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50)화 (50/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50화

후궁이란 말에 아우라의 눈빛이 흔들렸다. 지금까지 그녀를 지탱하던 태연함이 순간 휘청인 듯했다.

“왜? 싫어?”

카를이 희미한 웃음을 띠며 물었다.

아우라는 한동안 말을 고르듯 망설였다. 그리고 질문 하나를 어렵게 던졌다.

“……그 영애에게 끌려?”

“그렇다면?”

아우라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녀는 가는 한숨을 내뱉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카를이 그 손을 억지로 펴 잡았다. 그 작은 손에 땀이 배어 있었다.

카를이 집요하게 물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건데?”

“…….”

“이번에도 날 사랑한다고 해 줄 거야?”

장난인 듯 마음을 할퀴는 조롱이었다. 그리고 아우라는 그 공격에 대항하지 않았다.

“아니. 맞고 싶으면 맞아.”

카를의 미간에 미세한 실금이 갔다.

“침대로 가자.”

“…….”

“어서 가서 날 재워 줘야지, 아우라.”

“카를, 오늘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뻔했다. 아니, 카를은 그 마음의 소리까지 들리는 듯했다.

오늘은 돌아가. 오늘은 너 혼자 자. 오늘은 날 혼자 둬. 오늘은 더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 어려우니까. 오늘은, 오늘도 너 따위에게 동요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을 거야, 카를. 나는 널 떠날 준비를 하나씩 하나씩 하고 있으니까.

그 소리가 듣기 싫어 카를이 아우라에게 입을 맞췄다. 아우라가 바로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그는 부목을 털어 내듯 떼어 내고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

아우라는 자유롭게 움직이는 그의 팔을 보고 놀랐다. 그리고 그 순간 카를이 그녀를 소파에 눕혔다.

“……어깨가…….”

“다 나았어. 벌써 며칠 됐지.”

카를이 아우라의 손을 하나씩 잡고 그녀의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소파에 그녀의 손을 누르는 힘. 그 양손의 힘이 거의 비슷했다. 아우라는 손을 빼 보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놔, 카를.”

“아우라. 나는 절대 네가 핀을 다 모으게 두지 않아.”

“…….”

“이 게임에서 넌 절대 나를 못 이겨.”

“…….”

“네가 나를 수십 번을 속인다고 해도 너는…… 절대 그럴 수 없어.”

절대, 절대, 절대. 그 단단한 단어들이 아우라의 가슴을 치고 지나갔다. 아우라는 이를 꽉 물고 그를 쏘아보았다. 카를이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내 어깨 하나 나은 것도 몰랐으면서. 이렇게 순해 빠져서야.”

“이다 나았으면 나가. 내가 더 해 줄 건 없어.”

“……싫다면?”

카를은 그녀를 놀리는 듯했다. 아우라는 모욕감에 가슴이 크게 오르내렸다. 그리고 순간 속에서 울컥 튀어나온 뭔가를 뱉어 내듯 그에게 말했다.

“이런 짓은 엘리제에게나 해.”

“뭐?”

“후궁으로 맞을 거라며. 네가 끌리는 여자에게나 해.”

아우라의 눈에 눈물이 고여 갔다. 그건 두려움이나 모욕감 때문이 아니었다. 카를도 그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카를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

“후궁을 맞고 싶으면 맞으라며.”

“…….”

“그래 놓고 대체 왜 울어.”

눈꼬리에 고인 눈물이 조용히 흘렀다. 아우라도 그 눈물처럼 말이 없었다. 카를은 그녀를 더 붙잡고 있을 수가 없었다. 결국 손을 놔주고 일으키려 할 때였다.

탁.

아우라가 그의 손을 쳐 내곤 돌아누워 버렸다.

“나가 버려.”

더는 꼴도 보기 싫다는 태도에 카를도 울컥했다. 그녀가 바라는 대로 소파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문득 그녀의 관자놀이에 남은 눈물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미치겠네, 정말.’

