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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61)화 (61/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61화

조쉬는 품에서 편지를 꺼내 카를에게 건넸다. 카를이 편지를 꺼내 읽어 보았다.

‘저번 편지에서 봤던 필체. H인가.’

「경애하는 황후 폐하. 편지가 늦어 죄송합니다. 율리우스의 저택을 아무리 뒤져 봐도 그 이상의 정보가 나오지 않아 고심하던 차였습니다. 핀에 대해 알려 드리는 편지는 이것이 마지막이 될 듯합니다. 너무나 운 좋게 중요한 단서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

카를은 얼른 뒤를 읽어 보았다.

「율리우스가 황태자에게 보내려던 연습용 편지가 화로에 반쯤 타 있더군요. 미처 타지 못한 편지에 중요한 정보가 있었습니다.」

“설마…….”

「폐하. 핀을 가진 이는 황태자와 테인 공작, 라이언 대공입니다. 또한 그 봉인을 푸는 방법은 트루 블러드의 희생입니다. 아마도 목숨을 바친다는 뜻이겠지요.」

“제길.”

카를이 욕을 읊조렸다. 이 정보원은 정말이지 제법이었다. 이어서 편지를 읽던 그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건 그 집의 집사에게서 들은 말입니다만, 그는 핀을 만들고 남은 재료로 공명석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완성된 핀에 가까이 갈수록 반응하는, 핀의 위치를 추적하는 도구죠. 하지만 몇 번의 실패 끝에 포기했다고 했습니다.」

“……공명석?”

카를이 본 율리우스의 편지에도 공명석 이야기는 없었다. 황좌에 올라 황궁을 싹 뒤집어엎었을 때도 그런 물건은 찾지 못했고.

‘핀이 다 모였을 때 어떻게든 그 위치를 추적하려고 했던 거군. 정말 만들었다면 골치 좀 아팠겠어.’

「모쪼록 이 모든 것들이 폐하께 필요한 정보이기를 바랍니다. 불러 주신다면 황궁에서 뵙겠습니다.

-황후 폐하를 경애하는 H.」

카를은 편지를 접었다.

“……폐하?”

조쉬가 슬쩍 말을 붙였다. 카를은 한참이나 생각에 빠져 있다가 입을 열었다.

“조쉬.”

“네, 폐하.”

“시녀장의 가족과 지인들을 모두 조사해. 그중에 수트라 너머로 간 자가 있으면 바로 잡아들여서 데려와.”

“아, 알겠습니다. 편지는…….”

“편지는 내가 처리해.”

카를은 편지를 주머니에 넣었다. 직접 불태울 생각이었다. 아무리 조쉬라도 이런 물건을 맡길 순 없었다.

***

아우라는 루안에게 석궁 쏘는 법을 배우기로 했다. 비 때문에 한참이나 미뤄 둔 일이었다.

두 사람을 석궁을 하나씩 들고 연무장으로 갔다. 갑작스러운 황후의 등장에 병사들이 당황했지만 사냥제가 코앞이라 이내 그러려니 하며 각자 할 일을 했다.

“제가 먼저 시범을 보여 드릴게요.”

“그래, 그게 좋겠어.”

루안은 왼손으로 석궁의 몸체를 잡고 오른손으로 레버를 밀었다.

철컥.

화살이 하나 내려와 장전이 됐다. 루안이 레버를 당기자 시위가 풀린 화살이 날아갔다.

퉁!

화살은 정확히 나무 표적의 중앙에 박혔다. 아우라가 웃으며 외쳤다.

“대단해!”

“어렵지 않아요. 해 보십시오.”

“좋아. 해 보는 거야.”

아우라가 기세 좋게 자세를 잡았다. 눈썰미가 좋아 일단 흉내는 금방 냈다. 레버를 밀고 푸는 것까진 어렵지 않았다.

슉-

화살이 날아갔다.

툭…….

바닥으로.

아우라는 몹시 민망해했다.

“……표적에 닿지도 못했네.”

“겨냥을 잘하셔야 합니다. 폐하의 시야에서 화살의 끝이 표적보다 조금 더 올라가야 해요.”

