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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58)화 (58/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58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늦은 밤, 루안은 말을 타고 안센나에 도착했다. 뒤따르는 마차엔 의사와 간호사, 의료품이 가득했다.

안센나는 소문대로 봉쇄 상태였다. 그 앞을 지키던 자경단원이 루안을 알아보았다.

“엇! 대장……!”

“쉿!”

루안이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곤 그에게 손짓했다. 자경단원이 눈치껏 달려왔다.

“대장 차림을 보니…… 정말 황궁에 들어가셨군요?”

루안은 그간의 일을 짤막하게 설명해 주었다. 자경단원은 입을 떡 벌렸다.

“대단해요!”

“쉿. 말조심해. 얼른 가서 단원들에게 소식을 전해. 내 상황도 함께.”

“네, 그러겠습니다.”

자경단원이 안센나로 달려갔다. 잠시 후, 반가운 얼굴들이 루안을 마중 나왔다.

“황궁에서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기사님.”

그들에 어색한 연기에 루안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바로 장단을 맞춰 주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우라 황후 폐하께서 보내셨습니다.”

“일단 들어오시죠.”

그들은 루안과 마차를 안센나로 들여보냈다. 전염병이 도는 마을은 조용하고 우울했다.

“환자들은 어디에 둔 겁니까?”

“빠르게 격리소를 지어 그곳에서 치료를 받게 하고 있습니다.”

“치료를 할 만한 상황이 아닐 텐데요.”

안센나에 의사가 몇 없다는 건 루안이 가장 잘 알았다. 그런 상황에서 격리소가 제대로 운영될 리가 없었다.

자경단원이 이상하다는 듯 루안을 보았다.

“모르셨습니까?”

“뭘요?”

“오늘 오후에 황실에서 의사와 간호사, 의료품과 식수를 보내지 않았습니까. 아, 저수조를 치울 사람들도요.”

“……황실에서요?”

자경단원이 품에서 종이를 한 장 꺼내어 내밀었다. 그건 황실이 황제의 이름으로 필요 인력과 물품을 보낸다는 공문서였다.

‘이게 무슨 일이지? 황제는 이 사실을 굳이 왜 숨긴 거고?’

“……일단 지부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죠.”

자경단원들이 말했다. 그 안에서는 좀 더 편안하게 대화할 수 있을 거였다.

잠시 후, 그들은 지부로 들어섰다.

“대장……!”

자경단원들이 우르르 몰려와 루안을 끌어안았다.

“걱정 많이 했습니다.”

“이렇게 빨리 황궁으로 가실 줄은 전혀 몰랐어요.”

“일이 많았어. 다들 잘 있었어?”

루안의 물음에 그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센나의 상황은 점점 더 나아지고 있습니다. 특히 수트라의 라이언 대공께서 여러 구호품을 보내 주시죠.”

“라이언 대공?”

‘라이언이라면 아우라가 만나야 하는 사람이잖아. 그는 왜 자꾸 우리를 왜 돕는 거지?’

하지만 그걸 따질 때는 아니었다. 지금 중요한 건 전염병이었다.

“전체적인 상황은 어때? 확산세는?”

“황실에서 보낸 의사들이 빠르게 병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확산세는 멈췄고, 환자들의 상태도 안정된 듯해요. 아직 하루밖에 안 돼서 모르겠지만요.”

“그렇군. 나는 내일 오전까지 여길 살펴본 후에 돌아갈 거야. 그때까지 내가 알아야 할 게 더 생기면 말해 줘.”

“그렇게 빨리요?”

“정오까지는 돌아가서 황후 폐하께 보고를 해야 해.”

“아하. 네, 그렇게 하십시오. 방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나저나 갑자기 왜 전염병이 돈 거지?”

“의사 말로는 물에서 번식하는 나쁜 균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저수조의 물이 왜 썩었는지 그 원인은 파악 못 했고?”