카를은 엄지로 그녀의 관자놀이를 닦아 주었다.

“끌린 적 없어.”

“…….”

“후궁 따위를 두지도 않아.”

아우라는 여전히 소파 등받이만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카를은 참으로 알 수가 없었다. 후궁을 두는 게 싫어서 울었던 게 아니었나. 그럼 적어도 안도할 수는 있는 것 아닌가. 아니면 왜 거짓말을 했냐고 화를 내거나.

‘뭘 원하는 건지 알 수가 있어야 말이지.’

카를은 아우라를 안아 들었다. 갈 땐 가더라도 소파에 두고 갈 순 없었다.

아우라는 인형처럼 그에게 들려서 침대로 왔다. 그는 아우라를 눕히곤 이불을 덮어 주었다. 아우라가 또 몸을 돌려 등을 보였다.

카를은 그런 그녀의 어깨를 한 번 쓰다듬었다. 사과건 대화건 내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그렇게 돌아섰을 때였다. 물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뭐?”

“네가…… 엘리제에게 끌릴 수도 있으니까.”

“그런 적 없다고 분명-”

“웃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어.”

“…….”

“내가 잃은 걸 가지고 있잖아.”

“…….”

“너도 그걸 눈치챈 것 같아서…….”

그래서 울었어.

아우라는 마지막 말을 삼켰다. 입 밖으로 냈다간 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녀 스스로 잔인하게 표현하자면, 그건 열등감이었다. 혹은 돌아갈 수 없는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상실감. 엘리제의 사랑스러운 미소를 볼 때마다 그런 것들이 몰려왔다.

아우라는 그런 것들을 당연히 카를도 느꼈을 것 같았다. 혹은 언젠가 느끼게 되거나.

카를은 말없이 돌아섰다.

달칵.

침실 문이 여닫혔다. 아우라는 몸을 좀 더 작게 웅크렸다.

***

이른 아침.

아우라는 테라스의 테이블에서 간단한 아침을 먹고 있었다. 제철 과일과 치즈, 갓 구운 빵, 커피와 같은 것들을 기계적으로 집어 입에 넣기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날씨는 아주 맑았다. 요즘 훌쩍 강해진 햇살은 그녀의 어깨를 따뜻하게 데워 주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울리더니 미나가 들어왔다.

“폐하, 오늘 자 신문이 왔는데요. 드릴까요?”

“응, 줘.”

아우라의 대답에 미나가 슬쩍 눈치를 보았다.

‘오늘은 기분이 어째 안 좋아 보이시네.’

미나는 얼른 들어와 테이블에 신문을 올려놓고 나갔다.

아우라는 신문을 펼쳐 보았다. 이런저런 시시한 기사들이 지나갔다. 그녀는 토마토를 씹으며 무표정하게 기사를 훑었다.

그러던 중 한 기사에 그녀의 시선이 닿았다.

황궁에 들어올 새로운 기사들의 명단이었다. 열댓 명의 명단 끄트머리에 적힌 이름.

[에밀 머린]

‘설마…….’

‘에밀’은 루안의 아명이었다. 제니아에서는 첫 생일까진 아이를 아명으로 불렀다. 유아 사망률이 높아 제대로 된 이름을 그 후에야 붙이기 때문이었다.

‘머린은 모르는 성이야. 적어도 고위 귀족이거나 수도의 귀족은 아니란 뜻이고. 더 알아보긴 해야겠지만 루안이 신분을 세탁했다면 그럴듯해.’

아우라는 신문을 접었다. 그리고 다시 식사를 하려다가 문득 어제 이 시간의 일이 떠올랐다.

‘내일 먹어.’

‘어?’

‘아침 식사. 그러면 되잖아.’

카를은 아우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분명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때도 사실 어깨가 다 나은 상태였다니. 아우라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바로 사그라들었다.

그녀는 저 멀리 황궁 밖을 바라보았다.

‘루안이 오면 바로 움직이자. 수트라로.’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야 했다. 카를의 곁에 있으면서 몰라도 될 것들을 너무 많이 알게 됐다.

