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49화
“그래서 원하는 게 뭐지? 엘리제.”
“제 아버지의 유언장입니다. 그것을 찾는 걸 도와주십시오.”
“선대 공작은 유언장을 남기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엘리제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몸이 노쇠하실 무렵부터 종종 제게 유언장을 써 두셨음을 밝히셨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아침…… 거짓말처럼 급사하셨고, 유언장의 행방은 알 길이 없습니다.”
급사. 어쩌면 테인 공작이 손을 썼을지도 몰랐다. 황태자가 함께 그 증거를 인멸했을 테고.
“유언장 안에 뭐가 있다고 생각하지?”
“후대 공작을 지명해 두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확신하는군.”
“저만큼 제 아버지를 잘 아는 사람도 없으니까요.”
“그럼 유언장의 행방에 대해…… 짐작 가는 바도 없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저희 가문에서 평생을 일했던 집사가 실종되었습니다. 그가 가지고 나가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나마 다행이군. 유언장을 찾는 것보단 사람을 찾는 게 나으니.”
“그 집사는 제 아버지와 둘도 없는 벗이기도 했습니다. 제 짐작으로는 삼촌이 유언장을 없애려는 걸 알고 가지고 도망을 갔다가 무슨 일이 있어 돌아오지 못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혹은 죽었을 수도 있지.”
“……그럴 수도요.”
카를이 턱을 괴고 엘리제를 보았다. 손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내색하진 않아도 많이 긴장한 듯했다.
“삼촌 몰래 수소문해서 집사를 찾아보긴 했으나 이렇다 할 결과를 얻진 못했습니다. 제 역량으론 한계가 있어 이렇게…….”
부탁을 드리려 합니다. 엘리제는 이렇게 말하려다가 말을 고쳤다.
“폐하께서 저를 도와주신다면 그 대가를 바치겠습니다.”
카를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웃어넘길 일은 아니었다. 일만 잘 풀리면…… 공작가도 제자리를 찾고 핀을 얻을 수도 있었다.
“내가 뭘 원하는지 알고?”
엘리제가 침을 꿀꺽 삼켰다. 황제는 은연중에 그녀에게 원하는 게 있음을 밝히고 있었다.
“원하는 게 있으십니까?”
“테인 공작은 핀이라는 작은 수정구의 조각을 하나 가지고 있어. 알고 있나?”
핀이라는 말에 엘리제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는 자신의 손가락 두 마디 정도를 가리켰다.
“이…… 정도 되는 조각을 말씀하시는 게 맞습니까?
카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봤던 핀도 딱 그 크기였다.
“맞는 듯하군. 그걸 가져다줄 수 있겠나?”
“…….”
“그러면 황실이 최선을 다해 영애의 공작 위 계승을 돕지.”
“그건…….”
엘리제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시선을 돌렸다. 계획에 생각지도 못한 차질이 생긴 듯했다.
“왜? 곤란한가?”
“그것은 황후 폐하께 드리기로 이미 약속했습니다.”
“……뭐?”
“폐하와의 알현을 돕는 조건으로요.”
***
한 시간 전.
아우라는 엘리제를 데리고 정원으로 나섰다. 봄꽃이 만발한 정원이 아름다웠다.
엘리제는 앞서가는 아우라의 뒷모습을 보았다. 곧은 등과 살짝 치켜든 고개, 그와 반대로 차분히 깔린 시선. 단정하면서도 흔들림 없어 보였다.
“날씨가 많이 좋아졌지? 이번 겨울은 유난히 혹독했는데.”
엘리제는 말을 골랐다. 아우라가 한겨울을 탑에서 보낸 걸 생각하며.
“네. 봄이 온 건 기쁜 일입니다.”
아우라는 속으로 웃었다.
‘겨울을 물었는데 봄을 대답하네.’
유난을 떨지 않는 배려였다. 머리가 좋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사교장에 내놓으면 사교술도 대단하리라.
“엘리제 영애. 그래서 카를을 급하게 만나야 하는 이유가 뭐지?”
