그리고 나도 황후를 위해 며칠 정도 이궁에 머물까 하는데.”
“폐하께서도 말입니까?”
“그렇소. 나도 휴식이 좀 필요해서 말이오. 그러니 꼭 나눠야 할 이야기가 있으면 지금 했으면 좋겠군.”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해결해야 할 안건은 회의에서 이미 다 처리한 상황이었다. 다만 갑자기 자리를 비우겠다는 결정이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폐하, 그럼 언제쯤 돌아오시는 겁니까?”
한 대신이 물었다. 카를이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사흘.”
그는 확신을 담아 다시 말했다.
“사흘 안에 복귀하는 걸로 하겠소.”
대신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흘 정도면 적당한 휴가 일수였다.
“만약 일이 생기면 수석 보좌관을 통해 해결하도록. 더 할 말은 없는 걸로 알고 회의는 여기까지 하지.”
카를이 여유롭게 회의장을 떠났다. 문 앞에는 조쉬와 테오가 기다리고 있었다.
세 사람은 바쁘게 걷기 시작했다.
“조쉬. 엘리제는?”
“물어봤으나 모르겠다고 합니다. 황후 폐하를 뵌 적도, 테인 공작가에 무슨 일이 생긴 것도 아니라고요. 저 역시 테인 공작가를 따로 확인했으나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 조쉬, 넌 날 따라서 수트라로 간다. 테오는 궁을 지켜.”
테오가 말했다.
“폐하. 그 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지?”
“저번에 조쉬에게 명령하셨던 황후 폐하께 편지를 보낸 이를 잡은 것 같습니다.”
카를이 우뚝 멈춰 섰다.
‘설마 H를?’
“내가 아는 사람인가?”
“황후 폐하의 시녀장 미나의 남동생 호세입니다. 황후 폐하의 추천으로 황립 아카데미에서 마법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얼마 전까지 수트라 너머 실시아에 다녀왔다고 합니다. 정확히는 마법사 율리우스의 저택으로요.”
많은 의문이 한꺼번에 풀린 듯했다.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졌다. H라는 이름도, 그의 정체도, 편지의 내용과도.
“호세를 어디다 뒀지?”
“일단 감옥에 두긴 했습니다.”
“수트라로 가는 길에 들리겠다.”
“시녀장도 데려갈까요?”
“아니. 그 아이까지 심문할 시간은 없어.”
카를도 미나를 의식하곤 있었다. 주변에 사람을 잘 두지 않는 아우라가 데리고 다니는 시녀.
한눈에 봐도 충성심이 대단해 보였다. 아우라가 어디에 갔는지 안다고 해도 절대 말하지 않을 것이다. 미나를 추궁하느니 확실한 증거가 잡힌 호세를 몰아붙이는 게 빨랐다.
잠시 후, 카를은 떠날 준비를 마치고 지하 감옥으로 들어갔다.
호세는 외딴 감옥에 혼자 갇혀 있었다. 그는 자신이 왜 갇혔는지 영문도 모른 채 두려움에 떨었다.
저벅, 저벅…….
무거운 발소리에 호세가 창살 밖을 보았다. 조쉬 옆에 로브를 쓴 남자가 서 있었다. 호세가 멀뚱히 있자 조쉬가 말했다.
“황제 폐하시다. 무릎을 꿇어라.”
호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폐, 폐, 폐하를 뵙습니다.”
호세는 고작 열아홉 살 소년이었다. 마법학 외엔 이렇다 할 세상 경험도 별로 없었다. 한마디로 그는 인생 최고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카를이 철창을 꽉 잡았다.
“다 말해.”
“……예, 예?”
“황후에게 네가 알린 것.”
‘아…… 하지만 황후 폐하께선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누나도 그렇고.’
하지만 차마 그 말은 할 수 없었다. 로브 속에서 카를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여기서 이러고 있는 1분 1초가 아깝다는 듯이.
“당장 말해. 내가 그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
테오는 황제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조금 전, 카를이 조쉬와 함께 황궁을 떠났다. 조쉬는 떠나기 전 테오를 만나 짧게 이야기를 나눴다.
“조쉬, 어떻게 됐어? 호세란 놈이 다 말했어?”
“그런 것 같아. 난 자리를 비켜 드리느라 제대로 듣진 못했는데…… 듣자 하니 ‘원본’을 황후 폐하께 전달했대.”
“무슨 원본?”
“몰라. 편지 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 이야길 들으시곤 사색이 되셨어.”
조쉬는 슬쩍 카를을 보았다. 막 말에 오르는 카를의 얼굴이 창백했다. 여간해선 동요를 보이지 않는 카를이었다.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진 게 분명했다.
테오는 보좌관석에 앉았다.
“후우…… 이게 다 무슨 일이야.”
황제가 자리를 비웠으니 보좌관의 어깨가 무거웠다. 테오는 오늘 해결해야 할 서류를 하나씩 보기 시작했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울리곤 시종 하나가 들어왔다.
“보좌관님, 기사 한 분이 찾아오셨는데요.”
“기사? 들여보내.”
