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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48)화 (48/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48화

알현장엔 오늘도 많은 귀족이 오갔다. 모두 카를을 만나기 위해 몇 주를 기다린 이들이었다.

알현의 주제들이야 시답지 않았다. 서신으로 해결해도 충분히 가능한 것들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알현 그 자체. 즉, 황제에게 눈도장을 찍는 것에 불과하니까.

카를도 그걸 알기에 알현을 신속하게 처리했다.

“그건 황실이 해 줄 수 있는 게 없는 문제 같군. 해결 방법이 떠오르면 서신으로 연락하시오.”

“그건 여기서 논의할 일은 아니군. 국무 회의에서 언급하도록 하겠소.”

“그 주제는 국무 회의에서 논하기 적절하지 않소. 기각. 돌아가시오.”

이런 식이었다. 그래도 알현을 기다리는 줄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줄의 끝엔 테인 공작도 있었다.

카를은 그를 흘긋 바라봤다.

‘엘리제는 결국 안 왔군. 뭐, 못 왔다는 말이 더 맞겠으나.’

듣자 하니 조쉬가 카를이 테인 공작을 부른 걸 엘리제에게도 전한 듯했다. 그렇게까지 했음에도 몸을 사린다면 더는 해 줄 일이 없었다.

조쉬는 카를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 역시 공작가의 일은 이제 결정이 난 듯해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잠시 알현장 밖으로 나갔던 테오가 돌아왔다. 그는 조쉬의 곁에 서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쉬.”

“응.”

“밖에 일거리가 있어.”

“무슨 일거리?”

“별건 아닌데 네가 적임자인 것 같아서. 다녀올래? 폐하껜 내가 잘 말씀드릴게.”

조쉬는 안 그래도 속이 답답한 와중에 잘됐다 싶었다.

“갔다 올게, 그럼.”

“그래.”

테오가 씩 웃었다. 조쉬는 뭔가 수상했지만 잠자코 알현장을 나섰다.

‘일거리라는 게 뭐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가 뜨악했다.

“조쉬 님.”

알현장 앞엔 엘리제가 있었다.

“엘리제 영애. 지, 지금 오신 겁니까?”

“테오 님께 황제 폐하를 알현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기다려 보라고 하셔서요.”

‘……테오 이 새끼.’

조쉬는 욕을 꾹 삼키고 엘리제에게 물었다.

“그렇군요. 알현 신청은 하셨습니까?”

“아니요. 상황이 급한지라……. 사실 지난 사흘간 어떻게든 나와 보려고 했으나 감시가 너무 심했습니다. 해서 삼촌이 황궁으로 가시자마자 하인들을 따돌리고 오는 길입니다. 삼촌은 안에 계신가요?”

“네. 아직 알현실이 아닌 대기실에 계시긴 합니다만…….”

엘리제가 조급함을 애써 숨기며 말했다.

“삼촌보다 먼저 폐하를 뵈어야 합니다.”

“하지만 안엔 이미 테인 공작께서 계십니다.”

엘리제는 알현장 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뭔가를 결심한 듯 알현장을 향했다.

“그럼 같이 뵙지요.”

조쉬가 엘리제를 얼른 막아섰다.

“이, 이러지 마십시오. 지금 들어가시면…….”

‘공작은 엘리제 영애를 정말로 가만두지 않을 텐데.’

그러나 엘리제는 그마저도 각오를 한 듯했다. 그녀는 한껏 긴장했으면서도 예의 교양 있는 미소를 지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비켜 주세요.”

“아…….”

“무슨 일이죠?”

저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쉬가 입을 떡 벌렸다.

‘망했다.’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려 복도를 바라보았다. 아우라가 천천히 그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엘리제는 얼른 예의를 표했다.

조쉬가 물었다.

“여, 여, 여기엔 어쩐 일이십니까? 황후 폐하.”

