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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53)화 (53/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53화

루안은 크게 놀라며 아우라에게 말했다.

“자세한 계획은 모르지만, 갑자기 그러는 건 무모할 수 있어.”

“뒤를 생각하면서 움직일 만큼 여유가 있는 게 아니야.”

“하지만.”

“괜찮아. 너는 여길 떠날 준비만 잘해 주면 돼.”

루안은 더 따지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우라는 말을 들어 줘서 고맙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루안이 진지하게 물었다.

“그럼 황제는?”

“카를?”

“그 역시 버리고 떠나는 거야?”

아우라가 멈칫했다. 그렇게 잠시 춤을 멈춘 찰나, 누군가가 아우라의 팔을 잡았다.

가면을 쓰고 있다지만 루안도 아우라도 그를 알아보았다. 그런 체구는 흔치 않았으므로. 검은 가면 안에서 빛나는 밤하늘 같은 눈도.

“재미있게 놀고 있는 것 같아서 보기 좋네, 아우라.”

가장무도회에서 공공연하게 이름을 부르는 건 반칙이었다. 눈치를 챘다고 해도 모르는 척해 주는 게 예의였다. 하지만 카를은 그런 룰 같은 걸 신경 써 줄 마음이 없는 듯했다.

이렇게 되면 루안은 아우라와 춤을 출 수 없다. 황궁에서 아우라를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자. 그건 황제뿐이니까.

아우라는 당황스러웠다.

‘이렇게 빨리 알아볼 줄이야. 게다가 옷까지 갈아입었는데.’

루안이 꾸벅 예를 차렸다.

“속 좋은 신임이로군. 기사 서임이 되자마자 춤바람이라.”

카를은 냉담하게 말했다. 그는 루안 역시 알아본 것 같았다.

“아쉽겠지만 노는 건 이쯤 해 둬.”

“아니, 카를.”

아우라는 버텼다. 계획을 실행해야 한다면 지금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루안이 의심을 받지 않고 황제군에서 나올 계획을. 물론…… 조금 껄끄러운 계획이었지만.

아우라는 얕게 심호흡을 했다.

“오늘은 에밀과 있고 싶어.”

“그게 무슨 소리지?”

아우라가 루안의 팔에 제 손을 살짝 얹었다.

“에밀이 내 애인이 되어 주기로 했거든.”

요란한 음악 소리만이 세 사람 사이를 흘러갔다. 카를은 아우라의 배 속까지 훑으려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

아우라는 루안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럼 에밀과 나는 산책을 좀 해야겠어.”

카를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너, 진심이야?”

“……왜 아니라고 생각해?”

아우라가 카를의 손에서 제 팔을 빼냈다. 두 사람은 유유히 무도회장을 빠져나갔다.

무도회장의 문이 여닫혔다. 음악은 시끌벅적했고, 사람들은 여전히 춤에 빠져 있었다.

카를이 가면을 벗고는 마른세수를 했다. 그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돌게 하네, 진짜.”

***

아우라와 산책로에 나온 루안은 겨우 놀람을 삼켰다. 그는 이제야 아우라의 편지가 이해되는 참이었다.

「그날 내가 내일 무슨 짓을 하건 놀라지 마. 부디 날 믿어 주길.」

‘이런 의미였구나.’

카사의 황족은 애인 문화에 관대했다. 그건 애인이 황족의 성적인 영역까지 넘볼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특히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황족일수록 배우자의 연애는 눈감아 주는 게 보통이었다.

다만 남자들만의 문화는 또 달랐다. 부인의 애인을 부하로 두는 건 우스운 일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황제는 루안을 황제군에서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아우라의 방법은 과격하고 확실했다. 루안 자신이 알던 아우라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두 사람은 산책로의 분수대에 앉았다.

쏴…….

분수대 소리가 요란했다.

“여기선 편하게 이야기해도 되겠어, 루안.”

