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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66)화 (66/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66화

루안은 아우라에게 달려가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아우라가 루안의 등을 쓸어 주며 웃었다.

“많이 기다렸구나?”

“……아니야. 그냥…….”

루안이 한숨을 쉬었다.

“마음이 놓여서.”

“……가자. 시간이 많이 없어.”

“그래. 아, 그 전에 핀을 돌려줄게.”

루안은 품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아우라는 그것을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가지고 있느라 고생했어.” 

“줄 게 또 있어. 아까 시녀장이 네게 전해 달라고 하더라고. 시녀장의 동생이 네게 주는 거래. 네가 바라던 정보가 다 들어 있을 거라던데.”

“호세가?”

아우라의 눈이 빛났다. 루안은 아우라에게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난 보지 않았어. 보고 싶었지만.”

“내가 보고 말해 줄게.”

아우라는 급히 서류를 뜯었다. 안에는 불에 그을린 낡은 편지가 들어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구나.”

그녀는 편지를 접어 봉투에 넣었다. 루안이 물었다.

“뭐라고 적혀 있어?”

“예상했던 대로야. 핀은 대공과 테인 공작가에 있어. 이제 걱정 없이 움직이기만 하면 되겠어.”

아우라는 봉투를 제 말 안장 아래에 넣었다.

“가자, 루안.”

“그래.”

그들은 루안이 준비해 놓은 로브를 두르고 얼굴을 가렸다. 이제부터 달려야 할 평야 지대는 인적이 드물었다. 그러나 그만큼 두 사람이 눈에 띄기도 쉬웠다.

루안이 아우라를 물끄러미 보았다. 

‘느낌이 이상해. 뭔가 중요한 걸 놓친 것 같은 기분…….’

루안은 말에 올라타려는 아우라를 불렀다.

“아우라.”

“응.”

“편지에 적힌 말은 그게 다야?”

“응, 다야.”

“봉인을 푸는 방법에 대해서는? 네가 원하는 정보가 다 적혀 있을 거라고 했잖아.”

아우라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평야의 수평선을 보던 그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대공이 알고 있을 거래.”

“……정말이야? 나도 편지를 볼 수 있을까? 그러니까, 널 못 믿는 게 아니라…….”

아우라가 루안을 보며 해사하게 웃었다.

“정말이야. 날 믿어, 루안. 네 마력을 반드시 찾아 줄 테니.”

그녀는 가뿐하게 말에 올라타 고삐를 당겼다. 말이 긴 울음을 내뱉었다. 루안은 하는 수 없이 제 말에 올랐다.

“루안, 수트라까지는 얼마나 달려야 하지?”

“하루는 꼬박 걸릴 거야. 황제는 언제쯤 눈치챌 것 같아?”

“모르겠어.”

아우라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사라졌다는 걸 알아채는 시간, 수트라로 갔다는 걸 알아채는 시간…… 아마도 좀 걸리겠지. 설사 모든 걸 다 빨리 눈치챈다고 해도 결론은 하나고.”

“…….”

“미친 듯이 달려서 수트라로 가야 해.”

“……좋아, 가자.”

두 사람은 말을 몰기 시작했다. 말 두 필이 만든 흙먼지가 그들의 뒤를 따랐다.

‘트루 블러드의 희생이라…….’

아우라는 고삐를 꽉 쥐었다.

***

카를이 번쩍 눈을 떴다. 그는 스르륵 몸을 일으켜 옆을 보았다. 침대는 비어 있었다.

옷을 챙겨 입고 산장을 나섰다. 해는 이미 다 져 가고 있었다. 묶여 있는 말은 카를의 것 한 필뿐이었다.

아우라가 혼자 사냥에 나갔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닐 거라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이런 식으로 아우라에게 당한 게 처음은 아니었으므로.

카를은 자리에 앉아 땅을 살폈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말발굽이 서쪽을 향해 나 있었다.

그는 무섭게 생각에 빠져들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누구와’.