“발걸음 닿는 대로 오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분이 함께 계시는군요. 저번 파티에서 함께 춤을 추신 후로 꽤 친해지신 모양입니다?”

“아,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제가 부탁을 드리고 있었습니다, 황후 폐하.”

엘리제가 말했다.

“부탁?”

“황제 폐하를 알현하게 해 달라고 청을 드리던 중이었습니다.”

“언제부터 알현이 기사를 통해서 이루어졌나요?”

“그게, 알현 신청을 하시는 걸 잊으셨는데…… 상황이 급하신 듯합니다.”

아우라는 엘리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무턱대고 황제를 만나러 온 공작가의 영애. 황후의 입장에서 충분히 불쾌할 만했다. 이 상황이 당황스러울 만도 하건만, 엘리제는 차분했다.

아우라가 엘리제에게 말했다.

“당당히 행동하라고 했더니 떼를 쓸 줄이야.”

엘리제의 얼굴이 그제야 살짝 붉어졌다.

“……송구합니다. 워낙 촌각을 다투는 일이라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촌각을 다툰다면…… 안에는 테인 공작이 있나요?”

아우라가 조쉬에게 물었다.

“……예, 폐하.”

“그럼 영애가 들어가기엔 이미 늦은 게 아닌가?”

아우라가 말에 엘리제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간절한 얼굴로 말했다.

“황후 폐하, 저는…….”

“영애는?”

“저의 모든 걸 잃을 각오를 하고 왔습니다.”

“그래서?”

“……도와주십시오.”

“하.”

그 당돌함에 아우라는 헛웃음을 지었다. 교양만 차리는 영애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면도 다 있었나 싶었다. 그리고 그게 꽤…… 제법이었다.

사실 아우라는 엘리제가 입궁했다는 소식을 듣고 온 참이었다. 하지만 비단 카를과 엘리제의 만남이 신경 쓰여서만은 아니었다.

“잘됐군. 그렇지 않아도 영애에게 볼일이 있었는데.”

“예?”

아우라의 입술이 즐거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도와주지.”

“……정말이십니까?”

엘리제의 눈에 화색이 돌았다.

“대신 조건이 있어.”

“그게 무엇입니까?”

“나와 잠깐 산책을 하고 오지. 잠깐이면 돼.”

갑자기 산책이라니. 듣고 있던 조쉬는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엘리제는 공손히 대답했다.

“그러겠습니다.”

두 여자는 그렇게 알현실 앞을 떠났다. 조쉬는 멀뚱히 그 두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 일이 대체 어떻게 되려고…….’

***

잠시 후.

끼이익…….

알현실 문이 열렸다.

황좌에 앉아 있던 카를이 무심코 문을 보았다. 그곳엔 아우라가 있었다. 카를이 빤히 그쪽을 바라보자 모든 귀족이 뒤를 돌았다.

“화, 황후 폐하께서 여기는 왜…….”

“갑자기 무슨…….”

아우라는 아무렇지 않게 귀족들의 대기석에 앉았다. 마지막 순서인 테인 공작의 옆자리였다. 마치 알현을 기다리는 것 같은 모습에 귀족들이 술렁였다.

‘대체 무슨 꿍꿍이지?’

카를 역시 무척 궁금했다. 그래도 일단은 일 중이었다. 카를은 대화를 하던 귀족에게 말했다.

“계속 말해 보게.”

“그…… 제 영지의 수로 공사에 있어서 황실의 도움을 조금 받으면 어떨까 하는…….”

귀족은 말을 하면서도 흘긋 아우라의 눈치를 봤다. 아우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지긋이 보았다. 어서 말을 끝내라는 듯이. 귀족은 침을 꿀꺽 삼켰다.

“……생각해 보니 그건 제 영지 안에서 해결하면 될 듯싶습니다.”

“……그렇군. 그럼 가 봐도 좋소.”