자경단원들이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이 픽픽 쓰러지는 마당에 그걸 확인할 새가 없어서요. 하지만 이상하긴 합니다. 멀쩡하게 흐르던 물이 갑자기 이렇게 썩었다는 게요.”

“게다가 하필 황실에서 만들어 준 저수조라…… 황제가 제니아인의 수를 줄이려 했다는 음모론까지 돌았습니다.”

“황제가? ……그건 아닐 거야.”

‘아우라를 생각해서라도 그런 짓은 못 할 거야. 내가 보기엔…….’

루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상당히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네. 황실에서 바로 의사를 보내서 그런 소리도 많이 사그라들었습니다.”

하지만 황실에 대한 신뢰가 꺾인 건 사실 같았다. 애초에 좋은 관계가 아닌 만큼 신뢰를 잃는 건 쉬웠다.

“저수조는 깨끗이 청소해서 다시 쓰도록 해. 한 번 균이 퍼졌다고 물을 포기할 순 없으니. 대신 저수조를 관리하는 인력을 따로 두고.”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루안은 그날 숙소에서 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 오전에 마지막으로 격리소를 찾았다.

사람들의 상태는 한결 좋아 보였다. 의사와 간호사가 충분하니 응급 상황에도 빠르게 대처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아우라도 한시름 놓겠어. 걱정하고 있을 테니 빨리 가자.’

루안은 격리소를 나와 다시 숙소로 갔다. 짐과 우비를 챙기고 문을 열었을 때였다. 한 남자가 문 앞에 서 있었다.

훤칠한 키에 창백하리만치 흰 피부. 은발에 푸른 눈을 빛내고 있는 남자.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루안은 서늘하고 불길한 느낌에 경계를 했다.

“누구십니까?”

“황후 폐하께서 사람을 보냈다고 해서 궁금해서 와 봤는데.”

“신원을 밝혀 주십시오.”

“보기보다 성격이 딱딱하군.”

그가 손을 불쑥 내밀었다.

“나는 수트라의 대공, 라이언이네.”

***

시곗바늘이 정오를 지나간 지 오래였다. 루안에겐 아직 소식이 없었다.

아우라는 초조하게 창밖을 내다보았다. 비가 주룩주룩 지겹도록 내리고 있었다.

‘올 때가 한참 지났는데. 혹시 안센나의 상황이 심각한 건가? 아니면 루안에게 무슨 일이 생겼거나.’

아우라가 결국 집무실을 나섰다. 뒤따라온 미나가 말했다.

“황후 폐하, 어딜 가십니까?”

“본궁 앞에서 루안을 기다려야겠어.”

“이 날씨에요?! 감기드십니다.”

“캐노피에서 비를 피할 수 있어. 따라오지 않아도 돼.”

아우라는 그렇게 미나를 떼어 놓았다. 불안한 모습을 아랫사람들에게 보여 좋을 게 없었다.

본궁을 나서니 제법 서늘한 기운이 아우라의 몸에 스몄다. 캐노피 아래까지 걸어 나간 그녀가 본궁으로 오는 길을 바라보았다. 루안의 말은 고사하고 아무도 다니질 않았다.

아우라는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쏴…….

빗소리는 점점 거세졌다. 캐노피가 비를 막아 주는데도 그녀는 점점 젖어 가는 기분이었다. 서늘함이 추위가 되어 여름 드레스 안을 파고들었다.

“추워…….”

아우라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때, 뭔가가 그녀의 어깨를 덮었다. 무겁고 커다란 외투였다.

그녀가 놀라서 옆을 보았다. 그곳엔 카를이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카를이 물었다. 아우라는 시선을 돌렸다. 카를이 다시 물었다.

“네 애인을 기다려?”

“……너는?”

“회의 가는 길이야.”

“가, 그럼.”

“이렇게 덜덜 떨고 있는데 어떻게 가.”

