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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59)화 (59/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59화

“아우라.”

카를은 아우라의 얼굴을 감싸며 눈을 맞췄다.

“그러니까 내 곁을 떠나지만 마. 이 자리에 있어.”

그는 아랫입술을 잘근 물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아우라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지금처럼 그 자식을 기다리는 모습이어도 되니까.”

빗소리가 우렁차게 울리고 있었다. 아우라가 뭔가를 말하려 입술을 달싹일 때였다. 저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루안이 말을 타고 돌아오고 있었다. 그는 그들의 앞에 내려 예를 표했다. 우비를 입었음에도 흠뻑 젖은 채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안센나를 떠나기 전에 일이 생겨서 출발이 늦었습니다.”

“들어가도록 해. 상황 보고는 정비를 마치고 하도록.”

카를은 그렇게 말하곤 자리를 떠났다.

“황후 폐하?”

루안이 시종 멍하니 서 있는 아우라를 걱정스럽게 불렀다. 아우라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많이 걱정했어. 괜찮아?”

“네, 괜찮습니다.”

“그래…… 다행이야. 그러면 이따가 내 응접실로 오도록 해.”

“……네, 황후 폐하.”

아우라는 본궁으로 들어섰다. 루안은 그녀의 어깨에 걸쳐져 있는 외투를 가만히 보았다.

***

목욕과 환복을 마친 루안이 아우라의 응접실을 찾았다. 아우라는 좋지 않은 안색으로 소파에 파묻힌 듯 앉아 있었다. 밖에선 춥기만 했던 몸이 이제는 뜨겁게 열이 올랐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감기에 걸린 것 같아.”

“이런. 제가 죄송합니다. 더 빨리 왔어야 하는 건데…….”

“아니야. 내가 멋대로 밖에 서 있다가 이렇게 된걸.”

아우라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머리가 핑 도는 듯했다. 어제부터 이어 왔던 긴장감, 때아닌 추위, 카를에게 들은 여러 말. 그런 것들이 그녀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다만 한 가지 좋은 건 있었다. 카를의 말을 되새길 정신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우라는 루안에게 물었다.

“그래, 안센나는 어때? 카를이 말하던데. 황실 쪽도 의사를 보냈다고.”

“네. 그리고 라이언 대공 역시 의료품과 식수를 가지고 직접 안센나를 찾았습니다.”

“대공이?”

아우라는 깜짝 놀랐다. 대공이 그런 작은 마을에 직접 가다니. 게다가 수트라와의 거리는 상당하지 않은가.

‘저번에 보냈던 구호품은 그렇다 쳐도 제니아인들에게 관심이 지나치게 많아.’

루안은 오전에 있던 일을 말해 주었다.

“나는 수트라의 대공, 라이언이네.”

라이언이 손을 불쑥 내밀었을 때였다. ‘대공’이라는 말에 루안이 얼른 예를 표했다.

“무례했습니다, 대공 전하. 아우라 황후 폐하의 기사 에밀이라고 합니다.”

“악수는 안 받아 주는 건가?”

“아, 아닙니다.” 

루안이 그의 손을 잡았다. 라이언이 루안을 쓱 보았다.

“기사치고는 손이 곱네. 얼굴도 그렇고.”

그는 루안을 자세히 살폈다.

“내가 작년 말에 황궁에 들렀을 때 자네 같은 기사는 본 적이 없는데. 그새 새로 들어왔나?”

‘황실 기사들을 다 꿰고 있는 건가.’

“네, 그렇습니다. 이번 달에 신임 기사로 서임되었습니다.”

“그런가……. 바로 황후 폐하의 방으로 들어간 거고?”

루안은 고민스러웠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설명해야 하는 걸까. 황제군이었네, 황후의 애인입네 해 봤자 좋은 것 없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런 셈입니다.”

“흠. 그럼 잠깐 나와 이야기 좀 하고 가지.”

