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62화
아우라는 루안과 술을 마셔 본 적이 없었다. 술은 둘째 치고 이런 식으로 갑작스러운 제안을 하는 경우도 드물었다.
‘루안이 아무 이유 없이 이럴 리가 없어.’
“좋아. 응접실에서 만나.”
잠시 후, 두 사람은 개방된 응접실에서 만났다. 그곳은 황족이 애인을 들일 수 있는 마지노선이었다. 야밤이라는 점에서 좀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이 와인이 순하진 않아요. 조금만 드세요.”
루안이 잔에 와인을 따랐다. 아우라가 먼저 한 모금 마셔 보았다. 상당히 독했다.
“이런 건 어디서 났어?”
“식당에서 훔쳤어요.”
아우라는 웃어넘겼지만 루안이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정말 훔쳤을 리는 없고. 일부러 독한 걸 산 걸까.’
“내일이야, 아우라. 내일이면 여길 나가야 해.”
루안이 속삭이듯 말했다.
“그렇지.”
“여길 나가서 핀을 찾고, 봉인을 풀면…… 넌 제니아를 통솔하겠지?”
아우라가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해. 한동안은 카를이 날 잡으려고 할 테니까. 조용히 살고 싶어. 지도자는 제니아에서 다시 뽑아야 할 거야.”
“나는?”
“응?”
“……나는 계속 네 옆에 있어도 돼?”
아우라는 루안의 눈을 피하며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알싸했다.
“어쩌면 나는 평생 도망자로 살지도 몰라. 더는 왕녀로 살 수도 없어. 그러니 너도 날 보호할 의무가 없고.”
“왕녀로서 핀의 봉인을 해제하려는 거잖아. 그럼 내겐 그 이후에도 널 지킬 의무가 있어.”
그는 ‘의무’라고 했지만 사실은 ‘마음’이었다. 정확히는 아우라를 좋아하는 마음. 그러나 아우라는 그의 마음을 받아 줄 수 없었다. 그녀에게 그는 어디까지나 친구였다.
“루안, 네가 마이어가의 아들이라 날 돕는 거라면 나는 너와 함께할 거야. 하지만 그 외의 이유가 있다면…….”
너와 함께할 수 없어.
하지만 아우라는 차마 그 말까지 뱉진 못했다. 어떻게 루안에게 그리 잔인하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루안, 그만하자. 지금은 핀만을 생각해야 해. 나도 그러려고 노력하고 있고…….”
“무슨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아우라는 뭔가를 대답하려다가 멈칫했다.
“아우라 너…….”
루안은 아랫입술을 한 번 물었다. 그러고는 체념 조로 물었다.
“황제를 좋아해?”
아우라는 눈을 크게 뜨고 루안을 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래 보여서 하는 말이야.”
“세상에, 루안. 아니야. 그럼 내가 황궁을 떠나려 할 리 없잖아.”
“왕녀로서의 의무와 누굴 좋아하는 네 마음은 다를 수도 있지.”
“…….”
“넌 네 마음보다 의무를 선택한 것일 수도 있고.”
아우라는 대화를 피하듯 와인 잔을 비웠다. 그리고 잔을 테이블에 탁 하고 내려놓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너는 언제나 그가 원하는 걸 주고 있어. 너는 느끼지 못하고 있겠지만.”
루안은 증거를 대라면 수없이 댈 수 있었다.
그녀가 카를의 불면을 낫게 해 준다는 소문. 그녀의 몸에 자연스레 닿던 카를의 손길. 그 손길에 그녀가 보이던 긴장감. 이따금 카를에게 보이던 미소. 아침에 그녀의 방에서 나오던 카를.
“아우라.”
“…….”
“네가 주는 모든 것들이 그를 자극하고, 끌어들이고, 옭아매고 있어.”
“그만하자, 루안. 너 취했어.”
아우라가 그만하라는 듯 일어나려 했다. 루안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왜 자꾸 외면하려 해?”
“그만해.”