잠시 후 황제군 기사 하나가 들어왔다. 테인 공작가 유언장 사건 조사를 맡은 자였다. 그는 지금껏 도망친 집사의 흔적을 찾기 위해 지금껏 제국을 수색해 왔다.
테오가 그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자네, 뭔가를 찾아낸 건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집사의 흔적을 찾았습니다.”
***
루안와 아우라는 수트라를 향하고 있었다. 말발굽이 황무지를 달리는 소리가 공기를 가르고 퍼져 나갔다.
여름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기온이 떨어졌다. 수트라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우라는 로브의 옷깃을 여몄다. 숨을 쉴 때마다 입김이 터져 나왔다.
“하아…… 하아…….”
대체 얼마나 달린 건지. 말에 앉아만 있었는데도 숨이 찼다.
‘수트라까진 아직 멀었어. 쉴 때가 아니야.’
아우라가 다시 말을 채근하려던 때였다.
“아우라.”
루안이 그녀를 불렀다. 아우라가 고삐를 당겨 말을 멈췄다.
“쉬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달리기만 했어. 이대로 가다간 말이 먼저 지칠 거야.”
“하지만…….”
“쉬었다 가자. 잘 보니까 발도 다친 것 같은데.”
루안이 아우라의 발목을 보며 말했다. 발목에는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눈을 못 떼게 하려고 작정을 한 것 같아, 네가.’
걱정인지 타박인지 모를 말이 다시 들려오는 듯했다. 아우라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짐짓 밝게 말했다.
“그래. 조금만 쉬자.”
아우라와 루안은 말에서 내렸다. 주위엔 크고 작은 바위가 몇 개 있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가장 큰 바위에 기대어 앉았다.
아무리 로브를 둘렀어도 여름용 승마복은 너무 얇았다. 아우라는 서늘함에 무릎을 감싸 안았다. 루안이 그녀를 슬쩍 보더니 제 로브를 벗어 덮어 주었다.
“안 돼, 루안. 날씨가 추워.”
“추우니까 주는 거야.”
“하지만 네가…….”
“나야말로 괜찮아. 덮고 있어.”
루안이 웃으며 아우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루안의 체온 덕분에 아우라의 몸이 조금 따뜻해졌다.
“넌 좋은 사람이야, 정말.”
아우라가 중얼거렸다.
“왜 안 하던 소리를 해.”
“왜긴. 네가 좋은 사람이니까.”
“좋은 사람이면 버리지 말고 잘 데리고 있어.”
루안의 말에 아우라는 그냥 웃었다. 그는 말없이 휴식을 취했다.
루안은 아우라에게 묘하게 거리를 두었다. 친절하고 배려 있었지만 더는 장난스럽진 않았다. 그는 사냥제 전날 밤에 있던 일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다. 입을 맞추려던 자신의 행동이 마치 처음부터 없던 일인 것처럼.
아우라는 알고 있었다. 그가 제게 거리를 두는 건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녀를 혼란스럽게 하지 않으려는 배려였다.
한때는 이 마음을 모른 척하는 게 괴롭고 미안했다. 하지만 이젠 그때보다 마음이 가벼웠다.
아우라가 바위에 머리를 툭 기댔다.
‘나, 잘 죽을 수 있을까.’
호세가 보낸 자료. 그것을 본 아우라는 한동안 혼란스러웠다. 그 모든 자료를 본 순간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단번에 이해했기 때문이다.
핀을 다 모으면 아우라 자신이 죽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핀을 모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그것뿐이었다.
‘괜찮아. 할 수 있어. 카를을 찌르던 순간부터 죽음을 각오했었잖아.’
그때는 정말 그랬다. 죽을 각오도 없이 제국의 황제를 찌를 순 없는 일이니.
‘물론 그때야…… 카를의 손에 죽을 줄 알았지만.’
아우라는 저울질을 해 보았다. 카를의 손에 죽는 것. 제니아를 위해 죽는 것. 후자가 백배는 나았다. 억울할 건 없었다. 왕녀로서 국민을 위해 희생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 아니, 그것은 당연함을 넘어선 명예였다. 그렇게 생각해야만 했다. 그게 그녀가 끝내 버리지 못한 왕족의 긍지였으니.
한편 아우라는 알 것 같았다. 카를이 왜 그렇게 핀을 주길 저어했는지.
그는 핀의 봉인을 푸는 방법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가 그 방법을 알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치리란 것도.
‘나를 살리려고 했던 거구나. 정치적 입장 때문이 아니었어.’
그렇다면 아우라는 더욱 카를에게 돌아갈 수 없었다.
아우라는 절대 핀을 포기할 수 없다. 카를은 그런 아우라를 포기할 수 없다. 아우라가 핀을 포기하지 않는 한 그와의 싸움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 떠나길 잘한 거야. 다 잘되어 가고 있어.’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도닥였다.
그때였다.
-끼이이이이!
-캬오오오!
소름 끼치는 괴성이 들려왔다. 루안이 외쳤다.
“마물이야!”
두 사람은 벌떡 일어났다. 루안은 검을, 아우라는 석궁을 꺼냈다.
지평선에서부터 마물 한 부대가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