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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56)화 (56/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56화

아우라는 루안과 정원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여유롭고 평범한 풍경이었으나 나누는 이야기는 그러지 못했다.

그들은 며칠 전에 합의를 보았다. 사냥제를 틈타 수트라로 가기로.

테이블엔 사냥제 관련 서류가 펼쳐져 있었다. 아우라는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며 서류를 살폈다.

“사냥제는 이제 3주밖에 남지 않았어. 그날 모든 게 완벽해야 해.”

“탈출만 하면 어떻게든 수트라로 갈 순 있어. 그곳으로 가는 길목 길목에 손을 써 뒀으니.”

루안 역시 이 일에 많은 공을 들인 상황이었다. 길을 알아 두고, 중간에 도움을 받을 사람들을 매수해 놓았다. 그들이 두 사람의 흔적을 지울 수 있도록.

“좋아. 그럼 관건은 어느 문으로 나가냐는 건데…….”

아우라가 팔짱을 끼고 하늘을 보았다. 평화로운 하늘에 새가 몇 마리 날아다니고 있었다.

‘사냥제에 참가해 본 적이 있어야 분위기를 알 텐데.’

갑자기 불어닥친 불행만 아니었다면 사냥제에 참가했을 것이다. 당연히 카를과 파트너가 되어서.

‘그럼 돌아오는 사냥제에서 나와 파트너를 할 거야?’

또 그 기억이 불쑥 떠올라 버렸다. 그 대화를 나누기 전에 일어났던 ‘그 일’ 역시.

“……아우라?”

루안이 아우라를 불렀다. 아우라가 흠칫 놀랐다.

“아, 으응……. 미안해, 루안.”

“사냥제 얘기만 하면 꼭 한 번씩 멍해져. 괜찮아?”

“괜찮아.”

아우라는 애써 웃었다.

그녀는 얼른 서류를 넘겼다. 훈트 산의 지도가 나왔다. 남쪽과 북쪽 입구가 가장 컸다. 동쪽은 다른 산과 이어져 있었고, 서쪽은 평야를 향해 있었다.

“어차피 우리가 어떤 문으로 나갔는지는 알려지게 되어 있어. 그러니 조금이라도 혼선을 주려면…… 서쪽으로 가자.”

“서쪽?”

“응. 길을 좀 돌아 북쪽으로 가더라도. 괜찮겠어?”

“어느 쪽으로 가도 준비는 되어 있어.”

‘역시 루안은 꼼꼼해.’

“황궁 생활은 어때?”

아우라가 루안에게 물었다.

“나쁠 게 뭐가 있겠어. 종일 너와 붙어 있는데.”

“하지만 기사 숙소에서 지내야 하잖아.”

기사들 사이에서 루안은 유명 인사였다. 서임되자마자 황제군이 되었다가 황후와의 스캔들로 쫓겨난 기사. 당연히 은근한 조롱과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조만간 내 방 근처로 방을 내어 줄게.”

“아니야, 아우라.”

루안이 그러지 말라는 듯 아우라의 손등을 잡았다.

“그럼 내가 더 눈에 띌 거야. 소문이야 좋을 대로 찧고 빻게 내버려 둬. 금방 사그라들 테니. 우린 여길 나가면 그만이야.”

아우라는 손가락이 유난히 긴 루안의 손을 보았다. 사실 그는 기사에 어울리는 패기를 지닌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심지가 굳어 도발 따위엔 넘어가지 않았다.

“그래. 그럼 조금만 더 고생해 줘.”

루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잠시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아우라, 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

그때였다.

“황후 폐하, 황제 폐하께서 오십니다.”

미나가 다급하게 알렸다. 아우라가 얼른 루안의 손에서 제 손을 빼냈다. 루안이 허전해진 제 손을 가만히 보았다.

“루안. 물러나 있어.”

“……싫어.”

어쩐 일인지 루안이 고집을 부렸다. 그가 이런 적은 처음이었기에 아우라는 당황했다.

