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57화
여름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며칠 내내 이어지는 비에 여름 더위도 한풀 꺾여 가는 듯했다.
어제 아우라가 주문했던 석궁이 도착했다. 그 작고 가벼운 석궁을 받았을 때 그녀는 깨달았다. 황궁을 나갈 날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아우라는 비가 내리는 창밖을 보았다.
‘비가 멈춰야 연무장에서 석궁 연습을 할 텐데.’
그때였다. 미나가 급하게 아우라의 집무실로 들이닥쳤다.
“폐하! 폐하!”
“무슨 일이야?”
“큰일이에요. 안센나에 일이 생겼습니다.”
아우라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말해 봐. 차분하게.”
“안센나에 전염병이 돌고 있다고 합니다.”
“뭐?! 어떤 전염병?”
“배앓이를 하고 오한이 심하게 든다고 합니다. 벌써 노인 십수 명이 앓다가 죽었다고 하고요.”
“죽기까지 해?”
아우라가 벌떡 일어났다. 미나가 입술을 꾹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원인은?”
“듣기론 저수조의 물에 문제가 생겨서 그런 거라고 했어요. 상황이 심각해서 안센나는 자진 봉쇄했다고 합니다.”
아우라는 창밖의 비를 보았다. 습도가 높으면 전염 속도가 빠른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안센나는 의료 시설마저 부족했다.
그녀는 일단 차분하게 물었다.
“……넌 그걸 어떻게 알았어?”
“황궁에 올라오는 보고를 친한 시종이 슬쩍 일러 줬어요. 아직 신문 기사로는 나지 않았습니다.”
“알았어. 잘 알아 왔다.”
아우라는 방을 나섰다. 문 앞을 지니고 있던 루안이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그녀는 루안에게 안센나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루안이 침착하게 말했다.
“제가 안센나를 살펴보고 올까요?”
“아니. 카를과 이야기를 해 봐야 해. 전염병은 국가의 문제야. 빨리 의사를 모집해 보내야지.”
아우라는 침착했다. 그러나 루안은 그런 아우라가 내심 신경이 쓰였다.
‘많이 불안할 텐데. 이상하게 침착해. 이 위화감은 뭐지?’
루안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우라의 뒤를 따라갔다.
***
그 시각.
카를은 집무실에서 테오에게 똑같은 보고를 받았다. 그는 피곤한 안색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불면과 스트레스로 그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하필 안센나라니…….”
“의료 시설의 수와 수준이 너무 취약한 곳입니다. 당장 황궁의에게 의사를 모집하게 하여 안센나로 보내셔야 합니다. 저수조를 비우려면 인력이 필요할 테니 함께 보내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게 해. 어서.”
“예, 폐하.”
테오가 급히 집무실을 나갔다.
벌컥 하고 집무실 문이 활짝 열렸을 때였다. 카를은 문 앞에 선 아우라와 루안을 보았다.
두 사람을 보니 카를은 속이 뒤틀리는 듯했다. 그간 일부러 만남을 피해 주기까지 했는데 이렇게 함께 행차를 하신 건 또 뭘까 싶었다.
아우라는 혼자서 집무실에 들어왔다.
“카를.”
“오랜만이네.”
카를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아우라가 책상 바로 앞까지 한걸음에 다가왔다.
“상의 좀 해, 카를.”
그 조급한 걸음과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안센나 일 때문에 찾아왔다는 것을.
“애인과 참으로 바쁜 시간을 보낸다고 들었는데. 다른 말벗이 필요한가?”
“말싸움할 때가 아니야. 안센나에 전염병이 퍼졌어. 이미 보고를 들었겠지만.”
“그래, 들었어.”
대수롭지 않은 태도에 아우라가 조금 당황했다. 그러나 이내 차분하게 말했다.
“의사를 보내야 해. 깨끗한 물도 함께.”
“보내도록 해. 원래도 안센나에 많은 걸 보내고 있었잖아.”
