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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64)화 (64/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64화

아우라는 인적 드문 산길을 골라서 가고 있었다. 주위는 점점 적막해졌다.

간혹 노루나 토끼 같은 동물이 오갔다. 아우라는 석궁조차 꺼내지 않았다. 화살 수는 정해져 있으니 아껴 쓰는 게 좋았다.

‘카를은 아직도 엘리제와 있으려나.’

아우라는 무심결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저었다.

‘왜 자꾸 신경을 쓰는 거야. 같이 있다고 한들 인제 와서 어쩔 건데.’

“가자!”

그녀는 괜히 말을 더 채근해 더 깊은 숲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아는 바에 따르면 서쪽 출입구로 향하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

-꾸이이익…….

‘하필…….’

그녀의 눈앞에 꽤 큰 멧돼지 한 마리가 있었다. 덩치로 보아 다 큰 성체였다.

-히이이잉!

돼지 울음에 놀란 말이 동요했다. 아우라는 말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쉬…… 괜찮아, 괜찮아.”

멧돼지는 당장에라도 달려들 듯 그녀와 대치하고 있었다. 아우라는 멧돼지의 눈을 피하지 않은 채 능숙하게 석궁을 빼 들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처음 해 보는 사냥에 심장이 뛰었다. 그녀는 침착하게 화살을 장전했다. 철컥하고 레버를 밀었다가 빠르게 당겼다.

슉-!

힘차게 날아간 화살이 멧돼지의 목덜미에 맞았다.

-꾸이이이이!

하지만 워낙 큰 놈이기 때문일까. 멧돼지는 힘차게 포효하더니 말을 향해 달려왔다.

“이런!”

아우라가 레버를 장전하던 순간이었다.

-히이이잉!

놀란 말이 앞발을 높이 들었다. 그 바람에 아우라가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악!”

비명이 절로 나왔지만 아파할 새가 없었다. 그녀는 얼른 석궁의 화살을 연달아 쏘았다.

슉! 슉!

-끼이이이이이!

화살 중 하나가 멧돼지의 이마에 정확히 맞았다. 멧돼지는 비틀거리더니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하아, 하아…… 콜록!”

참았던 숨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아우라는 주위를 살폈다. 도망간 줄 알았던 말이 멀지 않은 곳에 서서 아우라를 멀뚱히 보고 있었다.

‘다행이야. 말을 잃으면 곤란할 뻔했는데.’

그녀가 안도하며 자리에서 일어날 때였다.

“아!”

발목이 찌릿하게 아파 왔다. 아마도 낙마할 때 접질린 듯했다. 큰 부상은 아니지만 앞으로의 일정을 소화하려면 붕대라도 감아야 했다.

“하아…….”

‘정말 끝까지 쉬운 일이 없네.’

아우라는 절뚝이며 말에게 다가갔다.

-푸히힝…… 히힝…….

“착하지……. 네가 오늘 잘 달려 줘야 해. 겨우 멧돼지 때문에 겁을 먹으면 곤란하지.”

그녀는 말을 살살 달래며 힘겹게 말에 올랐다.

‘서쪽 출입구 근처에 산장이 있어. 그곳에서 간단하게 치료하고 출발하자.’

산장의 위치는 멀지 않았다. 아우라는 말을 기둥에 묶어 두고 산장으로 들어갔다.

산장 안은 아주 깨끗하고 귀족적으로 화려했다. 음식과 물은 물론이고 휴식을 위한 작은 침대도 있었다. 모두 아우라가 사냥제를 위해 기획한 것들이었다.

아우라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푹신한 침대에 몸이 아래로 꺼져 버리는 것 같았다.

“후우…….”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준비하긴 했는데, 내가 이 산장을 쓰게 될 줄이야.’

응급 상자는 침대를 마주 보는 벽장에 있었다. 하지만 한 번 앉으니 다시 일어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조금만 쉬었다가 치료하자. 일단은 상태부터 좀 보고.’