“한 번만이라도 네 마음을 제대로-”
“지금은 마음을 볼 때가 아니라 비워야 할 때니까.”
아우라가 딱 잘라 말했다.
“……그러니 내 마음을 복잡하게 하지 마.”
그녀는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취기가 오르는지 그녀는 눈을 살짝 감았다.
루안이 주먹을 꽉 쥐었다.
원하는 걸 준다는 말. 아우라는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되묻지 않았다. 그녀 역시 무의식적으로 안다는 뜻이었다. 그 점은 루안을 절망스럽게 했고 이성을 흐리게 만들었다.
‘왜? 왜 나는 안 되는 거지? 왜. 그를 두고 떠나는 이 상황에서마저도.’
루안이 아랫입술을 가만히 물었다. 아우라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아우라에게 다가갔다.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멈추기가 어려웠다. 아우라가 눈을 떠 자신을 말려 주길 바라면서도 눈을 뜨지 않길 바랐다.
루안과 아우라가 닿을 듯 가까워졌을 때였다.
“당장 떨어져.”
카를의 목소리에 아우라가 눈을 번쩍 떴다. 순식간에 다가온 카를이 루안의 어깨를 소파로 억세게 밀었다.
“분명히 말했을 텐데. 더는 다가가지 말라고.”
카를의 팔이 루안의 목을 세게 눌렀다.
“……큭.”
카를은 루안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러나 루안도 지지 않았다. 그도 더는 물러나기 싫은 듯 카를을 쏘아보았다.
“카를! 그만해!”
아우라가 카를의 팔을 잡았다. 카를의 매서운 시선이 아우라를 향했다.
“카를…….”
“조용히 해.”
카를은 루안을 놓고는 아우라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응접실을 나갔다.
아우라는 속수무책으로 끌려갔다. 카를이 왜 저렇게 화를 내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시간에 루안을 만나서 그런 건가. 하지만 개방된 응접실이었고…… 우리 대화가 들리지도 않았을 텐데.’
그는 황후의 방으로 그녀를 데려왔다. 그리고 그녀를 가뿐히 들어 침대에 눕혔다. 그는 정말이지 잔뜩 화가 나 있었다. 아우라가 말을 붙이기 무서울 정도로.
“카를, 대체…….”
아우라가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카를이 그녀의 어깨를 눌러 다시 눕혔다.
“일어나지 마. 이대로 자. 오늘은 더는 안 돼.”
“뭐가 안 된다는 거야. 난 그냥 에밀과 와인 한 잔 마셨을 뿐이야.”
“위험하게.”
카를이 불쑥 눈앞으로 다가왔다. 아우라가 움찔 놀랐다.
“아무리 온순한 놈이라도 남자잖아. 야밤에 그 자식 앞에서 그렇게 술에 취해 있으면 어떡해.”
그는 화를 내곤 있지만 탓하려는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걱정……하는 건가?’
“취……하진 않았어. 잠든 것도 아니고. 잠깐 눈을 감고 있던 거야.”
“그 잠깐 눈 감고 있던 그 사이에 그 자식이 네게 입을 맞추려고 했어.”
“설마 에밀이-”
“말했잖아. 아무리 온순해 보여도 남자라고.”
사실이라면 할 말이 없었다. 선을 넘은 건 루안이고, 카를은 화를 낼 만했다.
“……미안.”
“…….”
“내가 조심했어야 하는데.”
“그래. 네가 눈만 감아도 미쳐 날뛰는 놈이 둘이나 있으니 앞으론 조심하는 게 좋겠어.”
나머지 하나가 누굴 의미하는지는 뻔했다. 아우라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카를이 이불을 아우라의 목덜미까지 덮어 주었다.
“어서 자. 내일 할 일이 많아.”
“에밀은? 에밀은 어쩌게?”
“네 애인은 기사직에서 파면이야. 여러모로 아쉽겠어. 이대로 이별해야 해서.”
카를이 빈정거렸다. 그 말인즉슨, 궁 밖으로 쫓아낸단 뜻이었다.