“죄송합니다만 황후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바로 출발해도 늦는 상황이라서요.”

“라이언 대공이 바짓가랑이를 잡았다고 해.”

그는 장난스레 주먹을 문틀에 툭 대며 길을 막았다.

“그분께서도 왠지 지금쯤 날 보고 싶어 하실 것 같으니 말이야.”

곧 수트라로 갈 예정이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루안은 그가 보통이 아닌 사람임을 직감했다. 사람을 은근하고 능숙하게 몰아붙이는 태도만 봐도 그랬다.

“그럼…… 괜찮으시다면 방으로 들어오시죠.”

루안은 결국 라이언을 방으로 들였다.

라이언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수트라에서 안센나까지의 험한 길에 대한 수다를 늘어놓았다. 그 수다를 들어 주다 지친 루안이 자연스레 말을 끊었다.

“구호품을 전달해 주시기 위해 직접 그 먼 길을 오시다니. 대단하십니다.”

“황가의 의무지. 백성을 돌보는 것.”

라이언이 싱긋 웃었다. 그의 이런 태도 때문에 제니아인들 사이에서 라이언의 위상이 높았다.

“안센나에 관심이 많으신 모양입니다. 이곳의 소식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 나름대로 정보를 얻어다 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리고 안센나라기보다 제니아인들에게 관심이 많지.”

그가 다리를 꼰 채 턱을 괴고 루안을 올려다보았다.

“자네, 제니아인이지?”

“……그건 왜 물으십니까?”

“생긴 게 제니아인이라. 내가 사람 생긴 거에 관심이 많아. 특히 조금 다르게 생긴 사람들.”

그렇게 말하는 라이언이야말로 ‘조금 다르게 생긴 사람’이었다. 카사에서 보기 힘든 은발부터가 북부인의 특징이었으니.

“아니요. 저는 카사인입니다.”

“성은?”

“머린입니다. 시골 귀족 출신이라 대공 전하께선 아마 모르실 겁니다.”

“음, 모르는 성이군. 어쨌거나 아니라니 의외네. 난 자네가 제니아인이라 황후께서 끼고 있는 줄 알았지.”

라이언이 피식 웃었다.

“위험한 말씀이십니다, 전하.”

기분 나쁜 사람이었다. 루안은 아우라가 왜 그를 믿지 못하는지 잘 알 것 같았다.

“혹시 황후 폐하께 보낼 전언이라도 있으신지요?”

“음…… 있지.”

“말씀하시면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자네가 믿을 만한 기사인지 잘 모르겠어서 말이야.”

“……그게 무슨 말씀인지요?”

“내가 보기엔 자넨 높은 집안에서 교육을 아주 잘 받고 자란 사내 같아. 정말 시골 귀족 출신이 맞나?”

라이언이 루안의 손을 슬쩍 턱짓했다. 루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어쨌거나 지금으로선 제가 두 분을 위해 해 드릴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만약 황궁으로 편지를 하시면 그것을 황후 폐하께 전하는 역할을 해 드리겠습니다.”

더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 당돌함에 라이언이 푸핫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하여간. 자네도 주인을 쏙 빼닮은 것 같군.”

그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황후 폐하께 전해.”

“…….”

“그분이 원하는 건 다 내가 가지고 있으니 어서 날 찾아 달라고. 이쪽은 절박하다 못해 몸이 달아 있다고 말이야.”

아우라는 잠자코 그 긴 이야기를 들었다. 라이언의 여유작작한 태도가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그게 참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그가 전달하고 싶은 바는 확실히 알아들었다.

‘원하는 것……. 핀과 그 봉인을 푸는 방법이겠지.’

“고생했어. 어서 들어가서 쉬어.”

“얼굴빛이 너무 창백하십니다. 바로 황궁의를 불러 드리겠습니다.”

“그래야 할 것 같아. 부탁해.”

아우라가 일어나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주변이 핑글 돌았다.