“음…… 무슨 말인지 알겠어. 좋아!”

아우라가 호기롭게 다시 레버를 밀었다. 그리고 석궁을 좀 더 위로 들었다.

슉-

화살이 날아갔다.

하늘로 높이.

날아간 화살이 나뭇가지에 툭 걸렸다. 화살이 힘도 제대로 받지 못한 것이다.

아우라가 얼굴을 찌푸렸다. 약이 오른 그녀는 루안에게 말했다.

“다시 보여 줘, 시범.”

“아, 네. 알겠습니다.”

슉- 퉁!

루안은 또 쉽게 표적을 맞혔다. 아우라가 이어 쏴 봤지만 역시 화살은 제멋대로 날아갔다.

“이거 뜻대로 안 되네. 대체 문제가 뭐지…….”

아우라가 석궁을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석궁은 당연히 멀쩡했다.

“화살을 쏘실 때 몸이 흔들리십니다. 다리에 힘을 잘 주시고 팔꿈치를 최대한 뒤로 당기세요.”

사실 루안은 이 말을 여러 번 했다. 하지만 무예를 말로만 배우는 건 한계가 있었다. 직접 교정해 주면 빨랐겠으나 그럴 순 없었다. 무도회장도 아닌 곳에서 몸이 닿을 수야 없는 일이었다.

“……폐하, 잠시 멈추셔야 할 것 같습니다.”

미나가 조심스레 아우라를 불렀다. 심상치 않은 느낌에 아우라가 주위를 살폈다.

언제부터였을까. 카를이 팔짱을 끼고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검술 연습 중이었는지 편한 차림이었다.

“구경할 만한 실력은 아닌데.”

아우라가 민망함을 숨기곤 말했다. 카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네.”

막상 수긍을 당하니 아우라는 묘하게 짜증이 났다.

“그럼 가.”

아우라는 다시 레버를 밀고 표적을 겨냥했다.

사박, 사박.

잔디 밟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아우라가 슬쩍 눈을 돌리자 어느새 카를이 옆에 다가와 있었다.

“가라니까.”

“팔을 쫙 펴야 힘이 들어가지. 아무리 화살 쏘는 기계라도 제대로 된 힘은 필요해.”

카를이 아우라의 왼팔을 잡고 쫙 펼쳤다.

“왜, 왜 이래?”

그녀가 놀라거나 말거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왼쪽 팔꿈치를 받쳤다.

“레버를 당기는 팔은…….”

이번에는 오른팔이었다. 카를은 아우라의 팔꿈치를 잡고 부드럽게 당겼다.

“조금 더 뒤로.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한 뼘 더.”

“……이, 이렇게?”

“팔을 움직이라니까 등은 왜 따라와.”

그는 가볍게 타박하며 손바닥으로 아우라의 등을 고정했다. 아우라는 그제야 등을 긴장하며 당겼다.

그의 손길에 맞춰 쓰지 않은 근육들이 하나씩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그게 너무 신기해서 아우라는 그를 흘긋 보았다.

“왜 나를 봐? 표적을 봐야지.”

그녀는 얼른 시선을 표적에 뒀다. 뭔가 창피한 기분이었다. 훔쳐본 것도 아닌데.

“허리는 좀 더 바닥에 고정한다는 느낌으로. 너, 힘이 없어서 화살 나갈 때마다 몸 밀리는 거 알아?”

그는 거리낌 없이 아우라의 허리를 감았다. 아우라는 머리를 비우고 표적을 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의식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온기가 넘치는 큰 손. 불과 얼마 전에 이 손이 그녀의 몸에 불을 지른 듯했으니.

카를이 슬쩍 루안을 보았다. 루안은 무표정하게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 카를이 아우라에게 살짝 몸을 기울이고 말했다.

“잡아 줄 테니까 쏴 봐. 석궁을 조금만 더 위로…… 좋아. 지금.”

슉-! 텅!

화살이 표적에 맞았다. 정중앙은 아니었지만 괜찮은 위치였다.

“……맞췄다!”

아우라는 자기도 모르게 해사하게 웃으며 카를에게 말했다.

“잘하네.”