아우라는 사냥용 가죽 구두를 벗었다. 그새 발목이 부어 있었다.

“하필 이쪽 발이네.”

예전에 뜨거운 커피를 부어 한동안 고생했던 쪽이었다. 메스 하나를 얻기 위해 고민 없이 했던 짓이었다. 그렇게 얻은 메스로 목을 찔러 가며 안센나로 도망갔다.

아우라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어쩜 하나도 안 변했네. 도망치려는 꼴이.’

“카를도 보면 웃겠어.”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 카를 생각이 났다. 자제가 안 될 정도로.

그녀는 몸을 웅크리고 누웠다. 더는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이렇게 있다가 치료를 하고 이곳을 떠날 작정이었다. 오랫동안 준비한 계획대로.

그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아우라가 벌떡 몸을 일으켜 문을 보았다. 다행히 문은 잠겨 있었다.

‘……누군지 몰라도 문이 잠겨 있는 걸 알면 알아서 가겠지.’

아우라는 숨을 죽였다.

“나야.”

카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노크 소리.

똑똑.

그는 마치 안에 아우라가 있다는 걸 아는 것 같았다.

“문 열어.”

‘열면 안 돼.’

지금 카를을 만나는 것만큼 최악의 선택은 없었다. 그를 떼어 놓고 서쪽 문으로 나갈 수 있을까? 못할 건 아니었지만 상당한 공을 들여야 할 것이다. 아우라는 숨소리마저 죽였다.

잠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카를은 그대로 간 것 같았다. 막상 카를이 떠나니 아우라는 어딘지 마음이 무거웠다.

‘정말 끝인 거야. 정말…….’

똑똑.

“아우라.”

세 번째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아우라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지막…… 마지막으로 한 번만 보는 거야. 잘 내보낼 수 있어.’

그녀는 절뚝이며 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문고리를 잡고는 심호흡을 했다.

벌컥.

그녀가 문을 열었다.

“카를?”

아무렇지 않게 그를 부르자 그가 그녀를 물끄러미 보았다. 정확히는 그녀의 발목을.

“쉬고 싶어 온 거면 내가 자리를 비켜 줄게. 산장은 많으니까.”

카를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산장으로 들어왔다.

철컥.

그는 문을 다시 잠가 버렸다.

“……카를?”

그 순간이었다. 카를이 갑자기 아우라를 안아 들었다.

“카를! 왜 그래?”

그는 성큼성큼 침대로 가서 그녀를 앉혔다. 그리고 벽장을 열어 응급 상자를 찾아왔다. 그 모습에 아우라는 할 말을 잃었다.

‘어, 어떻게 알았지?’

카를은 의자를 가져오더니 아우라의 앞에 앉았다. 그녀의 다리를 멋대로 가져가 신발을 벗기고 발을 제 무릎에 올렸다. 부은 발목이 그대로 드러났다.

“하아…… 정말…….”

카를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파트너가 필요 없으면 신경 쓰이게 하질 말던가.”

“……신경 안 쓰면 되잖아.”

“나도 그러고 싶은데, 이 꼴을 좀 봐.”

카를은 응급 상자에서 연고를 꺼냈다. 연고를 손으로 듬뿍 퍼 그녀의 발목에 발랐다. 화한 느낌에 아우라는 통증이 점차 가라앉는 걸 느꼈다.

“멧돼지를 잡을 때만 해도 혼자 두려고 했어. 내가 없어도 될 것 같아서. 그런데 네가 다리를 절잖아.”

아니나 다를까, 그는 그녀를 따라왔던 모양이다. 멧돼지를 잡을 때부터라면 꽤 오래.

‘……엘리제와 간 줄 알았는데.’

한편으로는 이런 안도감도 들었다.

‘서쪽 문으로 바로 갔으면 발각됐겠구나. 다행이야.’

“낙마할 때 다친 거지?”

카를이 물었다. 아우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붕대를 꺼내어 그 끝을 이로 물었다. 감겨 있던 붕대를 푸는 행동이 능숙했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신경이 쓰여. 여유를 가져 보려고 해도 다시 제자리야.”