‘……어?’

“폐하!”

아우라가 크게 휘청이자 루안이 얼른 다가와 부축했다. 그녀의 시야가 점점 어둡게 가라앉았다. 루안이 옆에서 뭔가를 다급하게 말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

회의를 끝낸 카를이 집무실에 들어섰다. 그는 서류를 대충 내려놓고 목을 죄던 타이를 풀어 버렸다.

회의에 집중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본궁 앞에서 바보처럼 횡설수설 떠들던 자신. 대답 없이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던 아우라.

어쩌면 그녀는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안색이 몹시 안 좋았으니까. 떨리던 어깨와 창백한 입술도 그렇고.

‘그래도…… 마지막에는 분명 뭔가를 말하려던 것 같았는데.’

그때 노크 소리가 울리곤 테오가 들어왔다.

“폐하.”

“그래.”

“그…… 황후 폐하께서 몸이 많이 안 좋으신 듯합니다.”

“아…… 역시 그렇군.”

카를이 집무실을 나섰다. 방향은 당연히 황후의 방이었다. 테오가 얼른 그의 뒤에 따라붙었다.

“어떻게 안 좋다고 하지?”

“황궁의 말로는 독감 같더랍니다. 긴장과 스트레스가 심하신 상태에서 찬 바람을 쐬신 게 병이 된 듯합니다.”

“의식은? 완전히 쓰러진 거야?”

“그건 아닌 듯하고, 고열로 힘이 없다고 하십니다.”

어쨌거나 카를은 제 탓 같았다. 그녀와 싸워 대며 스트레스를 준 것도 자신이고, 안센나로 사람을 보낸 걸 숨겨 긴장하게 한 것도 자신이니.

카를과 테오가 모퉁이를 돌 때였다. 한 무리의 대신들과 마주쳤다.

“폐하!”

“폐하! 안 그래도 폐하를 뵈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길이 엇갈리지 않아 다행입니다!”

대신들이 떼로 몰려오다니. 게다가 중요하게 할 말을 이고 지고 온 표정들이었다. 카를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젠장. 엇갈렸어야 하는 건데.’

“회의는 방금 끝나지 않았나. 급한 게 아니라면-”

“너무 다급한 일이라 약속을 잡을 겨를도 없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그래. 일단 말을 해 보시오.”

대신 하나가 나섰다.

“방금 서쪽 국경 지대의 변경백에게서 공식 서신이 왔습니다. 그 지역에 새로운 마물 떼가 출현했다고 합니다.”

“마물? 그 수는?”

“개체수가 꽤 됩니다. 확인된 것만으로도 수십 마리에 달합니다. 문제는 그 마물들이 서쪽 곡창 지대를 오염시키고 있어서-”

“그만.”

곡창 지대를 오염시키는 새로운 마물 떼. 그것은 국방과 농업, 마물 연구 모두에 해당하는 긴급 사안이었다. 이 많은 대신이 달려온 것도 이해가 되었다.

카를은 결국 제 집무실을 가리켰다.

“다들 들어가 있도록. 바로 들어갈 테니.”

“네, 폐하.”

“감사합니다, 폐하.”

대신들은 우르르 카를의 집무실로 향했다. 카를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테오가 눈치를 보며 말했다.

“폐하……. 황후 폐하께는 조금 있다가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겠지.”

카를은 그렇게 말할 뿐 어느 방향으로도 가지 않았다.

“저라도…… 가 볼까요?”

“그러도록 해. 그리고…….”

“예. 그리고?”

“에밀이라도 황후의 곁을 지킬 수 있도록, 방으로 들어가는 걸 허락해. 오늘만.”

사실 죽어도 그놈을 또 아우라의 방에 들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었다. 아우라를 혼자 앓게 하는 건 말이 안 됐다.

‘……어쩌면 내가 있는 것보다 나을지도.’

그는 결국 다시 집무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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