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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47)화 (47/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47화

조쉬가 도착하자 공작가는 수선스러워졌다. 테인 공작은 공작가 대정원에서 조쉬를 맞았다. 공작의 얼굴에 기대감이 가득했다. 칙서란 대부분 황제가 귀족을 소환할 때 쓰는 것이니.

‘엘리제는 방에서 나오지 말라고 했으니 안심해도 되겠지. 정원이 보이거나 소리가 닿는 위치는 아니니.’

나오지 말라는 말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방 앞엔 하인들까지 세워 놨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한 것이다.

“테인 공작가의 웨일 테인 공작은 칙서를 받을 준비가 되었는가?”

조쉬가 엄숙하게 물었다. 테인 공작은 한 발 다가섰다.

“되었습니다.”

공작가의 고용인들은 멀찍이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말을 엿들을 이는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조쉬는 공작저를 올려다보았다. 창문들이 하나같이 굳게 닫혀 있었다.

‘엘리제 영애에게는 칙서 내용을 알려 주지 않겠다는 건가.’

“되었……습니다만?”

테인 공작이 다시금 말했다. 어서 칙서를 내리라는 것이었다.

“큼큼…… 알았소.”

조쉬가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숨을 훅 들이마셨다.

“테인 공작가의! 가주! 웨일 테인은!”

“!”

테인 공작은 깜짝 놀랐다. 전령으로 온 이 기사는 목청이 왜 이리 좋단 말인가.

“사흘 후! 정오에! 카사 제국의! 황제를 알현하여! 공작가의 미래를 논할 것을! 황제의 이름으로! 명한다!!!”

조쉬의 목소리가 정원에서 힘차게 울려 퍼졌다. 저 멀리 선 고용인들 중에서는 귀를 막은 자도 있었다.

조쉬는 칙서를 테인 공작에게 내밀었다.

“자, 받으시오.”

테인 공작이 멍해져선 양손을 내밀었다. 조쉬는 그 손에 칙서를 툭 올려 두곤 돌아서서 가 버렸다.

“이, 이게 무슨…….”

테인 공작의 귓가가 웅웅 울려 댔다. 그는 퍼뜩 공작가를 바라보았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혹시 엘리제가 들었다면 귀찮아질 수도 있어.’

그는 바쁜 걸음으로 엘리제의 방으로 갔다. 방 앞을 지키던 하인을 무르고 문을 벌컥 열었을 때였다.

“……삼촌?”

엘리제는 침대에서 막 일어나 졸린 눈을 깜빡였다.

“……밖에서 무슨 소리 못 들었느냐?”

“안 그래도 소란스러워서 막 깬 참이에요. 누가 뭐라고 한 건가요?”

그는 그녀의 방을 살폈다. 발코니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아니다. 쉬거라.”

그는 문을 닫고 엘리제의 방을 나섰다.

***

다음 날. 테인 공작은 거울 앞에 서 있었다.

“흥. 황제 폐하께서 드디어 철이 좀 드신 모양이지.”

하인이 그의 몸 앞에 새로운 옷을 갖다 댔다.

“이건 어떠십니까?”

“원…… 좀 더 밝은 건 없느냐? 하나같이 이리 칙칙해서야…….”

하인은 난감해했다. 옷들이야 황실에 납품되는 옷 못지않은 고급품이었다. 문제는 테인 공작의 칙칙한 얼굴이었다.

“엘리제는 어때? 수상한 움직임은 없겠지?”

“방에 계십니다. 언제나처럼요.”

“그래. 하긴 이런 상황에서 제깟 게 뭘 해 볼 수 있겠어? 저렇게 얌전해서야 후궁으로 살아남을 수 있기나 할까 모르겠군. 아우라 황후도 보통내기가 아니던데.”

테인 공작이 한껏 제 조카를 비웃었다.

한편, 엘리제는 그의 방 앞에서 몸을 숨긴 채 서 있었다.

충격이었다. 카를 황제가 테인 공작을 직접 불러들였다. 그것도 ‘공작가의 미래’를 논하기 위하여.

바보가 아니어도 알 수 있었다. 황제가 엘리제가 아닌 테인 공작을 선택했다는 것을.

‘이대로 있다간 모든 일이 삼촌의 뜻대로 될 거야. 하지만 그렇다 한들 내가 뭘 할 수 있지? 황제 폐하께서도 내가 아니라 삼촌을 부르신 마당에.’

엘리제는 힘없이 방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후궁? 어떤 귀족의 부인?

그렇게 공작가에서 영원히 멀어질 것만 같았다. 무력감이 몰려왔다. 엘리제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적어도…… 내가 아들이기만 했다면……. 결혼도 안 한 여자의 몸으로는 황제 폐하께 알현을 요청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그녀는 결국 자신을 탓했다. 그러나 그 순간 황궁의 테라스가 떠올랐다. 아직은 겨울바람이 불었던 그때, 갑자기 눈앞에 나타났던 아우라 황후가.

“아무도 모르게 도움을 받고자 했다?”

손끝이 엘리제의 귓바퀴를 스치며 머리칼을 넘겼다.

“나라면 도움을 바랄 게 아니라 거래를 하겠어. 카를이 거부할 수 없는 뭔가를 들고 와서.”

“!”

“왜? 지금 가진 걸 잃을까 봐 두려워? 그럼 그 이상 아무것도 가지지 못해.”

아우라 황후의 말이 맞았다. 엘리제는 지금 가지고 있는 것마저 잃을까 봐 두려웠고, 그래서 몸을 사렸다. 황제와 거래를 하는 건 언감생심 생각도 못 했고.

‘하지만 더는 물러날 곳이 없어. 용기를 내야 해.’

