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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46)화 (46/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46화

아우라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심각한 얼굴로 그의 붕대에 손을 얹어 놓을 뿐이었다.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못 견디겠다는 듯.

솔직히 말하면 카를은 이 순간이 싫지 않았다. 표현이 서툴러서 그렇지 그녀는 분명 그를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사실을 밝힐 때였다.

“후유증 이야기는 거짓말이야.”

“뭐?”

“뼈, 근육, 힘줄, 인대. 모두 멀쩡해. 쉬면 낫는대. 못 믿겠으면 황궁의에게 가 보던가.”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해?”

아우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보았다. 카를은 차마 미움받는 게 지겨워서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너도 숨겼잖아. 라이언의 구호품.”

카를은 결국 이렇게 밉게 굴 수밖에 없었다. 구호품 같은 건 이제 전혀 신경 쓰지 않으면서도.

그는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 아우라는 곧 굉장히 화를 낼 거였다. 이토록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게 했으니 모욕으로 받아들이겠지. 하지만 뭐가 됐건 그녀가 의기소침해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아니나 다를까, 아우라는 조금 울컥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녀는 입술을 꽉 물더니 카를의 어깨를 가만히 보았다. 참으로 복잡다단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안도감이 그녀의 얼굴에 가라앉았다.

카를은 그런 그녀를 짙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표정 하나하나를 모조리 기억할 기세로.

“그래도…… 조심해. 후유증은.”

아우라가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그때 카를이 한 손으로 아우라의 목덜미를 감쌌다.

“!”

대뜸 그가 입을 맞춰 왔다. 성급하게 입술을 벌리고 들어온 혀가 그녀의 혀를 쓸었다. 아우라가 반사적으로 물러났다.

“왜, 왜 이……!”

카를이 성큼 다가와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아랫입술을 빨아들이다가 가볍게 잘근대는 그 감각에 소름이 끼쳤다. 입술이건 입안이건 모두 그에게 먹혀 버리는 것 같았다.

그는 혀로 그녀의 입안 곳곳을 강하게 훔쳤다. 그가 어쩔 줄 모르는 작은 혀를 감는 순간, 아우라가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릿속이 아찔했다.

툭 하고 아우라의 다리가 침대에 닿았다. 카를이 한 손으로 그녀를 부드럽게 눕혔다. 그리고 그제야 입술을 뗐다.

“하…….”

아우라가 달뜬 숨을 쉬며 카를을 보았다. 그는 아우라에게도 익숙한, 욕망에 겨운 눈으로 아우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괜찮다고 했잖아.”

카를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우라가 침을 꿀꺽 삼켰다.

도대체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어깨는 정말 괜찮은 건지. 거짓말을 했다면 왜 한 건지. 대체 무슨 연유로 침대까지 온 건지.

묻고 싶은 게 많았으나 일단은 그를 일으켜야 할 것 같았다.

“어깨, 아플 것 같은데.”

“아파. 피 몰리는 것 같아.”

“일어나, 그럼.”

“빌어먹을. 나는 왜 다쳐서.”

“……미안하다고 했잖아.”

아우라가 금방 심각해졌다.

“네 탓을 하는 게 아니라! 이건…….”

“이건?”

“여기서 더 하고 싶은데 팔 때문에 못 그러잖아.”

아우라가 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데?”

“네가 날 걱정하고 있잖아. 진심으로.”

“…….”

“날 미워하지도 않고.”

그 말에 아우라가 몸을 쓱 빼며 일어났다. 어쨌거나 어깨를 다친 사람에게 좋지 않은 자세인 건 분명했다. 이런 신경까지 쓰이는 걸 보니 그가 다치는 게 싫긴 싫은 모양이었다.

“남 다치는 게 보기 좋을 리가 없잖아.”

“모순적이네. 네가 날 검으로 찌르는 건 괜찮고 다치는 건 안 돼?”

밉살맞게 말을 해서 그렇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우라는 그 모순을 인정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안 돼.”

한마디 더 놀릴 줄 알았던 카를이 그녀를 가만히 보았다.