아우라는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체온이 묻은 외투라던가 걱정 어린 얼굴에 그럴 수가 없었다.

카를은 외투를 만지작거리는 아우라의 손을 보았다. 긴장과 추위에 손끝이 하얬다. 자기도 모르게 그 손을 잡으려다가 그냥 주먹을 꽉 쥐었다.

“안센나의 상황이 꽤 괜찮아졌대. 전염병 확산세는 멈췄고, 치료를 받은 사람들도 회복하고 있어.”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내가 어제 의료진을 보냈으니까. 네가 날 찾아오기 전에. 보고는 오늘 오전에 받았고.”

그녀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카를이 덧붙였다.

“생색내려는 거 아니야. 놀리려는 것도 아니고. 네가 불안해하는 것 같아서 말하는 거야. 네 애인은 도통 올 기미가 안 보이니까.”

“그럼…… 어젠 날 속인 거야?”

카를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 내가 유치하게 굴 순 있어도 그런 일을 모른 척할 린 없잖아.”

“세상에, 대체 왜…….”

아우라가 이마를 짚었다. 잔뜩 경직되어 있던 어깨가 서서히 내려갔다.

그녀는 원망의 눈으로 카를을 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는 재차 확인하듯 물었다.

“그럼 제니아 사람들은 일찍이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는 거지?”

카를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우라가 중얼거렸다.

“다행이야……. 고마워.”

카를의 눈이 살짝 떨렸다.

이럴 때마다 그는 뼈저리게 느꼈다. 아우라가 얼마나 긍지 높은 왕족인지. 어제의 싸움은 그 긍지에 흠집 하나 낼 수 없었다는 것 역시. 그리고 그런 점들로 하여금 카를이 아우라를 원하게 했다.

‘안고 싶어.’

카를의 목울대가 오르내렸다.

‘입 맞추고 싶어.’

입술이 맞닿았으면 했다.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혀와 자신의 혀를 얽고 싶었다. 자신이 살린 아우라의 고귀함을 온몸으로 느끼고 싶었다.

그는 그녀에게 애인이 있건 없건 널 원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네가 너무 고귀해서 너를 원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참았다. 지금까지 아우라와 반복했던 싸움들, 입맞춤이나 잠자리는 그 싸움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었다. 이젠 다른 방식으로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할 때였다.

“아우라.”

카를이 나지막이 그녀를 불렀다.

“나는…… 너에게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어?”

“네가 날 아무리 증오하고, 혼란스럽게 하고, 심지어 애인을 만들지라도.”

그의 낮은 목소리가 빗소리와 섞였다. 하지만 아우라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네가 이따금 먼저 입을 맞춰 오고, 못 이기는 척 날 재워 주고, 날 거부하지 않고 같이 밤을 보내 줬잖아.”

“…….”

“그래서 네가 그 기억을 잊었다고 했을 때 정말 화가 났어. 사실은 내가 네게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던 걸까 봐.”

“그런…….”

그런 게 아니야. 아우라는 그 말을 애써 삼켰다.

“아우라. 난 그 기억 덕분에 3년을 미치지 않고 버텼어.”

“…….”

“데블라에서 목숨이 사지에 달린 순간에도 그때 사냥제에 함께 가지 못한 게…… 고작 그런 게 아쉽다는 게 내가 괴물이 아니라는 증거 같았어.”

“…….”

“기억하지 못한다고 널 탓하는 게 아니야. 내가 못되게 군 것도 미안해. 그냥 다만…… 젠장.”

카를은 답답했다. 어떤 마물을 만나 싸워도 이것보단 쉬울 것 같았다.

“그래. 난 그 자식처럼 상냥하게 굴지도 못 하겠고, 달래 주는 방법도 몰라. 난 그냥…… 네가 날 특별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다는 거야.”

아우라의 어깨가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카를은 얕은 한숨을 내쉬더니 외투의 옷깃을 잘 여며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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