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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55)화 (55/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55화

이른 아침.

카를은 잠에서 깨어났다. 품 안에서는 아우라가 가는 숨을 뱉으며 잠들어 있었다.

그는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

어젯밤 파티에서 그는 한눈에 아우라를 알아보았다. 바뀐 옷과 가면? 웃기지도 않았다.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이 바뀌었어도 그는 단번에 알아봤을 것이다.

“……으음…….”

아우라가 뒤척이며 등을 보였다. 카를은 그 하얗고 티 없는 등에 손끝을 살짝 댔다.

어젯밤, 카를은 내내 자신이 짐승 같다고 생각했다.

이 몸을 만질 자격이 있다는 것. 이 몸의 가장 깊은 곳에 닿을 수 있다는 것. 자신이 내세울 수 있는 건 고작 그것뿐이었다. 그녀가 짓던 웃음을 한 토막도 받지 못하고 있으니까.

에밀을 향해 환하게 웃고 있는 아우라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이제 남은 건…… 아우라에게 애인이 있다는 현실이었다. 자신을 한없이 비참하게 만드는.

카를은 아우라를 꽉 끌어안았다.

‘큰일이야.’

그는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특유의 달콤한 체취가 그의 몸에 스미는 듯했다.

‘네가 너무 미워.’

***

“헉.”

조쉬가 걸음을 우뚝 멈췄다. 곁에 있던 테오가 덩달아 걸음을 멈췄다.

“왜 그래?”

“야, 저쪽 좀 봐. 저쪽.”

조쉬가 정원 저 안쪽을 가리켰다. 그곳에서는 아우라와 루안이 사이좋게 걷고 있었다.

“아…… 큰일이야, 정말.”

테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지금 황궁에는 황후가 기사를 애인 삼았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물론 황족이 애인을 두는 게 큰 흠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야깃거리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아오, 저 자식! 결국 황후 폐하 밑으로 들어간 모양이네.”

“그랬겠지.”

“……원래부터 저런 곱상한 스타일을 좋아하셨던 걸까?”

조쉬가 암울하게 말했다.

“그러셨을지도?”

“어쩌냐. 그럼 우리 폐하는 가망이 없는 거 아니냐?”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얼른 가기나 해.”

테오가 조쉬를 질질 끌고 갔다. 그러다가 뒤를 살짝 돌아 두 사람을 살폈다.

‘보통 애인 같은 분위기는 아닌데. 그것보다는 친구나 동료랄까.’

그때 루안이 아우라를 보며 웃었다. 그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접혀 있었다.

‘……뭐, 일단 황후 폐하 쪽은 그런 것 같은데.’

잠시 후, 두 사람은 집무실에 도착했다.

조쉬가 부러 씩씩하게 인사했다.

“저희 왔습니다, 폐하.”

“그래.”

카를이 담백하게 대답했다. 그의 일과는 여전했다. 업무를 보고 회의를 했으며, 대신들을 만났다. 사람들은 그가 비로소 엘리제를 후궁으로 삼을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아우라도 엘리제도 찾지 않았다. 마치 여자 문제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사람처럼.

“테오. 사냥제 관련 서류.”

카를이 손을 내밀었다. 테오가 큼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그 건은 황후 폐하께 있습니다.”

황후 폐하라는 말에 카를이 멈칫했다.

“그게 왜?”

“대부분의 황궁 행사는 황후 폐하께서 살펴 주고 계시니까요. 저번 가장무도회도 황후 폐하께서 최종적으로 승인하셨습니다.”

“……소리 소문 없이 잘도 하는군.”

하지만 바로 그 소리 소문 없음이 일을 잘한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사냥제 건을…… 다시 이쪽으로 가져올까요?”

테오가 조심스레 물었다. 카를이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 황후가 관리하도록 둬.”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조쉬.”

“네.”

구석에 서 있던 조쉬가 한 걸음 나섰다.

“테인 공작가 집사의 흔적을 쫓는 일은?”

“군사를 풀어 확인하고 있습니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 집사가 수도를 떠날 당시 황태자의 개인 군사가 뒤를 쫓았다고 합니다.”