할 수만 있다면 아우라 황후처럼 되고 싶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엘리제는 아우라가 놀라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유폐의 기억이 괴로울 텐데 어떻게 저렇게 초연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저렇게 강해질 수 있을까.

엘리제는 마음을 다잡았다.

‘거부할 수 없는 무언가…….’

퍼뜩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아마 테인 공작은 그것까진 카를 황제에게 내놓지 못하리라.

그녀가 눈을 빛냈다.

‘……황제 폐하를 만나야 해. 삼촌보다 더 빨리.’

***

카를은 아침부터 아우라를 괴롭히고 있었다. 아우라가 침대를 벗어나기도 전에 한 팔로 끌어안더니 바로 그녀의 입술을 탐하기 시작했다.

“카를, 너 또……!”

아우라의 타박이 카를의 입에 먹혀 버렸다. 이제는 제 것처럼 익숙한 그의 혀가 아우라의 혀를 감쌌다. 그새 허리를 더듬는 손을 떼어 보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그나마 옷을 벗기지 않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매일같이 밤낮으로 이런 식이었다. 새벽까지 입을 맞추다가 일어나면 또 입을 맞췄다. 가끔 옷 안으로 들어오는 손을 막는 것도 일이었다. 지금처럼.

찰싹!

아우라는 네글리제 치맛단으로 들어오는 손을 쳐 냈다. 그리 아프지도 않을 게 뻔한데도 카를은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아우라는 강경했다.

“재워 준다고 했지, 잔다고는 안 했어.”

그녀는 도망치듯 침대를 벗어났다. 카를은 제 손등을 보며 말했다.

“너무하네.”

“너무하는 건 네 어깨지. 왜 이렇게 낫는 게 느려?”

“다친 사람에게 할 말인가? 별일 아닌 것처럼 말한다고 소리까지 지를 땐 언제고.”

“내가 언제 소리를……!”

질렀다. 이제 와 후회해 봤자 너무 늦었지만. 아우라는 그를 흘겨보았다.

‘어쨌거나 절대 받아 주면 안 돼. 시작하면 끝을 볼 게 뻔해. 어깨에는 당연히 안 좋을 테고.’

석고 붕대는 풀었지만 천 붕대와 부목은 아직이었다. 저걸 볼 때마다 마음도 약해지니 그녀로선 큰 문제였다.

아우라가 발코니 창을 활짝 열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 들었다. 뒤따라온 카를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나가기 싫다.”

어깨를 감싼 팔이 따뜻했다. 평범하지만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아우라로선 익숙해질까 봐 두려울 정도로.

“……붕대 다 풀면 네 방에서 자.”

“그 소리를 하루에 몇 번이나 하는 줄은 알아?”

“네가 말을 안 들을 게 뻔하니까 그런 거잖아.”

아우라는 카를의 팔을 떼어 내고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침실 문을 열자 언제나처럼 미나가 앞에 서 있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황후 폐하.”

“그래, 미나. 좋은 아침. 차와 커피를…….”

아우라는 마실 걸 달라고 하려다가 마음을 고쳤다. 며칠 내내 커피만 먹이고 보내는 게 왠지 마음에 걸렸다. 

“아침 식사를 준비해 줄래?”

“네, 폐하.”

“식사는 괜찮아.”

어느새 아우라의 뒤까지 다가온 카를이 말했다.

“일이 좀 밀려서 바로 가야 할 것 같아.”

그 말에 아우라는 내심 어이가 없었다.

‘나가기 싫다고 할 땐 언제고.’

“그 정도로 시간이 없어?”

그 정도로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그는 갈등했다. 아우라가 먼저 식사를 제안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아우라는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바쁘면 할 수 없지.”

카를은 참 그 담백한 태도가 서운했다. 

‘야박하긴. 한 번쯤은 더 붙잡아 줄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러나 결국 지고 들어가는 건 카를 자신이었다.

“내일 먹어.”

“어?”

“아침 식사. 그러면 되잖아.”

그는 아우라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방을 나섰다. 중간 복도를 나서니 아니나 다를까 테오와 조쉬가 서 있었다. 요즘 일정이 끝나면 바로 황후의 방으로 왔으니 할 말들이 쌓였을 거였다.

“바로 집무실로 가지. 말할 거 있으면 지금 하고.”

“네. 간단한 식사를 집무실로 들일까요?”

테오가 식사 이야기를 꺼내니 또 속이 뒤틀리는 카를이었다. 괜히 말만 퉁명스레 나왔다.

“그래.”

“황궁의는 언제 보시겠습니까? 황궁의 말로는 붕대는 어제 풀었어도 된다고-”

“안 풀어.”

“……예?”

“풀고 싶을 때 내가 알아서 푼다고 해. 또 보고할 게 있나?”

조쉬와 테오는 시선을 교환했다. 그러나 이내 그러려니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카를은 황후의 방에 들어갔다가 오면 종종 이상해지곤 하니까.

조쉬가 슬쩍 말했다.

“오늘 테인 공작이 알현을 올 것입니다만…….”

“그래. 그러기로 했지.”

“만약에…… 엘리제 영애에게 연락이 오면…… 어떻게 할까요?”

카를이 멈칫했다.

“엘리제가 먼저?”

“……예. 혹시 모르니까요.”

카를은 생각에 잠겼다. 엘리제가 버리는 패라고 해도 찾아온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테인 공작과 맞설 의지가 있다는 뜻이니.

“받아 줘.”

“예, 폐하.”

조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거나 그녀에게 카를을 만날 기회가 생긴 셈이었다. 물론 이마저도 엘리제가 오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는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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