이윽고 카를이 도착했다. 루안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꾸벅 예를 차렸다. 카를은 함께 마신 찻잔을 슬쩍 보았다.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 같군.”

“무슨 일이야?”

“사냥제 관련해서 확인할 게 있어서.”

“앉아. 안 그래도 그 건에 대한 서류를 보는 중이었어. 에밀은 잠깐 자리를 비켜 줄래?”

“네, 폐하.”

루안이 그제야 테이블을 떠나 멀찍이 섰다. 미나가 얼른 루안의 잔을 치웠다. 카를은 그제야 자리에 앉았다.

아우라는 카를의 눈 밑이 거뭇한 것을 보았다. 가장무도회 이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게 분명했다. 그래도 아우라는 모른 척 물었다.

“사냥제 관련해서? 무슨 일인데?”

“파트너 말이야. 누구랑 할 생각이야?”

파트너라는 말에 아우라는 직감했다. 카를이 오래전 그 약속을 꺼내리라는 것을.

아우라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조금이라도 틈을 보였다간 카를과 얽히게 될 게 뻔했다.

‘사냥제만큼은 절대 안 돼.’

“너와 파트너를 하진 않을 거야, 카를.”

“그럼 네 애인과 함께하게?”

카를이 담담하게 물었다.

그렇다고 하면 될 일이었다. 그럼 훈트 산에서의 움직임이 훨씬 자연스러워 보일 테니.

“꼭 파트너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

“혼자 다니겠다는 뜻이야?”

“누구와 같이 다니든 사람들은 수군거릴 거잖아. 그날은 그냥…….”

“…….”

“셋 다 따로 다니는 게 어때? 아, 혹시…… 네게 다른 파트너가 있다면-”

“그런 거 없어. 그럴 일도 없고.”

카를이 딱 잘라 말했다.

“그럼 혼자 다니도록 해. 편하게.”

“……이해해 줘서 고마워.”

“대신 이것만 대답해.”

“뭘?”

“우리가 했던 약속, 기억은 해?”

잠시 적막이 흘렀다. 아우라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그녀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무슨 약속?”

“3년 전에 약속했잖아. 사냥제에서 파트너를 하기로.” 

“……그런 옛날 일, 하나하나 다 기억할 리가 없잖아.”

아우라는 사냥제 서류의 마지막 장을 펼쳐 서명을 했다. 그리고 서류를 덮어 카를에게 내밀었다.

“내 일은 끝났어. 가져가.”

카를은 그 서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깜빡이다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기억해.”

“…….”

“그날 도서관이었어. 오후 3시쯤. 너는 분홍색 드레스를 입었을 거야. 팔목에는 흰 레이스 소매가 있었고, 왼쪽 소매에는 잉크 자국이 있었지. 머리는 공부를 한답시고 하나로 묶은 상태였고.”

“……카를.”

“구두는 녹색이었던가. 아니면 노란색이었는데. 미안, 이건 잘 기억이 안 나네. 아무튼 내가 사냥제에 관한 첫 질문을 했을 때 햇빛은 너의 왼쪽 팔목에 와 있었어. 그리고 네가 마지막 대답을 했을 때…… 그러니까 약속을 했을 땐 햇빛이 오른쪽 어깨까지 와 있었지.”

“그만해. 더 듣고 싶지 않아.”

아우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카를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너는 그날 바닐라 사탕을 먹었어. 내가 이걸 왜 기억한다고 생각해?”

카를이 냉소적으로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박, 사박.

잔디를 밟는 소리가 아우라의 앞에서 멈췄다. 아우라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카를이 말했다.

“우리 그날 처음으로 입을 맞췄잖아. 책장 앞에 앉아서.”

“…….”

“그런데 그 약속을 잊었다고?”

“……그래, 난 잊었어.”

아우라가 카를의 팔을 떼어 내곤 도망치듯 정원을 떠났다.

