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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52)화 (52/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52화

신임 기사 임시 숙소.

루안은 샤워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왁자지껄하던 기사들이 한순간에 입을 다물었다.

그가 모든 부문에서 1등을 한 것까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이렇다 할 예고도 없이 황제군이 되다니. 기사들의 시기를 받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루안에겐 따돌림 같은 건 고민거리도 아니었다. 그는 제 침상에 앉아 상황을 정리했다.

‘하필 황제의 직속 기사가 되다니.’

이것만큼 최악이 없었다. 단순히 카를이 껄끄러워서가 아니었다.

‘황제군은 황제와 동료 기사들과만 어울릴 수 있어. 아우라와 만나기조차 힘들 거야. 그녀를 위해 움직이는 것도.’

서임식에서 아우라를 보고 겨우 반가운 마음을 숨겼다. 예전에 안센나에서 만났을 때보다 안색이 좋아져서 안심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바로 위기를 맞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습관처럼 주머니에 손을 넣어 작은 금단추를 만졌다.

‘방법이……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분명.’

아우라가 그냥 물러났을 리가 없다. 연무장을 떠날 때 아우라는 분명 루안에게 살짝 눈짓을 했다. 그녀를 오래 봐 왔던 루안은 알 수 있었다. 그녀에게 뭔가 생각이 있다는 것을.

“에밀, 에밀 있나?”

임시 숙소 천막을 걷고 조쉬가 들어섰다. 루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여기 있습니다.”

“짐 싸. 황제군 숙소로 간다.”

“지금 말입니까?”

“작별 인사할 시간이라도 줘?”

“아, 아닙니다.”

기사들의 서늘한 시선을 받으며 루안이 짐을 챙겼다. 그는 조쉬를 따라 황궁을 걸었다. 여름밤에도 밤공기는 서늘했다.

“듣기론 집안이 변변찮다지? 혹시 누가 텃세를 부리거든 내게 일러. 못난 놈들은 맞아야 정신을 차리거든.”

“……예, 감사합니다.”

조쉬가 루안을 슬쩍 보았다. 달빛을 받은 얼굴이 처연했다.

“……흠.”

“왜 그러십니까?”

“정말이지…….”

조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지만, 사실 널 두고 황제 부부께서 경쟁을 벌이셨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황후 폐하께서도 널 당신의 기사로 삼고 싶어 하셨어.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 널 황제군으로 넣으셨지.”

“아…… 그랬군요.”

“웬만해선 황후 폐하의 요구를 들어주셨을 텐데, 널 보니 황제 폐하의 입장도 이해가 간다.”

루안은 황제의 입장이라는 게 대체 뭘까 싶었다. 얼마나 대단한 입장이기에 부인이 원하는 기사를 빼앗을 수 있는지. 그의 상식으론 납득하기 어려웠다.

“두 분께서 많이 다투셨나요?”

“다투시는 거야…… 뭐, 자주 있는 일이지. 너도 황제 폐하를 가까이에서 모시게 되면 곧 알게 될 테지만.”

조쉬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도 뭐랄까. 자주 싸우시긴 해도 묘하게…… 가까워지시는 느낌이 난단 말이지. 모르겠다. 남녀 관계는 내 분야가 아니라서.”

루안으로선 반갑지 않은 말이었다. 그렇게 뜨겁게 싸우느니 차가운 무관심이 훨씬 나았다.

‘핀 때문에 싸우는 거겠지. 설마하니 아우라가 황제와 감정놀음을 하려고.’

그들은 황제군 숙소로 갔다. 숙소는 놀랍게도 독방이었다. 여타의 기사단 숙소와는 비교도 안 되게 좋았다.

루안은 짐을 풀었다. 하루가 너무 길어서 일단은 어서 자고 싶었다.

‘내일은 아우라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

똑똑.

그때 노크가 울렸다.

“들어오십시오.”