“그럼 너도 약속해.”

“뭘?”

“죽지-”

‘죽지 않는다고.’

카를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눈치 빠른 아우라가 알아차릴지도 몰랐다. 핀의 봉인을 푸는 방법이 아우라의 죽음이라는 것을.

“그놈의 죽는다는 소리, 그만한다고.”

그 순간 아우라는 언젠가 그에게 한 말을 떠올렸다.

‘네가 날 죽고 싶게 만들고 있으니까.’

그때 카를은 어떤 표정을 했더라. 너무 많이 울고 있어서 기억은 희미했지만 부분부분 기억은 났다. 꾹 다문 입술과 굳은 손끝과 어쩐지 상처받은 것 같은 눈빛이.

“알았어. 약속할게.”

“입 맞춰도 돼?”

카를이 대뜸 물었다.

“또?”

“약속하는 의미로.”

그가 입맞춤에 허락을 구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녀가 이걸 승낙하는 것 역시 이례적인 일일 것이다.

“……좋아.”

하지만 그녀는 오늘 하루를 그냥 그런 날로 만들기로 했다. 그래야 그가 다친 것도 이례적인 일이 될 테니.

카를은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입술이 닿기 직전이었다. 그가 잊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아까 했던 말 잊어. 다 헛소리였어.”

“무슨 말?”

말을 할 때마다 입술이 스쳤다.

“너와 라이언의 사이를 의심한다는 말.”

“아니라는 걸 확인이라도 했어?”

“아니.”

카를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냥, 이제는 알 것 같아서.”

입술이 부드럽게 포개졌다. 그의 입안은 녹아내릴 것처럼 뜨거웠다.

***

이른 아침 아우라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카를은 옆에서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며칠 동안 건너뛴 잠을 이제야 몰아 자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의 눈가는 아직 거뭇했다. 아우라가 그 눈가에 무심코 손을 대려다가 거뒀다.

아우라는 문득 입이 얼얼한 걸 느꼈다. 혀로 살짝 핥아 보니 감각이 없었다.

어젯밤 그는 입맞춤을 좀처럼 끝내 주질 않았다. 물러나면 또 다가오고, 피하면 붙잡고 파고들었다. 어떻게 그렇게 탐욕스러울 수가 있는지 나중엔 입맞춤을 허락한 게 후회될 정도였다.

그리고 네글리제의 리본을 툭툭 건드리던 손길. 그쯤 해 두라는 듯 흘겨보자 푸스스 흘리던 웃음. 아우라는 괜히 기억에 남은 그런 것들을 애써 잊어버리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곧 침대를 나섰다. 황제가 안에 있으니 시녀가 들어오지 못하고 있을 거였다. 문을 열자 아니나 다를까 중간 복도에서 미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황후 폐하.”

“커피 한 잔……. 아니, 두 잔만 부탁해.”

“예, 폐하. 아…… 어제 들인 차를 드릴까요?”

“차?”

“네. 어젯밤에 황제 폐하께서 보내신 차가 있습니다.”

차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아우라는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걸로 부탁해.”

잠시 후, 미나가 차 두 잔을 테이블에 올려놨다. 어제 안센나에서 마셨던 제니아 전통 차였다. 오랜만에 맛보는 향에 반가움을 숨기지 못했던.

‘카를이 보냈다고…….’

언젠가 카를은 아우라에게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우라가 보기엔 카를이야말로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안센나에서 그녀에게 단 한 번도 져 주려고 하지 않았다. 아니, 보란 듯이 몰아붙였다. 그런데 마지막엔 이런 차를 사 오다니. 게다가 그녀 때문에 부상까지 입은 상황에서.

아우라는 천천히 차를 즐겼다.

‘……향기로워.’

입안에서 그 씁쓸한 맛을 굴리면 어느 순간 달콤해졌다. 그게 좋아서 자꾸 찻잔에 입이 갔다. 입술은 여전히 얼얼하지만.

“맛있어?”