아우라는 그간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핀의 정보와 한 조각의 핀을 얻게 된 과정을.

“힘들었겠다. 듣고 있자니 너무 안쓰러워.”

아우라는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어쨌거나 다음 핀을 얻으려면 라이언 대공에게 가야 해.”

“봉인을 푸는 방법은 어떻게 알아내려고? 호세라는 친구도 요즘 도통 연락이 없다며.”

“대공이 알고 있다고 했어. 믿을 만한 인간은 아니지만 지금으로선 그를 만나는 게 옳아. 그리고 왠지…….”

“……왠지?”

“핀에 대해서만큼은 진심 같았어. 어딘지 절박해 보였고.”

“네가 그렇다면 그런 게 맞을 거야. 넌 어려서부터 사람 마음을 잘 알아봤으니까.”

루안은 어린 아우라의 눈동자를 기억했다. 지금보다는 조금 더 연하고 투명했던 눈동자. 그 앞에선 어떤 거짓이나 가장도 소용없었다.

“그 후엔 엘리제라는 영애를 만날 거고? 그렇다면 결국 수도로 오게 되는 거잖아.”

“카를 몰래 들어와야지.”

“그럼 그 영애에게 먼저 핀을 얻고 수트라로 떠나는 게 낫지 않아?”

“그게…….”

아우라가 머뭇거렸다.

“속 좋은 생각이라고 하겠지만, 그럼 그 영애의 일이 꼬여.”

그렇게 말하는 아우라는 루안이 알던 예전 그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심성이 착해서 어려운 사람을 차마 모른 척하지 못했던 아우라로.

“……알았어. 그럼 수트라로 먼저 떠나자. 준비해 볼게.”

“그리고 루안.”

그녀가 루안의 손등을 잡았다.

“이건 위험한 일이야. 혹시…… 포기하고 싶어지면 언제든 말해도 돼.”

“너는 위험해도 끝까지 할 생각이잖아.”

“…….”

“그런 너를 지키는 게 내 일이야.”

아우라는 문득 왕녀 시절로 돌아온 듯한 기분을 느꼈다. 루안은 그런 따뜻함과 편안함을 주는 친구였다.

“그나저나 놀랐어. 애인이라고 하다니.”

“방법이 좀 과격했지? 미안.”

“아니야. 나는…….”

‘솔직히 말하면 한편으로는 기뻤지.’

그러나 루안은 그 말을 하지 않았다. 당장 할 일이 많은 아우라였다. 자신 때문에 혹여 마음이 복잡해지길 원하지 않았다.

“좀…… 걱정이 돼서. 황제가 어떻게 나올지.”

“널 황제군에 계속 둘 순 없을 거야. 분명 널 방출할 테고. 그러면 네가 널 내 기사로 임명할게.”

“그 과정이 쉬울 리가 없잖아.”

“네가 괴롭힘당하지 않도록 내가 어떻게든-”

“아니, 아우라.”

“……”

“나는 그가 너에게 어떻게 나올지를 걱정하는 거야.”

아우라가 멈칫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존심이 세고 워낙 계산적인 사람이야. 화가 나도 냉담하게 굴겠지. 아까 파티장에서도 봤잖아.”

그녀의 말처럼 카를은 아우라를 얌전히 보내 주었다. 질투나 분노를 보이며 그들을 몰아붙이지도 않았다. 그는 확실히 냉소적인 사람 같았고, 여자 문제에 무관심해 보였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아우라를 보던 집착적인 눈빛. 루안은 그게 마음에 걸렸다.

아우라는 루안의 마음을 안다는 듯 그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루안, 내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 의연한 말에 루안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이 상황에선 이렇다 할 해결 방법이 없었으므로.

“하아……. 수트라건 어디건 빨리 떠나자, 아우라.”

“그래. 그래야지.”

“방까지 데려다줄게. 바람이 차다.”