귀족이 얼른 밖으로 나갔다. 그 후부터 줄이 줄어드는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어떤 귀족들은 인사만 하고 떠나 버렸다. 부담도 부담이었지만, 애초에 중요하게 논할 이야기도 없었던 것이다.

대기석엔 이제 테인 공작과 아우라만이 남았다.

테인 공작은 아우라에게 말했다.

“황후 폐하, 먼저 황제 폐하를 뵈시지요.”

“양보해 주시는 건가요?”

“어떻게 황후 폐하를 기다리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말은 그렇게 해도 저의야 뻔했다. 카를과의 대화를 듣게 할 순 없다는 거였다.

아우라가 싱긋 웃었다.

“하지만 저는 황제 폐하와 긴밀히 나눌 말이 있어서요. 그래서 부러 마지막 순서를 자처한 것이니 전 신경 쓰지 마시고 알현하세요.”

테인 공작은 당황스러웠다.

‘엘리제를 후궁으로 넣는 조건으로 핀을 바치려고 했는데. 절대 황후가 그 장면을 보게 할 순 없어.’

“……그럼 저는 잠시 밖에 나가 있다 오겠습니다. 황후 폐하의 알현이 끝나면 그때 다시 들어오지요.”

“어머나. 공작께선 마음도 좋으셔라.”

아우라가 테오에게 눈짓했다. 테오가 얼른 다가왔다.

“황후 폐하, 하명하실 거라도 있으십니까?”

“공작께서 제게 알현 순서를 양보해 주셨습니다. 바깥에서 기다리게 하실 순 없으니 알현실에 딸린 휴게실에 모셔다드리세요. 심심하시지 않도록 함께 담소를 나눠 주시면 더 좋겠군요.”

휴게실에 테인 공작의 발을 묶어 두란 뜻이었다. 테오는 바로 그 말을 알아듣고 카를에게 전했다. 카를은 허락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테오는 그렇게 테인 공작을 데리고 휴게실로 들어갔다. 알현실엔 이제 카를과 아우라만이 남았다.

“어서 와.”

카를이 제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우라는 대기석에서 일어나 그의 앞으로 가서 섰다. 카를은 귀족을 상대하듯 말을 붙였다.

“그래서, 황후는 약속도 없이 무슨 일로 날 찾았지?”

“밖에 특별한 손님이 와 있는 것 같은데. 알고 있어?”

“특별한 손님?”

“엘리제.”

카를은 한참 동안 말을 골랐다.

“그랬군.”

“만날 거야?”

“찾아왔다면 만나야지. 그러라고 귀족들을 다 내쫓고 테인 공작을 휴게실에 넣어 놓은 거 아니야?”

“맞아. 그럼 이제 만나면 되겠네. 나는 나갈 테니 잘해 봐.”

아우라가 뒤돌아 걸어갔다. 카를이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더니 입을 열었다.

“아우라.”

그녀가 뒤를 돌았다.

“왜 엘리제를 돕는 거지?”

카를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봄 무도회 때까지만 해도 카를을 만나려던 엘리제를 막던 아우라였다. 물론 카를이 엘리제와의 만남에 허락 아닌 허락을 받긴 했다. 하지만 아우라가 직접 만남을 주선하는 건 아무래도 이상했다.

아우라는 말없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그대로 알현장을 나갔다.

잠시 후, 엘리제가 조쉬와 함께 알현장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공손하게 예의를 표했다.

“황제 폐하를 뵙니다.”

카를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의중을 파고드는 듯한 그런 시선으로. 엘리제는 긴장감을 누르고 인사를 덧붙였다.

“저를 만나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내가 부른 이는 테인 공작인데, 어째서 엘리제 영애가 왔나 싶긴 하군.”

“삼촌께선 제가 입궁하신 걸 모르십니다. ……곧 아시겠지만요.”

“그걸 알면 공작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그렇기에.”

엘리제는 카를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지금 이곳에서 이야기를 확실하게 하고 싶습니다.”

카를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엘리제의 태도가 분명 예전과는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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