아우라가 멈춰 서서 흰 백합을 손끝으로 쓸었다.
“솔직하게 말해. 그래야 내가 영애를 도울 수 있으니.”
엘리제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사연을 말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아우라에게는 왠지 그래도 될 것 같았다.
공작가의 유언장과 집사의 이야기가 백합밭에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여기까지입니다.”
“…….”
가만히 듣고 있던 아우라가 백합을 뚝, 땄다. 식물의 섬유가 끊어지는 소리에 엘리제는 소름이 끼쳤다.
“영애에게 딱히 승산이 없는 싸움인 것 같은데. 그럴 바엔 후궁이 되어서 마음 편하게 사는 게 좋지 않아?”
“그것은 제가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왜? 후궁으로는 마음에 안 차? 황후라면 달랐을 것 같고?”
아우라가 백합의 향기를 맡았다. 향이 좋은지 그녀는 살짝 미소 지었다.
아우라의 질문은 마치 상대를 떠보는 듯했다. 하지만 엘리제에게는 다르게 들렸다.
황후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건 오히려 아우라 같았다. 마치 그 자리를 엘리제가 가져가도 받아들일 것처럼. 또 자신은 언제든 떠날 것처럼.
엘리제는 문득 아우라에게 그런 쓸쓸함을 느꼈다. 그래서 더 마음을 다해 자신을 밝히고 싶었다.
“저의 부친은 40여 년을 테인가 공작으로서 영지를 위해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분의 유일한 핏줄입니다. 그러므로 테인가의 가업을 이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의무라.”
“그게…… 제가 테인가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유니까요.”
엘리제가 해사하게 웃었다. 아우라가 백합을 든 손을 툭 떨어뜨렸다.
그러지 않으려 해도 엘리제에게 자꾸만 예전의 자신이 보였다. 제니아를 위해 기꺼이 정략결혼을 받아들였을 때의 자신. 그때의 아우라처럼 엘리제는 순수하고 용기 있었다.
아우라는 묘한 상실감을 느꼈다. 그건 돌아갈 수 없는 시절에 아쉬움과 그리움이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아우라가 말했다.
“도와주지.”
“……예?”
“카를을 만나게 해 주겠어. 테인 공작보다도 먼저.”
“황후 폐하…… 감사합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어.”
엘리제가 바짝 긴장했다.
“그게 무엇입니까?”
“핀이라는 수정구가 있어. 그 수정구는 세 개로 조각난 상태지. 그중 하나가 테인 공작가에 있는 것 같은데, 영애는 알고 있나? 아마도 부채꼴 모양일 텐데.”
“아, 예. 삼촌이 금고에 둔 물건입니다.”
‘역시 테인 공작에게 있었군.’
“그래. 영애는 그게 어떤 물건인지 알고 있나?”
“아니요. 알지 못합니다.”
거짓을 말하는 눈은 아니었다. 거짓을 말할 사람도 아닌 것 같지만.
아우라는 오늘 밤 당장 훔쳐 오라고 하고 싶었다. 카를을 만나게 해 주면 그뿐, 나머지 사정은 알 바 아니니까.
그러나 그렇게 되면 엘리제가 많이 곤란할 거였다. 핀을 훔치는 순간부터 테인 공작과 전면전을 해야 할 테니.
“영애가 공작저를 나오거나 공작 위를 이어받았을 때, 그때 내게 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엘리제는 망설였다. 그 수정 조각은 테인 공작 개인의 물건이었다. 그런 물건을 담보로 걸어도 되는 걸까.
하지만 이내 마음을 굳혔다. 그녀 역시 더는 물러날 곳이 없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엘리제, 이건…….”
아우라는 엘리제의 손을 잡았다.
“약속이야.”
엘리제가 홀린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우라가 그녀의 손을 놓고 정원의 출구를 향했다.
“따라와. 이제 카를을 만나러 가야지.”
“저…… 황후 폐하. 정말 그 수정 조각이면 되는 것입니까?”