“안센나에 다녀온 공로를 인정해서 목숨은 부지한 줄 알아.”
그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방을 나가 버렸다.
쾅.
그의 마음을 대변하듯 거칠게 문이 닫혔다. 아우라는 닫힌 문을 허망하게 보다가 얼굴을 감쌌다.
“……하아…….”
궁을 나가기 직전까지 정말 일이 끊이질 않았다.
***
사냥제의 아침이 밝았다. 아우라는 거울 앞에서 승마복 재킷을 걸쳤다. 사냥제를 위해 새롭게 맞춘 옷이었다. 그녀는 시녀에게 물었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이제 곧 출발하셔야 합니다.”
“……조금만 더 있다가 출발할게.”
시녀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우라는 지금 바로 나가도 손색이 없는 모습이었다.
벌컥!
그때 미나가 아우라의 방으로 들어섰다. 얼마나 급한지 노크하는 것조차 잊은 듯했다.
“폐하, 폐하. 전할 말이 있습니다.”
아우라는 시녀들에게 눈짓했다. 시녀들이 얼른 밖으로 나갔다. 아우라는 미나에게 물었다.
“에밀을 만났어?”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하아……. 일이 좀 있었어.”
어제 새벽 루안은 급히 궁을 나가야 했다. 아우라는 루안이 어떻게든 자신과 연락을 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우라는 바로 그걸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지금 에밀은 어디 있지?”
“황궁 북문 근처에서 은신하고 있습니다. 에밀이 북문의 병사를 매수해서 제게 알렸습니다.”
“당황하지 않고 움직여 주는구나, 다행히.”
‘그 잠깐 눈 감고 있던 그 사이에 그 자식이 네게 입을 맞추려고 했어.’
카를이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던 아우라였다. 루안이 그런 짓을 했다고는 상상이 잘 안 갔다.
‘술기운이었을까? 뭐가 됐건 모른 척해야겠지. 루안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아우라는 마음을 다잡았다.
‘오늘, 황궁을 나가는 거야. 실수 없이.’
“미나, 내 말 잘 들어.”
아우라는 콘솔을 열어 주머니를 가져왔다. 그 안엔 핀과 돈이 들어 있었다.
“북문의 에밀에게 이걸 가져다줘. 그리고 이따가 약속된 곳에서 만나자고 전해 줘.”
“아…… 예, 알겠습니다.”
미나는 얼떨떨한 채로 주머니를 받았다. 아우라의 말이 심상치 않았다. 루안이 하루아침에 쫓겨난 것도 그랬다. 마치 루안과 사랑의 도피라도 하려는 것 같지 않은가.
아우라는 그런 미나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미나를 가만히 안아 주었다.
“미나, 잘 들어. 난 오늘 궁을 떠날 거야.”
“폐, 폐하! 그게 정말이십니까?”
“그래. 네가 생각하는 그런 낭만적인 이유 때문은 아니야. 말은 해 줄 수 없지만.”
“그럼 왜……! 어, 어디로 가시는지라도 알려 주세요.”
아무리 미나라도 말해 줄 수 없었다. 아니, 미나는 모르는 편이 나았다. 많이 알수록 많은 이들의 표적이 될 테니.
“기회가 되는 대로 황궁을 나가.”
아우라는 끼고 있던 반지를 빼서 미나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제 그녀가 가진 장신구는 결혼반지뿐이었다. 미나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아우라만 바라보았다.
“어서 가, 에밀에게로. 중요한 물건이니 절대 잃어버리지 말고.”
“폐하…… 정말로……?”
“어서.”
“……네…… 알겠습니다.”
미나는 마지못해서 방을 나갔다. 혼자 남은 아우라는 문득 협탁을 보았다.
아침에야 발견했던 와인병와 푸른 꽃을 엮은 꽃다발. 어젯밤 카를은 저것을 주러 아우라를 찾아왔던 것 같았다.
아우라는 애써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침 햇살이 시릴 만큼 눈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