카를이 그녀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아우라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곤 한 걸음 떨어졌다.

“……가르쳐 줘서 고맙지만 이제 혼자 할 수 있어.”

“다음에도 뭔가 잘 안 되면 선생을 바꿔 봐.”

“에밀은 잘 가르쳐 주고 있었어, 카를.”

“그러시겠지.”

카를이 유유히 그들 곁을 떠나갔다. 아우라는 그의 뒷모습을 잠시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상념에서 애써 빠져나오듯 고개를 저었다.

뒷짐을 지고 있던 루안이 제 양손을 꽉 마주 잡았다.

***

사냥제의 전날 밤이었다. 카를은 늦은 업무를 마치고 침실에 들어섰다. 내일은 사냥제를 위해 아침 일찍 황궁을 떠나야 했다.

그런데 침대맡에 웬 선물 상자와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이게 뭐지? 게다가 꽃 생김새가 생소한데. 처음 보는 종이야.’

카를은 시종을 불러 상자의 정체를 물었다. 시종이 대답했다.

“남부의 해밀턴 백작께서 영지에서 나고 기른 포도로 만든 포도주를 보냈습니다. 꽃 역시 영지에서 키우는 종인데, 남부 지방에서만 자라는 특산품이고 잘 시들지 않는 게 특징이라고 합니다.”

“아, 그랬군.”

고위 귀족들은 영지의 생산품을 보내곤 했다. 이만큼 영지가 잘 돌아가고 있다는 증명인 셈이었다.

카를은 침대에 걸터앉아 상자를 열었다. 푸른색 리본이 매어진 와인병이 촛불에 반짝였다.

‘고급품 같은데. 영지민들에게 급료는 얼마나 줘 가면서 만들었는지 확인해야겠어.’

카를은 무심결에 꽃다발을 들었다. 남자에게 받는 꽃 따위 기쁠 리 없었다.

그는 대충 치워 놓으려다가 꽃을 찬찬히 살폈다. 남부 지방의 특산품인 만큼 꽃잎이 크고 시원시원했다. 향기도 시원하고 강한 편이었다.

‘잘 시들지 않는 게 특징이라고…….’

카를이 시계를 보았다. 시간은 이미 자정을 넘겼다. 게다가 내일은 사냥제. 술을 마시기엔 최악의 조건이었다.

잠시 후, 그는 꽃다발과 와인병을 들고 방을 나섰다.

***

아우라는 침대에 걸터앉아 석궁을 매만지고 있었다. 지난 일주일간 얼마나 열심히 연습했는지 벌써 손때가 타 있었다. 석궁에 화살을 채우니 사냥제 준비는 끝이 났다.

‘정말 내일이구나.’

그녀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내일 이 시간, 자신은 이곳에 없을 거였다. 호화로운 생활이 아쉽진 않았다. 걸리는 게 있다면…….

카를.

‘아니야. 그도 점점 괜찮아질 거야. 불면증도 많이 나았고.’

이제 카를은 아우라 없이도 제법 잘 잔다고 했다. 황제의 삶에 익숙해지면서 데블라의 기억을 잊어 가는 듯했다.

‘그래도…… 떠난 걸 알면 불같이 화를 내겠지.’

예전 날 안센나로 도망갔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거였다. 생각만 해도 벌써 간담이 서늘했다.

하지만 그 분노가 무섭다고 해서 핀을 포기할 순 없었다. 그것이 아우라가 생각하는 자신의 의무였다.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똑똑.

노크 소리에 아우라가 문을 보았다.

‘설마 카를인가?’

아우라가 치마를 꽉 잡았다. 그때 문이 열리고 시녀가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기사 에밀이 잠시 뵙고 싶어 합니다만. 어떻게 할까요?”

“에밀이?”

아우라는 일단 가운을 덧입고 밖으로 나갔다. 루안이 아우라를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 있어? 이 밤에…….”

“잠이 안 와서요. 술이나 한잔하면 어떨까 해서요.”

“……술? 하지만 우린 내일-”

“폐하만 괜찮으시다면.”

루안이 들고 온 와인병을 천천히 흔들었다.

“저는 정말 한잔하고 싶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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