“의사를 보낼 돈이 없어서 이러는 게 아닌 걸 알잖아. 황실이 움직여야 모든 게 빨리 진행돼. 전염병은 한시가 급한 문제고.”
“아우라.”
카를이 나긋하게 그녀를 불렀다.
“너는 내 만류를 뿌리치고 핀을 가져갔어. 역시 내 애걸을 무시하고 애인을 뒀고.”
“…….”
“게다가 너는 나와 한 약속을 제대로 기억조차 못 하잖아. 그런데 너는 내게 도와 달라는 말을 참으로 쉽게 하는군.”
“……뭐?”
“나가 봐. 너는 능력이 좋으니 잘 해결할 수 있겠지.”
카를이 깃펜을 들고 서류를 펼쳤다. 아우라는 한참을 말없이 그대로 서 있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요구는 상식적이고 합리적이었으며 황후다웠다. 하지만 그래서 더 신경에 거슬렸다.
이젠 불편함마저 내비치지 않는 그 자연스러운 태도. 그리고 문밖에 서 있는 에밀의 존재. 그건 마치 카를이 그녀에게 그저 동료로 남았음을 말해 주는 듯했다.
그때였다.
쾅!
난데없이 아우라가 카를의 책상을 내리쳤다.
카를이 고개를 들어 아우라를 보았다. 아우라의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녀는 화를 꾹 눌러 참으며 또박또박 말했다.
“이건 부탁이 아니야. 나의 의무이자 너의 의무지. 내가 카사인들을 위해 일하는 것처럼 그들도 너의 국민으로서 보살핌을 받을 자격이 있어.”
“…….”
“핀은 네가 사과의 의미로 준 거였잖아. 약속을 기억 못 한 건 우리끼리의 일이고. 왜 그런 것 때문에 국민이 피해를 봐야 하지? 그리고 애인?”
아우라가 피식 웃었다.
“무도회 이후로 손 한 번 제대로 잡은 적 없어.”
그녀의 눈에 눈물이 서서히 차올랐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진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며 말했다.
“넌 항상 이런 식이야, 카를. 나를 죽도록 원하는 척하면서…… 내게 있어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그녀의 표정에 슬픔과 체념이 스몄다.
“정작 네가 필요한 순간에는…… 내 곁에 없잖아.”
카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우라, 잠깐 이야기 좀 해.”
“아니, 너와는 더 할 말 없어. 이 일은 내가 처리해.”
아우라가 벌컥 문을 열었다. 문 앞의 루안이 아우라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녀가 침착하게 말했다.
“에밀, 따라와.”
그녀는 한마디를 남기고 달려가듯 걸었다. 그 뒤를 루안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따라갔다.
“황후 폐하, 황후 폐하. 괜찮으십니까?”
“할 일이 많아. 어서 따라와.”
루안은 아우라의 표정을 보았다.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았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복도를 지나 황후의 방을 향했다.
그리고 잠시 후, 카를이 성큼성큼 그 길을 걸어갔다.
***
쾅!
아우라가 침실의 방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방 안에 있던 시녀들이 깜짝 놀랐다.
“가방을 가져와. 당장.”
“예? 아, 예.”
미나와 시녀들이 얼른 샛문 너머로 갔다. 황후의 심기가 몹시 안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들어와, 에밀.”
중간 복도에 서 있던 루안은 선뜻 발을 들이지 못하고 망설였다. 사실 여기에 있는 것도 예법에는 맞지 않았다.
“전 들어갈 수 없습니다.”
“들어와.”
“폐하, 저는…….”
“어서.”
아우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루안이 결국 한숨을 내쉬곤 방으로 들어갔다.
“황후 폐하, 괜찮으십니까?”
그녀는 말없이 콘솔 서랍에서 보석함을 꺼냈다. 그리고 벨벳 주머니에 보석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침대 협탁 마지막 칸에는 금화가 있어. 꺼내 와.”
루안은 일단 시키는 대로 했다. 아우라는 금화도 주머니에 쏟아부었다.