문이 슬쩍 열리고 어린 시녀가 들어섰다. 루안이 말했다.

“아, 지금은 도와주실 게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시녀가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앞치마 주머니에서 쪽지를 하나 꺼냈다. 그녀는 쪽지를 침대 끄트머리에 놓곤 방을 나섰다.

순간 루안의 등에 소름이 번졌다.

‘황궁이란 이런 곳이군.’

은밀한 쪽지가 오고 가는 곳. 말단 시녀조차 그런 일을 능숙하게 해내는 곳. 그런 곳에 자신이 발을 들였다는 실감이 확 들었다.

루안이 쪽지를 열어 보았다. 웬 금화와 함께 짧은 글이 적혀 있었다.

「걱정하지 마. 널 내 곁으로 데려올 테니까.

사흘 후 황궁에서 가장무도회가 열려. 이 돈으로 옷과 가면을 사. 그리고 무도회장 서쪽 문 앞에서 날 기다려. 그날 내가 무슨 짓을 하건 놀라지 마. 부디 날 믿어 주길.」

그건 아우라가 루안에게 보낸 밀서였다.

“가장무도회라…….”

루안은 창밖을 보았다. 드넓은 황궁이 반짝이고 있었다.

“기대되네.”

***

며칠 후.

가장무도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황궁은 하나둘 모이는 귀족들로 시끌벅적했다.

한편, 본궁 황제의 방에 황궁의가 들렸다.

“팔을 앞뒤로 움직여 보시겠습니까?”

황궁의의 말에 카를이 팔을 움직였다. 어깨에 미약한 걸리적거림이 느껴졌지만 통증은 없었다.

“괜찮은 것 같군.”

“그래도 좀 더 확인해야 합니다. 오늘 업무가 없으신 김에 시간을 좀 더 내어 주시지요.”

가장무도회 때문에 시간을 비워 둔 걸 두고 한 말이었다. 카를이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진료를 자주 미뤄서 그런지 황궁의가 잔뜩 벼르고 있었다.

“오래 걸리나?”

“조금은요.”

카를은 탁상시계를 슬쩍 보았다. 파티에 제시간에 가려면 지금부터 준비해도 빠듯했다.

‘하는 수 없군. 좀 늦게 가는 수밖에.’

“테오.”

“네, 폐하.”

“황후에게 가서 오늘 무도회에 좀 늦을 것 같으니 먼저 가 있으라고 전해.”

“네, 폐하.”

테오는 방에서 나서려다가 카를에게 말했다.

“황후 폐하의 복장도 함께 알아 오겠습니다.”

“복장은 왜?”

“가면무도회는 정신이 없으니까요. 다들 복장도 화려하고 가면까지 쓰고 있어서 도중에 들어가시면 황후 폐하를 찾기 어려우실 겁니다.”

카를이 피식 웃었다.

“마음대로 해.”

테오가 떠난 후 카를은 황궁의에게 어깨를 맡겼다. 황궁의가 어깨를 이리저리 만지자 뻐근함이 밀려왔다. 그 와중에도 아우라에게 들었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카를, 너 후회할 거야.’

그녀가 그런 적의를 드러낸 건 꽤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만큼 그 기사를 원했을 거라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고작 그자 때문에 자신의 태연함을 버리고 날을 세웠다면…….

‘그건 그것대로 기분이 나쁜 일이지.’

어쨌거나 오늘 무도회도 아우라가 그냥은 넘어가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할지 감도 안 잡히는군.’

***

오후부터 많은 귀족 부인이 아우라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함께 가면무도회에 가고 싶다는 요청들이었다. 

아우라는 평소 귀족들과 필요한 만큼만 어울렸다. 그러나 가면무도회는 말 그대로 ‘파티’였다. 그녀들의 말처럼 우르르 몰려가 놀아도 좋을 거였다.

하지만 아우라는 그 요청을 모두 거절했다. 그녀에게는 노는 것보다 더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폐하, 황제 폐하의 수석 보좌관이 찾아왔습니다. 들일까요?”