마음과 다르게 점점 익숙해지는 누군가의 몸. 그 몸이 다쳤을 때 심장이 철렁 내려앉던 느낌. 고작 아침 식사를 함께하지 못하자 밀려오던 아쉬움. 평생 느껴 본 적 없던 열등감. 끌리지 않았다는 말에 들었던 비참한 안도감.

아우라는 이 모든 것에게서 달아날 작정이었다.

***

날씨는 금세 초여름이 되었다. 아우라가 더운 집무실 대신 정원에서 업무를 보는 일이 잦아졌다.

오늘도 서류를 들고 정원에 나간 아우라가 뭔가를 보고 놀랐다.

“저게 뭐야?”

“짠! 놀라셨죠?”

미나와 시녀들이 까르르 웃었다. 느티나무 그늘에 포근해 보이는 흔들의자가 있었다. 아우라가 홀린 듯 흔들의자로 다가갔다.

“설마 너희가 준비한 거야?”

“네. 요즘 매일 정원에서 업무를 보시니까요. 딱딱한 티 테이블 의자보다는 이게 나을 것 같아서요.”

“세상에, 정말 고마워.”

“시원한 차를 드릴게요. 한번 앉아 보세요.”

시녀들이 반짝반짝한 눈으로 아우라의 반응을 기다렸다. 아우라는 흔들의자에 앉았다. 앞뒤로 천천히 움직이며 균형을 잡는 게 재미있었다. 등받이에 두툼한 천이 깔려 있어 푹신하기도 했다.

“너무 좋다. 이제부터 업무는 여기서 봐야겠어.”

그 말에 시녀들은 해냈다는 듯 저들끼리 좋아했다.

아우라도 알고 있었다. 요즘따라 우울한 그녀를 위해 미나와 시녀들이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는 것을. 발길을 뚝 끊은 카를 이야기를 굳이 하지 않는 것만 봐도 그랬다.

미나가 차가운 차를 가져와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차 여기 있어요, 폐하. 그럼 저희는 일 보시게 비켜 있을게요.”

“고마워, 미나.”

아우라는 미나의 손목을 살짝 잡았다. 미나가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마음 같아선 미나도 데리고 수트라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곳에서야말로 어떤 일이 생길지 몰랐다. 동생이 셋이나 있는 가장을 데려갈 곳은 아니었다.

‘황궁을 나갈 때 미나가 추궁을 받지 않게 잘 손을 써야겠지.’

시녀들이 다 물러난 후 아우라는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서류를 살펴보던 그녀가 뭔가를 발견했다.

“가장무도회라…….”

테오가 올린 가장무도회 기획안은 꼼꼼하고 실감 났다.

‘테오가 일을 잘하네. 좋은 신하야.’

아우라는 그것을 읽으며 가장무도회를 떠올렸다. 어두운 밤의 정신없는 무도회장. 화려한 가면과 복장들. 은밀하게 눈빛을 교환하는 남녀들. 보통 무도회보다 시끄럽고 요란한 음악.

‘여름밤과 딱 어울리네. 가장무도회면 카를과 만나도 못 알아보려나.’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다가 아우라는 눈을 감았다. 그늘이 시원해서일까. 잠이 몰려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뒤로 젖혀 있던 아우라의 몸이 서서히 앞으로 쏠렸다. 이상함을 느낀 그녀가 눈을 떴다.

“……아.”

아우라는 꿈을 꾸는 줄 알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카를이 눈앞에서 그녀를 보고 있을 리 없으니까.

아우라는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일렁이던 시야가 다시 초점을 잡았다. 그래도 카를은 사라지지 않았다.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아우라가 그의 눈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건. 햇빛을 받은 검은 눈동자 저 안쪽에서 보랏빛이 도는 듯했다.

그는 흔들의자의 손잡이를 꾹 누르고 있었다. 그렇게 의자를 고정한 채 카를이 입을 열었다.

“일어났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