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63화
미나는 눈이 빨갛게 충혈된 채 복도를 걷고 있었다. 아우라가 떠난다니. 너무 갑작스럽고, 한편으론 서운하기까지 했다.
‘계속 모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사람들은 아우라를 무서워하고 어려워했다. 그러나 곁에서 본 아우라는 달랐다. 상냥하진 않을지언정 알게 모르게 사람들을 아꼈다. 아랫사람이라고 함부로 대하는 일도 없었다.
그렇게 미나가 터덜터덜 걸어갈 때였다.
“누나!”
호세가 저 멀리에서 달려왔다.
“호세!”
미나가 놀라서 그에게 다가갔다.
“너, 너 여길 어떻게 들어왔어?”
“황후 폐하께서 저번에 황궁 출입증을 주셨잖아. 그걸로 들어왔지.”
‘아, 그랬구나.’
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갑자기 호세를 쏘아보더니 등을 퍽퍽 때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왜 이렇게 연락이 없었어! 황후 폐하께서 얼마나 기다리셨는지 알아?!”
“아, 아! 아니, 그 추운 곳에 다녀왔는데 걱정부터 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어휴, 정말…… 내가 너 때문에……!”
“그리고 몇 주 전에 편지 보냈잖아.”
“……편지?”
“못 받았어?”
“전혀.”
호세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이내 빙긋 웃었다.
“다행이네. 이걸 가져와서. 누나, 이걸 황후 폐하께 전달해 줘.”
호세가 가방에서 한 부의 서류 봉투를 꺼냈다.
“이게 뭔데?”
“음…… 편지 내용의 원본이랄까? 황후 폐하께서 내가 드린 정보의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실까 봐 가져와 봤어. 꼭 전해 드려.”
“그래. 넌 누나 방에 가 있어. 난 어딜 좀 들렀다 갈 테니까.”
“알았어.”
호세가 뒤돌아 유유히 걸어갔다. 임무를 마쳤다고 생각했는지 발걸음이 가벼웠다.
미나가 생각했다.
‘지금쯤 폐하는 출발하셨을 거야. 어차피 에밀 님과 만나실 테니까 에밀 님께 전해 드려야겠어.’
***
루안은 황궁 북문 근처 담벼락에 붙어 서 있었다.
‘오늘 황궁을 떠날 줄은 알았지만, 이런 식일 줄이야.’
어젯밤 응접실로 돌아온 카를은 루안에게 말했다.
‘넌 파면이다. 당장 황궁에서 꺼져.’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루안은 제정신을 차렸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자신이 얼마나 무모한 짓을 저질렀는지.
‘내가 한 짓을…… 황제가 말했겠지. 말하지 않을 리가.’
아우라가 실망할 건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더 시급한 문제는 함께 황궁을 나가자던 계획이었다. 어쩌면 아우라는 여기서 루안을 놓고 혼자 떠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루안이 초조하게 기별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에밀 님.”
담장 안쪽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시녀장님?”
“네, 접니다.”
“황후 폐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만나야 할 곳에서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루안은 겨우 한시름 놓았다. 어쨌건 계획은 그대로 진행되는 듯했다.
“에밀 님, 받으십시오.”
“네?”
담장 너머로 작은 주머니가 날아왔다. 루안이 얼른 그것을 받았다.
“중요한 물건이라고 하셨습니다.”
“……뭔지 알 것 같습니다. 제가 잘 가지고 있겠습니다.”
“또 이건 제 동생 호세가 황후 폐하께 드리는 정보입니다. 전해 주십시오.”
이번에는 서류 봉투 하나가 담장 위를 날아왔다. 루안은 이번에도 날렵하게 그것을 잡았다.
‘호세의 서류라면…… 핀에 관한 정보인가.’
“그 안에 황후 폐하께서 원하시는 정보가 모두 담겨 있다고 합니다. 그럼 몸조심하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시녀장님.”
“저희 폐하를…… 잘 부탁드립니다.”
미나의 목소리가 물기에 젖어 있었다. 이윽고 그녀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루안이 서류를 물끄러미 보았다.
핀에 관한 새로운 정보가 궁금하긴 했다. 그러나 서류는 풀칠이 되어 봉해져 있었다. 뜯으면 티가 날 것이다.
‘……참아야겠지.’
루안은 애써 궁금증을 누르고 바쁜 걸음을 옮겼다.
아우라와 약속한 그곳, 훈트 산 서쪽 입구로 가야 했다.
***
훈트 산으로 가는 마차 안.
아우라와 카를은 마주 앉아 있었다. 카를은 덤덤하게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아우라에게 말했다.
“생각보다 괜찮아 보이네.”
“뭐가?”
“네 애인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는데 말이야. 내게 한마디 따져 대지도 않고.”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수족처럼 달고 다녔던 루안이었으니.
아우라가 창틀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괬다.
“안 그래도 그만 보려고 했어. 좀 질려서.”
카를이 피식 웃었다.
“질린다라…….”
“넌 뭔가에 질려 본 적 없어?”
“질리려면 뭔가를 좋아해야 하잖아.”
“그렇지.”
“뭔가를 좋아해 본 경험 자체가 희귀해서.”
카를은 턱을 괜 채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여름날의 강한 햇빛에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한번 좋아하게 된 건 질려 본 적 없어.”
덜컹, 덜컹…….
마차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만이 마차 안을 채웠다. 창밖으로 작게 훈트 산이 보였다.
‘이제 머지않아 마차에서 내려야겠군.’