“그래. 가자, 루안. 아니, 에밀.”

“네, 황후 폐하. 가시죠.”

두 사람이 분수대에서 일어났다.

***

본궁으로 들어서며 두 사람을 가면을 벗었다. 이미 자정이 넘은 본궁엔 당직 시녀들만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복도 모퉁이를 돌 때였다. 황후의 방 앞에 서 있는 이를 본 두 사람이 동시에 멈칫했다. 그곳에는 카를이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었다.

아우라는 당황스러웠다.

‘설마 이 늦은 시간까지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카를뿐만 아니었다. 그의 뒤에는 조쉬와 테오 역시 바짝 긴장한 채 서 있었다.

아우라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이 밤에 무슨 일이야?”

“몇 가지 해 둘 말이 있어서.”

카를이 천천히 루안 쪽으로 다가왔다. 루안은 침착하게 고개를 숙였다.

“넌 황제군에서 파면이다. 내가 버렸으니 황후가 알아서 주워 가겠지.”

“……네, 폐하.”

“그리고 황실이 황족의 애인을 눈감아 준다고는 하지만 분명한 선이 있어. 이를테면 너는 저 문을 넘을 수 없지.”

카를이 턱짓으로 황후의 방을 가리켰다.

“황후가 적적할 때 말벗이나 해 주도록.”

“카를, 내 말벗은 내가 알아서 가르쳐.”

아우라가 그만하라는 듯 루안의 앞을 막아섰다. 카를이 여전히 루안을 보며 말했다.

“황후와도 할 말이 있는데. 그대가 자릴 좀 피해 줘야겠군.”

루안이 묵묵히 물러났다. 그러자 카를이 아우라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합궁일을 바꿨어. 원래는 다음 주였는데 오늘이어도 상관없다는군.”

“!”

‘이렇게 나온다고?’

아우라가 기가 막힌다는 듯 카를을 보았다. 그리고 그에게 똑같이 속삭였다.

“내가 원하지 않으면 그럴 수 없어.”

“맞아. 다만 여기서 그 문제를 논쟁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

뒤에는 루안이 있었다. 아우라는 주먹을 꽉 쥐었다가 이내 한숨을 쉬었다. 카를의 분노는 어차피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 싸워도 방에서 싸우는 게 나았다.

“나머지 이야기는 들어가서 하시죠, 폐하.”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에밀은 잘 들어가고. 오늘 즐거웠어.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지.”

“네, 폐하.”

카를와 아우라가 황후의 방으로 들어섰다. 이윽고 중간 복도의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멀리 서 있던 조쉬가 루안에게 달려들었다.

“이런 미친 자식!”

주먹을 치켜드는 조쉬를 테오가 겨우 뜯어말렸다.

“조쉬, 진정해.”

“저런 개자식! 내가 저런 놈을 신임이라고 챙기고……!”

“야! 그만하라니까!”

어쨌건 황후의 애인이었다. 함부로 했다간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다.

테오가 조쉬를 겨우 말려서 끌고 갔다. 그러나 테오 역시 루안에게 한마디 쏘아붙였다.

“넌 앞으로 폐하와 우리 앞에 절대 나타나지 마라. 우리 군의 기강이 더러워지니.”

“……명심하겠습니다.”

“저, 저게-! 뚫린 입이라고!”

조쉬가 다시 달려들려 했다. 테오가 질린다는 얼굴로 그의 등을 퍽퍽 쳤다.

“아, 좀! 진정 좀 해!”

루안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여기 더 있다간 좋은 꼴을 못 볼 게 뻔했다.

그는 고위 귀족가의 장남이었다. 제니아의 멸망 이후엔 귀족 젊은이들을 이끌었다. 이런 모욕적인 취급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다 아우라를 위한 일이니.

그가 마음에 걸리는 건 굳게 닫힌 황후의 방문이었다.

그 방문은 좀처럼 다시 열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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