“수도 서쪽에 의학 아카데미에 딸린 ‘일란’이라는 의료소가 있어. 일단 거기서 의사와 간호사를 살 거야.”
“네.”
“동북쪽엔 ‘에스타’라는 보건소가 있어. 거기에서 약품을 사야 하고. 내가 에스타로 갈 테니 네가 일란으로 가.”
“황후 폐하.”
“시간이 없어. 이해했으면 너도 가서 짐을 싸고 말을 준비해 놔.”
루안이 깜짝 놀랐다.
“안 됩니다. 전염병이 창궐한 지역에 가신다니요.”
“그게 왜.”
아우라가 벨벳 주머니를 테이블에 툭 내려놓았다.
“위험하지 않습니까.”
아우라가 피식 웃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점점 충혈됐다.
“그들이 다 죽으면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도 의미가 없는데 내가 왜 몸을 사려야 하지?”
루안이 멈칫했다. 아무래도 황제와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아우라는 황제와 엮이면 곧잘 이성을 잃으니.
“아우라.”
그가 에밀이 아닌 루안으로서 그녀를 불렀다. 그러자 그녀도 순간 이성을 차린 듯했다.
루안은 아우라에게 다가와 그녀를 안아 주었다.
“다 괜찮을 겁니다.”
그 말에 아우라가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울음을 참는 그 떨림이 안쓰럽다는 듯 루안은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아우라는 자신이 싫었다. 위급한 상황에서 카를부터 떠올린 자신이. 똑바로 정신을 차려야 할 때 이렇게 울고만 있는 자신이.
“울지 마세요. 안센나에는 제가 다녀올게요.”
“그들은…… 그들은 나만 믿고 있는데…….”
“…….”
“난 카를 하나 설득하지 못했어. 정말…… 난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지 않습니다.”
루안이 아우라와 눈을 맞췄다.
“적어도 저한테는 아무것도 아니지 않아요.”
아우라가 루안의 옷을 꽉 붙잡았다. 루안이 안쓰러운 한숨을 삼켰다.
“제가 다녀올게요. 의사를 구하고 의료품을 사서 안센나에 다녀올 테니 폐하는 여기서 기다리고 계십시오.”
“안 돼. 같이 가.”
“전염병이 도는 곳으론 못 보냅니다.”
“그럼 너는?”
루안이 아우라의 뺨을 손으로 닦아 주며 빙긋 웃었다.
“아시다시피 이래 봬도 꽤 튼튼한 편입니다.”
그래도 아우라는 걱정스러운 듯했다. 루안이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날 믿고 있어, 아우라.”
“……언제쯤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아?”
“내일 정오까지는 꼭 올게요. 약속해요.”
아우라는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결국 벨벳 주머니를 루안에게 쥐여 주었다.
“꼭…… 몸조심해.”
“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루안이 인사를 하곤 방을 나섰다. 그는 중간 복도에 있는 카를을 보고 흠칫 놀랐다.
‘다 들은 걸까.’
루안은 혹시 아우라가 들을까 봐 침착하게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제야 카를에게 예를 표했다.
“거기까지만 해.”
카를이 말했다.
“더는 다가가지 마.”
분명 아우라를 두고 한 말이었다. 루안은 그 말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제가 다가갈 필요가 있는 것 같아서요.”
“…….”
“상황이 워낙 급해서 바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송구합니다.”
루안이 카를을 스쳐 달려갔다.
일개 기사가 황제에게 할 수 있는 말과 행동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를은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그의 말이 맞았으니까.
카를은 문고리를 잡았다.
문득 아까 들었던 두 사람의 대화가 떠올랐다. 진심을 담아 그녀를 달래 주던 목소리. 믿어 달라고 말할 수 있는 자신감. 약한 모습을 내보일 수 있는 편안함.
그건 상처를 주고받아 본 적 있는 관계에서나 나올 수 있는 것들이었다.
“…….”
카를은 결국 문고리를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