카를과 단둘이 있는 시간은 이게 끝일 것이다. 아우라는 그게 아쉬우면서도 긴장이 됐다. 이 마차에서 내리면 정말 모든 계획이 실행될 테니까.
“아우라.”
“응.”
“사냥제 파트너, 정말 필요 없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밖에서 말이 한 번 크게 울더니 마차가 멈췄다.
아우라가 웃으며 대답했다.
“말했잖아. 혼자 다니겠다고.”
“……그래, 그럼.”
카를은 파트너에 대해 더 말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마차에서 내렸다. 기사들이 두 사람의 말을 가져왔다. 아우라는 석궁을 등에 메고 자신의 말에 올랐다.
귀족 여인 중에 사냥제에 참여한 이는 몇 없었다. 부인과 영애들은 대부분 잔디밭에서 티타임을 가질 계획이었다.
그래서인지 말에 오른 여인들은 눈에 띄었다. 아우라가 가장 그랬고, 엘리제 역시 쉽게 눈에 들어왔다. 엘리제 곁에는 테인 공작도 함께였다.
“지금부터 사냥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황제군들이 큰 소리로 외치며 귀족을 사이를 다녔다. 부산스럽던 귀족들이 아우라와 카를의 곁에 모였다.
진행을 맡은 테오가 유려하게 말을 몰며 앞에 나섰다.
“사냥제의 첫 순서는 사냥 경기입니다! 아시다시피 훈트 산은 상당히 넓습니다. 말을 위협할 만한 맹수는 없으나 간혹 멧돼지가 나오니 조심하십시오.”
테오는 계속 외쳤다.
“사냥 경기는 해가 질 때 끝납니다! 뿔 나팔 소리가 들려오면 남쪽 출구로 나오십시오. 혹시 길을 잃으신 경우엔 나눠 드린 폭죽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그럼 저희가 모시고 돌아오겠습니다.”
그렇게 대략적인 안내가 끝이 났다. 조쉬가 시작을 알리는 뿔 나팔을 힘껏 불었다. 많은 귀족이 힘차게 말을 몰아 달려갔다.
테인 공작은 엘리제를 끌고 카를에게 다가섰다. 그는 카를에게 수다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카를은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지만.
멀리서 그를 보고 있던 아우라가 피식 웃었다.
‘심드렁하기는.’
마지막으로 저런 표정을 보고 떠나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때였다. 카를과 엘리제가 함께 숲으로 들어갔다. 테인 공작은 그런 그들을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상관없잖아, 이제는.’
아우라는 말고삐를 꽉 잡았다. 씁쓸한 마음을 애써서 달래며 서쪽을 향해 말을 몰았다. 그리고 그 순간, 카를이 뒤를 돌아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
테인 공작을 떼어 놓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는 카를에게 다짜고짜 엘리제 칭찬을 퍼부었다. 같이 있던 엘리제의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카를은 듣다못해 결국 입을 열었다.
“테인 공작.”
“네, 폐하.”
“내가 엘리제와 단둘이 할 이야기가 좀 있는데.”
“아, 그렇습니까? 아…… 하하하……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자리를 비켜 드리겠습니다.”
테인 공작이 그제야 어딘지 징그러운 웃음을 지으며 물러났다. 카를과 엘리제와 밀회를 나누고 싶다는 말로 받아들인 듯했다. 엘리제가 그런 그를 보며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두 사람은 숲으로 들어갔다. 주위 인적이 드물어지자 엘리제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폐하.”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군. 공작저에서는 별일 없나?”
“감시를 받고 있긴 합니다. 제게 오는 편지도 언제나 뜯어져 있고요.”
“어지간히도 경계하는군.”
그럴 법도 했다. 엘리제는 어려서부터 영지 관리의 실무를 맡았으나 테인 공작이 작위를 이어받으며 엘리제의 일을 모두 빼앗았다. 하지만 영지를 잘 다루지 못해 영지민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테인 공작도 아는 것이지. 엘리제가 작위를 이어받을 명분만 있으면 영지민부터가 가만히 있지 않으리란 걸.’
카를이 본론을 꺼냈다.
“조사는 계속 진행되고 있어. 유언장을 가지고 도망간 집사가 황태자군에게 쫓긴 정황이 있고.”
“역시…….”
엘리제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술을 물었다.
“수도를 떠난 건 확실해. 아마도 먼 시골로 갔겠지. 테인 공작이 두려워서 몸을 사리고 있을 확률이 커. 살아 있다면.”
“살아 있을 거예요. 삼촌은 입이 가벼운 편이라 죽었다면 어떻게든 제게 티를 내서 절 절망하게 했을 테니까요.”
“그럼 희망을 품어 보지. 아무쪼록 테인 공작이 얌전히 있도록 구워삶아 봐. 적어도 집사의 소재지를 파악할 때까진.”
“네, 알겠습니다.”
엘리제는 그렇게 말하곤 말머리를 뒤로 돌렸다.
“그럼 저는 삼촌께 가야겠습니다.”
“나와 한 이야기를 물을 텐데. 뭐라고 할 생각이지?”
“……알 듯 말 듯 한 기류가 오고 가고, 말이 아니라 눈빛으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고 하죠.”
엘리제가 지친다는 듯 말했다. 애매하지만 그럴듯하게 둘러댄다는 뜻이었다.
카를이 피식 웃었다.
‘보기보다 말재간이 좋은 듯하군. 여우 같은 테인이 넘어간 걸 보니.’
엘리제는 그렇게 떠났다. 혼자 남은 카를은 서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럼 찾으러 가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