‘에밀과 떠난 걸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얼마 전 카를의 집무실에서의 모습만 봐도 그건 아니었다.

“핀은 네가 사과의 의미로 준 거였잖아. 약속을 기억 못 한 건 내 개인적인 실수고. 왜 그런 것 때문에 국민이 피해를 봐야 하지? 그리고 애인?”

아우라가 피식 웃었다.

“무도회 이후로 손 한 번 제대로 잡은 적 없어.”

‘아우라는 어디까지나 핀이 먼저야. 이런 상황에서 애인과 사랑의 도피를 하느라 이런 일을 벌일 리가. 에밀과 함께 핀을 찾으러 갔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남은 건 ‘어디로’.

‘훈트 산의 서쪽은 수도의 반대쪽. 테인 공작가의 영지와는 그리 멀지 않아. 반면 수트라로 가려면 길을 돌아가야 하고. 하지만 눈속임일 수도 있지. 어차피 수트라로 가는 건 먼 길이고, 조금 돌아간다고 해도 시간 차는 그리 나지 않아.’

위기 상황에서 카를은 더 냉철해졌다. 이런 성향 덕분에 데블라에서 몇 번의 위기를 넘긴 그였다.

‘잡을 수 있어. 그래 봤자 제국 안이다. 그리고…….’

그의 생각이 뚝 멈췄다. 별안간 아우라의 목소리가 불쑥 튀어 올랐다.

‘말했잖아. 넌 특별하다고.’

“…….”

카를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니까…… 그걸 잊지 마, 카를.’

이제야 그 말이 이해되는 카를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이기적이기 짝이 없는 말이었는지도.

냉정함을 유지했던 속에서 결국 불길이 확 일었다.

“……하.”

헛웃음이 나왔다.

‘오늘 일을 소중한 추억 삼아 평생을 위로하면서 살라는 건가.’

카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추를 채 다 잠그지 않은 목깃 사이로 바람이 들어왔다. 그는 목덜미를 더듬었다. 아우라가 힘겹게 감싸 안던 느낌이 여실히 남아 있었다.

사실은 모든 걸 기억하고 있던 아우라. 카를을 특별하다고 말하는 아우라. 사랑한다는 말에 미소를 짓던 아우라. 카를을 따뜻하게 껴안던 아우라. 카를을 진심으로 원하고 있던 아우라. 그 모습이 차례대로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 모든 걸 적선하듯 선물하고 떠나가겠다?’

하여간 대단한 여자였다. 박수를 쳐 주고 싶을 만큼 잔인했다.

하지만 아우라는 몰랐을 것이다. 카를이 그 선물을 받으며 뭘 깨달았는지.

그녀가 카를에게 줬던 모든 것. 그건 그 역시 언제나 원하던 것이었고, 상상해 왔던 것보다 황홀하고 환상적이었다.

그래서 그는 더 그녀를 놔줄 수가 없었다.

똑같은 방법으로 그녀에게 당한 자신의 미련함을 자책할 마음은 없었다. 그런 식으로 나오는 아우라를 이길 방도가 있긴 한가? 카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당해 주는 수밖에.

그리고 되찾아오는 수밖에.

‘되풀이해 보자, 아우라. 네가 원하는 만큼 도망쳐 봐.’

카를이 빈주먹을 꽉 쥐었다.

‘나도 얼마든지 계속할 수 있으니까.’

***

두 시간 후.

사냥 경기는 완전히 끝났다. 귀족들이 훈트 산의 남쪽 문으로 모여들었다. 시종들이 그들의 인원과 잡아 온 짐승의 크기를 체크했다.

이제 남은 건 밤늦도록 계속되는 축제였다. 귀족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와중에 조쉬가 테오에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왜 아직 안 오시지?”

“그러게. 사냥제 내내 도통 모습을 보이지도 않으시고 말이야.”

그때 산턱에서 카를의 모습이 보였다. 조쉬와 테오가 얼른 다가갔다.

“오셨습니까?”

“황후 폐하와는 정말 따로 다니셨군요.”