그녀의 발에 붕대가 빠르게, 그러나 차곡차곡 감겨 왔다.

“눈을 못 떼게 하려고 작정을 한 거 같아, 네가.”

순간 카를이 붕대를 힘주어 당겼다.

“아.”

“아파?”

아우라의 신음에 그가 놀라 물었다.

“내가 너무 세게 감았어?”

“아니…… 괜찮아. 그대로 묶으면 될 것 같아.”

“아프면 말해. 다시 감아 줄게.”

아우라는 문득 대관식의 아침을 떠올렸다. 카를은 그때도 이렇게 발에 붕대를 감아 줬다. 지금처럼 좁아진 미간과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때 아우라는 카를을 속을 알 수 없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마음을 너무나도 잘 알 것 같았고, 그래서 더 긴장해야 했다.

카를이 말했다.

“산에서 나가자. 의사에게 가야 해.”

“오래간만에 나왔는데, 좀 더 즐기고 싶어.”

“그럼 나랑 같이 있다가 가. 사냥은 무리니까 여기에 있다가.”

“……싫어. 나 혼자 있을래.”

“자꾸 그런 식으로 나오면 지금 들고 내려갈 수밖에 없어.”

농담 같지는 않았다. 아우라는 고민스러웠다. 어떻게든 카를을 떨어뜨려 놔야 했다.

‘이런 고민을 할 줄 알았으면서 문을 열어 준 내가 문제지.’

카를이 붕대의 매듭을 감을 때였다. 그는 문득 뭔가를 깨달은 듯했다.

“이 발, 대관식 때 다쳤던 쪽 아니야?”

“맞아.”

“……정말이지.”

그가 못 살겠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아우라의 발등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디에 입을 맞추는 거야.’

카를이 양손으로 아우라의 발등을 감쌌다.

“아프지 마, 아우라.”

순간 아우라의 가슴이 쿵 내려앉는 듯했다. 이건 불가항력이었다. 아무리 외면하려 해도 그의 진심이 멋대로 아우라에게 스며들어 왔다.

‘……안 돼. 그만해.’

쿵, 쿵, 쿵, 쿵…….

심장이 멋대로 뛰었다. 아우라는 주먹을 꽉 쥐었다.

어젯밤, 루안이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왜 자꾸 외면하려 해?’

‘그만해.’

‘한 번만이라도 네 마음을 제대로-’

‘내 마음을 제대로 보면…… 내가 이럴까 봐.’

아우라는 자신이 모래성 같다고 느꼈다. 아무리 단단하게 쌓아 놔도 결국 뭉그러지고 마는 모래성. 한 부분이 무너지면 모든 게 속절없이 허물어질 거였다. 지금처럼.

“카를.”

“왜.”

“……사실, 나도 기억하고 있어.”

“……뭐?”

“그날 너는 오전에 검술 훈련이 있었고, 바쁜 와중에 목욕을 하고 도서관에 왔어. 그래서 네겐 약간의 삼나무 향이 났어. 머리는 여기저기 뻗쳐 있었고.”

아우라가 카를의 귓바퀴 위쪽에 살짝 손을 댔다.

“특히 이 부분이 유난히 뻗쳐 있었어. 그리고 흰 셔츠에 남색 바지를 입고 있었고…….”

카를의 눈이 점점 커졌다. 아우라의 손끝이 이번에는 카를의 팔목으로 왔다.

“그새 몸이 또 자라서 셔츠의 소매가 이쯤까지 왔어.”

손끝이 그대로 내려와 손등에 도착했다.

“훈련을 강하게 하느라 상처가 많았지. 여기, 손등.”

그다음에는 관자놀이였다.

“관자놀이.”

다음엔 목덜미.

“목 왼쪽.”

그리고 입술 옆.

“여기도. 다 상처가 있었어.”

아우라의 손이 멈칫했다.

“입안에도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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