등 뒤에서 카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이렇게 인기척을 안 내고 다가올 수 있는 걸까. 목소리는 잔뜩 잠긴 주제에.

“응. 네 것도 있으니 마셔.”

아우라가 차를 또 한 모금 마셨다. 그때 가까이 다가온 카를이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아우라는 하마터면 찻잔을 놓칠 뻔했다.

카를이 그녀의 입안을 제 혀로 한 바퀴 휘저었다. 미처 삼키지 못한 차를 훑어 내듯이. 그는 마지막으로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빨아들이곤 물러났다.

“……맛없어. 안 마셔도 될 것 같아.”

멋대로 입을 맞춘 주제에 그는 차 맛을 두고 툴툴댔다. 아우라는 참으로 어이가 없었으나 그의 어깨를 보니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카를은 아우라를 마주 보고 앉았다. 햇빛을 받은 얼굴이 어제보다 훨씬 좋았다.

“붕대는 언제 풀어?”

“석고는 며칠 후에 떼어 낼 거고, 다음엔 천으로만 고정한대. 그리고…….”

“그리고……?”

“무조건 잘 자라던데.”

카를은 그렇게 말하곤 아우라를 빤히 보았다. 아우라는 설마 싶었다.

“……계속 여기서 자게?”

“붕대 풀 때까지만.”

“그래도.”

“너도 책임이 있잖아.”

“!”

“미안하다며. 거짓말이었어?”

거짓말일 리가. 미안한 걸로 따지면 아우라는 무척 미안했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도 싫은 소리 하나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카를은 그런 아우라를 아주 잘 알았다. 그는 제 다친 어깨를 슥슥 쓰다듬었다.

“아- 더럽게 아프군.”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해.”

달칵.

아우라가 잔을 받침대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참 얄밉다는 눈으로 카를을 보며 말했다.

“붕대 풀 때까지만이야.”

***

테오는 정복을 차려입고 본궁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황제의 칙서가 들려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저 위에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테오가 무심결에 뒤를 돌았다.

“어? 조쉬.”

“어어…….”

조쉬는 막상 테오와 마주치자 멈칫했다. 그리고 짐짓 태연히 물었다.

“어디 가?”

“공작가로 칙서 전달하러.”

칙서를 전달하는 건 보좌관들의 일이었다. 물론 수석 보좌관인 테오가 움직이는 건 흔치 않았다. 그만큼 공작가와 관련된 사안은 예민한 것이었다.

“테인 공작더러 입궁하라고?”

“응. 그럼 난 간다?”

“야! 야야…….”

조쉬가 후다닥 내려와 테오의 앞을 막았다. 테오가 왜 그러냐는 듯 그를 보자 조쉬가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갈게. 너 바쁘잖아.”

“엘리제 영애 때문에?”

“야! 큰일 날 소리 하고 있어!”

조쉬가 테오의 입을 막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니…… 저번에 그 영애가 황제 폐하께 쪽지를 전해 달라고 했는데, 내가 황후 폐하께 뺏겼잖아.”

“아, 그때.”

테오가 조쉬의 손안에서 말했다. 그 느낌이 소름 끼쳐서 조쉬가 얼른 손을 뗐다.

“왜 내 손바닥에 말을 하고 난리야. 더럽게.”

“그래서? 네가 칙서를 전달하면 엘리제 영애의 상황이 달라져?”

“……몰라. 그래도…….”

엘리제가 신경 쓰인다는 말은 죽어도 나오지 않았다.

“이대로 테인 공작 뜻대로 되면 그 영애한테 좀…… 미안할 것 같아서.”

“그러니까 뭘 어쩌게?”

“아, 몰라! 그래도 일단 줘. 전달은 제대로 할 테니까.”

조쉬가 손을 척 내밀었다. 테오는 피식 웃더니 그 손에 칙서를 올렸다.

“그래. 내가 널 어떻게 말리겠냐. 조심히 다녀와. 너니까 맡기는 거야. 폐하께서도 허락하실 것 같아서.”

“큼…… 간다.”

조쉬는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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