“황후는?”

“아직 안 내려오셨습니다.”

카를은 말이 없었다. 조쉬와 테오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의 말엔 토끼 한 마리 매달려 있지 않았다.

“폐하…… 혹시 무슨 일이라도?”

테오가 넌지시 그를 불렀다. 카를이 말했다.

“두 사람, 잠시 나와 이야기 좀 해.”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그들이 얼른 카를을 따라갔다.

세 사람은 인적 드문 곳에 모였다. 말에서 내린 카를이 나무에 등을 툭 기댔다.

“너희 둘, 지금부터 몰래 기사들을 풀어서 훈트 산을 뒤져.”

“……네?”

조쉬가 되물었다. 귀족들이 아직 다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대체 왜?

“만약 황후를 발견하지 못하면, 도망간 것으로 추정하고 쫓는다.”

“……!”

“도, 도망이요?”

조쉬가 놀라 더듬었다. ‘설마요’와 같은 말은 나오지 않았다. 아우라는 전적이 있었고, 당시 그녀를 보낸 건 조쉬였으니.

테오가 조심스레 물었다.

“혼자 떠나신 겁니까?”

어젯밤 파면된 황후의 애인 에밀. 그리고 오늘 사라진 황후. 누가 봐도 사랑의 도피였다. 그러나 카를이 딱 잘라 말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 잡는 게 중요하지.”

“아…… 네, 폐하.”

“예상 가는 목적지는 두 군데야. 하나는 테인 공작저, 하나는 수트라.”

테인 공작저와 수트라.

두 사람의 입장에선 이유조차 전혀 가늠되지 않았다. 공통점이 있다면 테인과 라이언이 죽은 황태자와 친했다는 것 정도. 하지만 두 사람은 더는 캐묻지 못했다. 그 누구보다도 황후를 잘 아는 건 카를이었으므로.

“조쉬.”

“네.”

“훈트 산 수색이 끝나면 넌 공작가를 확인해. 테인은 그냥 두고 엘리제와 대화를 나눠 봐. 그리고 테오.”

“네, 폐하.”

“만약 공작가에 황후의 흔적이 없다면 내일 아침에 내가 바로 수트라로 간다. 그 준비를 해.”

테오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황제가 직접 움직이는 건 둘째 치더라도 일정이 비효율적이었다.

“왜 아침에 가십니까? 훈트 산과 공작가 수색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지금에야 해가 진 상황이었다. 다들 빠르게만 움직여 준다면 오늘 밤에도 출발할 수 있었다.

카를이 말했다.

“황후가 사라진 걸 사람들이 눈치채게 해선 안 돼. 내가 오늘 축제에서 황후가 몸이 좋지 않아 먼저 들어갔다고 말해 두지. 그리고 내일 아침 회의에서 며칠 요양을 떠났다고 말을 흘려 놔야 해.”

“폐하께서 직접이요?”

“어젯밤 에밀이 쫓겨난 건 곧 알려지게 될 거다. 이런 상황에서 황후에 이어 나까지 말도 없이 사라지면…… 사람들은 사랑의 도피 따위로 입방아를 찧어 대겠지.”

“…….”

“내가 요양이라고 말해 놔야 요양으로 생각할 거다.”

테오가 침을 꿀꺽 삼켰다. 카를의 계획대로라면 아우라가 돌아와도 모든 일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도망을 갔다는 사실마저 사라질 테니까.

카를이 말했다.

“황후는 도망간 적이 없는 거야. 그 어느 곳으로든.”

“아…….”

두 사람은 할 말을 잃었다. 여러 의미로 대단한 부부였다. 황제를 버리고 도망간 황후나, 그런 도망마저도 없던 일로 만드는 황제나.

“어서 움직여.”

카를이 딱 잘라 말했다.

“예, 폐하.”

“예, 폐하.”

두 사람이 얼른 명령을 수행하러 떠났다. 혼자 남겨진 카를은 어두운 산턱을 가만히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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