“그래? 아주 먼 곳으로 도망을 쳤거나 운이 나쁘면 죽었겠어. 계속 진행해.”

“네, 폐하.”

“테오. 엘리제 쪽은?”

카를은 테인 공작가에 감시인을 붙였다. 엘리제가 테인 공작 몰래 알현한 후 그녀의 신변이 걱정됐기 때문이다.

물론 카를은 그 이후 테인 공작을 한 번 더 불러들였다. 주로 겉핥는 이야기를 하며 엘리제 칭찬을 했다. 언젠가 그녀를 후궁으로 맞을 것처럼. 핀 이야기는 끝까지 꺼내지 않았다.

“다행히 큰일은 없는 듯합니다. 오히려 테인 공작이 더 기고만장해져서 엘리제 영애가 후궁이 될 거라고 장담을 하고 다닌다더군요.”

“엘리제가 날 만난 걸 모르는 모양이군.”

“네. 엘리제 영애가 그 사실을 용케 숨긴 듯합니다. 테인 공작의 감시는 여전한 듯하지만요.”

“그렇다면…… 테오, 엘리제 앞으로 사냥제 초청장을 보내. 사냥터에서 따로 만나 일이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야겠어.”

테오는 대답을 하려다가 멈칫했다.

“폐하, 그럼 사냥제 파트너는…… 누구와 하시는 겁니까?”

“…….”

“사냥터에서 엘리제 영애를 만난다고 하셔서요. 황후 폐하와 파트너를 하신다면 양해를 미리 구하셔야 할 테고, 파트너를 엘리제 영애와 하신다고 해도 황후 폐하의 양해를 구하셔야…….”

탁.

카를이 깃펜을 내려놓았다.

“보란 듯이 애인까지 둔 사람에게 내가 왜?”

“아…… 죄송합니다, 폐하.”

테오가 눈치껏 사과를 했다.

“피곤하군. 쉬어야겠어.”

카를은 소매의 커프스를 풀며 침실로 갔다. 문이 닫히자 두 참모는 서로를 멀뚱히 마주 보았다. 조쉬가 먼저 물었다.

“그래서…… 파트너는 누구와 하신다는 말씀이시지?”

“……나도 몰라.”

두 사람은 동시에 물끄러미 샛문을 바라봤다. 조쉬가 걱정스레 말했다.

“황후 폐하에 대해서 너무 신경을 안 쓰시는 거 아니야? 혹시 완전히 포기하신 거면 어쩌지?”

“스읍…….”

테오가 고개를 갸웃했다.

“내 생각엔 둘 중 하나인 것 같아. 너무 신경을 안 쓰시거나…….”

“안 쓰시거나?”

“너무 신경이 쓰이시거나.”

***

요즘 아우라는 루안과 종일 붙어 있었다. 수트라로 갈 계획을 세우는 것만 해도 시간이 빠듯했다. 그들은 듣는 귀를 의식하여 널찍한 정원에서 오래도록 산책을 했다.

오늘도 여러 이야기를 하다 보니 밤이 늦어 가고 있었다.

“루안, 적당한 무기를 하나 더 구할 수 있을까? 수트라로 가는 길이 험한데 검만으로는 불안해서.”

“적당한 무기라. 찾아볼게.”

“걱정이야. 내가 무예 쪽은 워낙 재능이 없어서.”

루안이 대뜸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뭐야, 왜 웃어?”

“어렸을 적 생각을 하니까 너무 귀여워서. 너 검 들어 올렸다가 뒤로 넘어진 적도 있잖아.”

“언제 적 얘길 하는 거야, 정말. 놀리지 마.”

아우라가 장난스레 그의 팔을 툭 쳤다. 루안은 그 반응이 더 귀여워서 또 한껏 웃곤 말했다.

“큼…… 그러면 가벼운 장거리 무기는 어때? 석궁이라던가.”

“석궁?”

“그래, 석궁.”

루안이 석궁을 쏘는 자세를 지어 보였다. 아우라는 바로 알아보았다.

“화살 쏘는 기계지? 한 번도 만져 본 적 없는데. 괜찮을까?”

“활보다는 배우기 쉬우니까. 힘도 덜 들고 가지고 다니기도 편해.”