미나의 말에 아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막 붉고 풍성한 드레스를 다 차려입은 차였다.

이윽고 테오가 방으로 들어왔다.

“폐하, 오늘 황제 폐하께서 어깨 진료를 받으시느라 무도회장에 조금 늦게 가신다고 합니다. 먼저 무도회장으로 가시면 찾아가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요?”

‘어깨가 아직도 아픈가.’

아우라는 화장대의 검은 가면을 만지작거렸다. 가면에 달린 깃털을 다듬으며 그녀가 말했다.

“알았습니다. 먼저 가 있죠.”

“예. 그럼 가 보겠습니다.”

테오는 공손히 인사를 하고 방을 나섰다.

아우라는 테오가 나간 문을 잠시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뭔가를 결심한 듯 미나를 불렀다.

“미나.”

“네, 폐하.”

“여분의 드레스가 한 벌 더 있지?”

“네? 네. 남색으로 한 벌 더 있긴 합니다만…….”

가장무도회에선 사고가 자주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그것을 대비하여 준비한 드레스였다.

“그걸로 갈아입어야겠어.”

“하지만 붉은색이 더 마음에 드신다고…….”

“그럴 일이 있어. 어서.”

미나가 얼른 그녀의 뒤로 가서 단추를 풀었다. 아우라는 생각했다.

‘되도록 카를에게 늦게 발견되어야 해.’

아우라는 남색 바탕의 은빛으로 반짝이는 드레스를 입었다. 풍성했던 붉은 드레스와 반대로 이번 드레스는 그녀의 몸 선을 따라 떨어졌다. 그녀는 가면 역시 드레스에 맞게 흰 것으로 바꿨다.

잠시 후, 아우라는 무도회장으로 향했다. 정체를 밝히지 않기 위해 미나를 데려가지도 않았다.

아우라가 무도회장의 서쪽 문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이미 루안이 약속한 장소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 역시 남색 연미복을 입고 있었다. 그의 검은 가면 속에서 녹색 눈동자가 빛났다.

“에밀.”

아우라를 본 루안이 가면 아래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눈으로 잠시 아우라를 보았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차분하게 말을 건넸다.

“건강해 보이셔서 마음이 놓입니다.”

“……너도. 걱정 많이 했어.”

“저는 괜찮습니다. 보시다시피요.”

아우라가 그의 가명을 부르는 것처럼 그도 말을 높였다. 이 가장무도회의 연극 놀이처럼.

루안이 팔을 내밀었다. 아우라도 자연스럽게 그 팔을 잡았다.

“들어갈까요?”

“그래.”

무도회장에 들어가자 아우라는 들고 있던 부채를 펼쳐 얼굴을 가렸다. 사람들은 정신없이 춤을 추고 있었다. 얼굴과 함께 체면까지 가린 것처럼 다들 거침이 없었다.

북적거리는 사람들과 신나는 음악이 그들을 둘러쌌다. 두 사람도 춤을 추기 시작했다. 곧잘 리듬을 타는 루안에게 아우라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춤은 여전히 잘 추네. 우리 어렸을 때 항상 같이 췄잖아.”

“왕녀 시절에 제 발을 많이 밟으셨죠.”

“하하…… 지금도 별반 다를 바 없어.”

“밟아도 돼.”

루안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나랑 있을 땐 조금 더 편했으면 좋겠어.”

아우라는 이미 편했다. 이 황궁에 든든한 아군이 생긴 것 같았다.

루안이 아우라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그래서, 이제 난 뭘 하면 되지?”

“수트라로 가야 해. 그 준비를 해 줘.”

“수트라?”

“자세한 건 둘이 있을 때 이야기해 줄게.”

“알았어. 그나저나 ‘간다’는 건…….”

아우라가 뒤꿈치를 들고 루안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황궁을 버리고 떠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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