더는 카를과 있을 수가 없었다. 저 이야기를 더 들었다간 이렇게 이야기할 것만 같았다.

‘다 기억하고 있어. 너 못지않게 확실하고 생생하게. 넌 죽어도 모르겠지만.’

북쪽 탑에서 하루하루 고통받던 시절. 그녀는 어떻게든 카를과의 기억을 잊고 싶었다. 그 달콤한 기억을 떠올리면…… 그가 돌아와 줄 거라는 기대를 걸게 되니까. 그런 바보 같은 자신이 싫어 어떻게든 잊어 보려 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카를의 기억은 살아나고 또 살아났다. 마치 저주라도 받은 듯이.

한편, 카를은 멀어지는 아우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미 아우라의 애인이 그녀를 따라가고 있었다.

“……제길.”

그는 제 손에 들린 서류를 테이블에 내던지듯 올려놓았다.

쨍강!

서류에 부딪혀 바닥으로 떨어진 찻잔이 깨졌다.

***

저 뒤에서 뭔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우라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황후 폐하.”

그때 루안이 아우라를 불렀다. 아우라가 그제야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벌써 본궁 앞에 거의 도착해 있었다.

주위에 궁인들이 많았다. 그들을 의식한 루안이 말을 높였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미안해. 괜히 쓸데없는 말을 듣게 해서.”

루안 역시 카를의 이야기를 들었을 게 뻔했다. 그로서는 듣고 싶지 않을 이야기를.

루안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도 있죠. 옛날 일이잖아요.”

“그래도 미안해. 아무튼 사냥제 준비 잘하자. 난 먼저 방에 들어갈게. 데려다주지 않아도 괜찮아.”

아우라는 지금 그 누구와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가 돌아서려 할 때였다. 루안이 입을 열었다.

“저, 아까…… 물어볼 게 있다고 했던 거 기억하십니까?”

“아, 그랬지. 뭔데 그래?”

“제가 파티장에서 물었던 걸, 기억하십니까?”

루안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황궁을 버린다는 게…… 황제를 버린다는 뜻이냐고요.”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떠나야 한다는 말에 루안이 처음으로 건넨 질문이니.

‘하필 그때 카를이 나타나서 대답을 못 했지.’

“버리는 거 맞아.”

아우라가 어깨를 으쓱했다.

“버린다는 말도 웃기지. 제대로 가져 본 적도 없는데.”

그녀는 또 한 번 힘없이 웃어 보이곤 본궁으로 향했다. 루안은 자리에 서서 망연히 아우라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는 자부하고 있었다. 세상 누구보다도 아우라의 본모습을 잘 알고 있다고.

그녀는 대부분의 일을 똑똑하게 처리했다. 하지만 어떤 일은 그러지 못했다. 긴 길을 돌아가고, 조심스러워하고, 망설였다. 남들이 쉽게 아는 것을 가장 나중에야 알곤 했다.

너무나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 그런 것 앞에서 아우라는 그러곤 했다. 이를테면…… 지금 카를에게 보이는 태도처럼.

‘그럼 네 애인과 함께하게?’

아우라는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게 계획상 가장 나은 결정임에도. 마치 카를을 더 상처 주기 저어하는 것처럼.

“…….”

루안은 가면무도회 다음 날 아침을 떠올렸다.

황제가 아우라의 방에 들어간 후, 루안은 그 앞을 떠나질 못했다. 화가 난 남자와 아우라가 단둘이 있는 게 불안해서였다.

그리고 그렇게 아침이 되었다. 복도 모퉁이에 서 있던 루안은 보았다. 황제가 흐트러진 복장으로 그 방에서 나오는 것을. 그리고 그날 오후, 아우라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루안과 만났다.

루안은 그때 깨달았다. 어쨌거나 두 사람은 부부라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생각에 잠겨 있던 루안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아니, 그럴 리 있다고 해도…….’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결론은 같아. 황궁을 떠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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