“그럼 하나 사 볼게. 그러면 네가 가르쳐 줘야 해.”

루안이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지.”

그 시각, 카를은 침실 창가에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얄궂게도 그 방 창문에서 정원은 아주 잘 내다보였다.

뭐가 저렇게 좋은지. 할 말은 또 뭐가 저렇게 많은 건지. 아우라는 지나치게 많이 떠들고, 지나치게 자주 웃었다. 에밀의 팔을 장난스레 툭 치기도 했다. 카를은 황당할 지경이었다.

‘저런 장난도 칠 줄 알았어?’

그게 다가 아니었다. 에밀이 대뜸 석궁을 쏘는 자세를 취하니 아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뻔했다. 사냥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분명하지 않은가. 저렇게 못 죽어 붙어 다니니 당연히 파트너를 할 테고.

어이가 없었다.

‘그럴 작정이면 적어도 이쪽에 양해를 구하러 와야 하는 게 아닌가? 이대로 어물쩍 저놈과 파트너를 하겠다고?’

카를은 잔에 술을 채웠다.

“사냥제는 빌어먹을…….”

‘핀에 혼을 빼앗긴 줄 알았는데, 연애까지 하는 걸 보니 그건 또 아닌 모양이군.’

그렇게 한껏 빈정대며 커튼을 쳤을 때였다.

“……사냥제.”

그 단어에 괜한 기억이 떠올랐다.

아우라는 어떻게든 카사 황궁에 적응하고 싶어 했다. 어찌나 열정적이었는지 수많은 황궁 행사와 예법을 달달 외울 정도였다.

사냥제가 얼마 남지 않았던 날이었다. 두 사람은 도서관에서 마주 앉아 있었다. 카를이 아우라에게 물었다.

“1년에 한 번 사냥제가 열리는 날짜와 위치는?”

“7월 첫 보름달이 뜨는 날. 황궁 북쪽 훈트 산. 마물이 없어서 사냥하기에 좋고, 달이 밝아서 밤에도 덜 위험하니까.”

“맞았어. 참가 방법은?”

“부부가 한 쌍을 이룰 수도 있고, 개인으로도 가능해. 다만 미혼 영애는 파트너가 있는 게 일반적이야.”

“그것도 맞았어. 그럼 황실은 훈트 산에 어떤 시설을 지어야 하지?”

“사냥에 지친 사람들이 쉴 수 있는 작은 별장들. 별장은 귀족들의 수준으로 맞춰야 해. 그래야 귀족들이 마음 편하게 쉴 수 있을 테니까. 산 동서남북으로 입구를 만들고 나머지는 철망을 쳐서 마물을 막아야 하고, 또…… 말을 위협할 만한 맹수는 일찍이 몰아내거나 잡아 놔야 해.”

“흐음, 잘하네. 그럼 돌아오는 사냥제에서 나와 파트너를 할 거야?”

그때 아우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쿵, 쿵, 쿵, 쿵.

카를의 가슴이 세게 뛰었다. 그는 이런 낯간지러운 말에는 젬병이었다. 그러나 그날은 특별한 일이 벌어진지라 그도 애써 용기를 낸 것이었다.

그리고 아우라는 활짝 웃었다.

“당연하지. 좋아!”

“그럼 약속해. 난 약속하지 않으면 불안하니까.”

“그래, 약속할게.”

하지만 그들은 결국 사냥제에 함께 가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니아가 멸망했기 때문이었다.

카를은 잔에 술을 더 따랐다. 그 잔을 비우고 나서야 요즘 술이 늘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우라가 에밀을 애인으로 둔 후 특히 더.

그는 커튼을 살짝 들어 정원을 내다보았다. 아우라는 여전히 웃으며 에밀과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그녀의 어릴 적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듯했다. 둥글게 휘어지는 눈매와 부드럽게 올라가는 입매, 선한 눈빛까지도.

달라진 건 단 한 가지였다. 저 웃음이 다른 남자를 향해 있다는 것.

그는 커튼을 확 쳤다.

‘……좋아. 그놈의 ‘양해’는 내가 먼저 구하는 수밖에.’

본격적으로 사냥제 준비를 시작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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