엘리제가 보기엔 그 수정 조각은 작고 사소했다. 제국의 황후가 탐낼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걸어가던 아우라가 뒤를 돌았다.
“지금 내겐 그 수정 조각이 전부야.”
***
카를은 황후의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깨를 다친 후 매일 밤 그랬던 것처럼.
“하.”
오늘 일을 생각하면 실소가 튀어나왔다.
‘테인 공작가에 핀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니.’
어쩐지 아우라가 엘리제를 돕는다 싶었다. 실상은 중간에서 엘리제를 빼돌린 것일 줄이야.
그녀는 마치 카를과 경쟁하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보란 듯이 그랬을지도.
“어디 한번 해보자 이건가.”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물론 카를도 엘리제를 그냥 보내진 않았다.
알현실에서 카를과 엘리제는 잠시 서로를 응시했다.
“엘리제. 핀의 조각을 황후에게 주기로 했다고?”
“예. 그리고 이렇게 폐하를 뵐 기회를 주셨으니…… 드려야 합니다.”
“나 역시 그걸 원하고 있어. 그러니 내게 주는 거로 하고, 황후 쪽 문제를 함께 해결해 보지.”
“그건…… 안 됩니다.”
엘리제가 고개를 저었다.
“이미 약속한 일이고, 저는 그걸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엘리제는 아우라와 비슷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카를은 알고 있었다. 자신은 아우라의 저런 눈을 이겨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그렇다면 난 그대를 도와줄 수가 없어. 돌아가.”
카를이 황좌의 팔걸이를 한 번 툭 내려쳤다. 엘리제가 다급하게 말했다.
“폐하……!”
“돌아가라고 했다.”
“제가, 제가 준비한 제안을 한 번만 들어 주세요.”
“……제안?”
엘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수정 조각 외에 제가 폐하께 드릴 수 있는 게 더 있습니다.”
그 후, 테인 공작과의 알현은 취소했다.
이윽고 카를은 황후의 방 앞에 도착했다. 그는 중간 복도를 지나 침실 문을 열었다.
“어서 와, 카를.”
아우라는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그 태연한 말투와 표정, 정돈된 자세와 같은 것들이 카를의 신경을 하나씩 하나씩 건드렸다.
화가 났다. 자신의 계획을 훼방 놓는 그녀에게. 스스로 죽음을 향해 가는 줄도 모르고 책이나 읽고 있는 저 여자에게. 그 사실을 안다고 해도 기꺼이 제 목숨을 바칠 게 뻔한 저 잘난 왕녀에게.
그래서 카를은 아우라가 미웠다. 자신을 이토록 불안하고 비틀리게 만드는 아우라가. 저 초연함을 한 번 정도는 무너뜨리고 싶었다.
저벅, 저벅.
카를이 천천히 걸어와 그녀의 앞에 섰다. 아우라는 책을 보며 말했다.
“이것만 다 읽고 재워 줄게. 먼저 침대로 가 있어.”
카를은 더 가까이 다가가 책에 손을 짚었다. 아우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곤 그를 쳐다봤다.
“이제야 날 보네.”
그는 아우라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눈높이가 맞자 청록빛 눈이 아주 잘 보였다.
“엘리제와 만났어. 엘리제에게 핀을 받으려고 했는데 이미 네게 주기로 약속했다더군.”
“오, 저런.”
아우라가 책을 덮었다. 그녀의 눈이 가늘게 휘었다.
“난 몰랐지. 네가 그걸 받으려 할 줄은.”
“…….”
“이걸 어쩌나.”
“……어쩔 수 없지. 이미 약속한 것을.”
카를이 아우라의 머리칼을 가만히 넘겨 주었다. 그는 그녀의 귓바퀴를 살짝 지분거렸다.
“그래서 도울 수 없다고 했어.”
아우라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엘리제를 내친 거야?”
“아니. 내친 건 아니지.”
“…….”
“후궁으로 맞아 볼까 하고. 결국 테인 공작의 손을 잡을 거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