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45화
아우라는 편지를 접어 상자에 툭 던졌다.
“대공이 절 생각해서 구호품을 보냈나 봅니다.”
그녀는 짐꾼에게 말했다.
“짐을 계속 나르도록.”
“예, 폐하.”
“황후는.”
카를이 입을 열었다.
“잠깐 나를 좀 봤으면 하는데.”
“……그러죠.”
카를은 아우라를 언덕 아래로 데려갔다. 그 누구도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멀찍이.
“알고 있었어? 대공이 구호품을 보냈다는 거.”
“아까 안센나에 도착했을 때 봤어.”
“그런데 왜 내게 말을 하지 않았지?”
아우라는 카를을 빤히 보았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그는 분명 불쾌해하고 있었다.
“구호품일 뿐이잖아, 카를.”
“상황이 부자연스럽잖아.”
“…….”
“안센나의 상황은 기사로도 다뤄진 적이 없고, 이런 작은 지방의 소식이 수트라까지 닿긴 어려웠을 텐데.”
그의 말이 맞았다. 수트라와 안센나의 거리는 상당히 멀었다. 두 지역은 이렇다 할 연결점도 없었고. 라이언이 눈여겨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밖엔 말이 안 됐다.
“라이언은 안센나의 사정을 어떻게 알고 저런 구호품을 보냈는지. 이상하지 않아?”
“편지에 경애하는 황후 폐하를 운운한 걸 보니 황실에 잘 보이고 싶었던 거겠지.”
“황실이 아니라 네게 잘 보이고 싶은 건 아니고?”
아우라는 알고 있었다. 작은 변명과 부정이면 카를을 달랠 수 있다는 것을. 네가 이렇게 신경을 쓸까 봐 말하지 않았다는 그 한마디면 그는 바로 물러날 것이라는 것을.
하지만 아우라 역시 기분이 상한 상태였다. 안센나에서 그와 부딪쳤던 모든 일이 그녀를 냉담하게 만들었다.
“그렇다 한들 내가 대공의 마음을 어떻게 알겠어.”
아우라는 그렇게 말하곤 언덕을 다시 오르려 했다. 그런 아우라를 카를이 붙잡아 돌려세웠다. 그는 차가운 눈으로 말했다.
“아니면 네가 부탁했어?”
“뭘?”
“안센나를 도와 달라고.”
아우라는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라이언은 아무리 그래도 반역자였다.
“……뭣하면 대공에게 직접 물어봐. 대공이나 된 자가 무슨 이유로 가뭄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도왔냐고. 참 황제다운 질문이네. 안 그래?”
“왜.”
“…….”
“왜 네가 그러지 않았다곤 말하지 않아?”
아우라는 그제야 깨달았다. 카를은 정말로 그녀를 의심하고 있었다.
타샤를 감옥에 보내는 바람에 그의 집무실로 불려갔을 때. 그때 아우라는 카를이 자신을 믿어 주건 말건 상관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무겁고 울컥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그 마음을 무시하기 위해서라도 더 딱딱하게 나섰다.
“……의심하고 싶으면 의심해. 난 상관없으니까.”
카를은 실소했다.
“정말 그게 네 대답이야? 내가 대공과 네 사이를 의심한다고 해도?”
반역자와의 부도덕한 관계. 그건 아우라에게 모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걸 알면서도 카를은 그렇게 말했다.
아우라는 화를 꾹 참으며 말했다.
“마음대로 생각해. 곧 죽어도 네게 날 믿어 달라고 빌지 않아.”
“그 죽는다는 소리-!”
카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우라가 움찔했을 때였다.
“폐하! 피하셔야 합니다!”
언덕 위에서 기사가 다급하게 외쳤다.
데구루루-
커다란 나무통 하나가 굴러 내려오고 있었다. 그 통은 돌부리를 만나 퉁 하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나무통은 정확히 아우라를 향해 날아왔다. 아우라는 놀라서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시야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카를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엄청난 충격이 아우라에게 간접적으로 들이닥쳤다.
아우라는 카를과 함께 그대로 넘어졌다.
콰직!
이어서 나무통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무통은 나무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통에 담겼던 포도주가 사방의 잔디밭을 적셨다.
“……윽.”
카를이 낮게 신음을 흘렸다. 아우라는 그제야 카를을 보곤 흠칫 놀랐다.
“카를, 카를! 어깨가……!”
그는 어깨를 감싸 쥐고 있었다.
***
상황은 이랬다. 포도주 통을 인 짐꾼 하나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그 바람에 나무통이 하필 아우라를 향해 굴러갔다. 카를이 그녀를 감싸지 않았다면 큰일이 났을 것이다.
카를은 중앙 지부에서 바로 응급 치료를 받았다. 기사들은 그런 일에는 도가 튼 듯 재빨리 팔에 부목을 댔다.
조쉬가 물었다.
“의사를 구해 볼까요?”
“아니, 바로 환궁하지. 황궁의에게 보이는 게 낫겠어.”
카를은 어깨를 감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포도주 통을 떨어뜨린 짐꾼은 어떻게 할까요?”
“넘어가. 포도주 통을 지게에 잘 묶지 않은 책임 정도만 묻고.”
“네, 알겠습니다.”
그는 덤덤하게 외투를 걸쳤다. 그에게 이 정도 상처는 부상 축에 들지도 못했다.
“황후는 먼저 보냈어?”
“네. 방금 마차를 타고 가셨습니다.”
아우라를 먼저 보낸 건 카를의 명령이었다.
말은 안 했지만 아우라는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 직전까지 보였던 날 선 모습은 오간 데 없이 사라지고 얼굴이 잔뜩 창백해졌으니.
결국 기사를 시켜 먼저 환궁하게 했다. 다친 모습을 더 보여서 좋을 게 없을 것 같았다.
카를은 기사들과 지부 밖으로 나왔다. 그곳에는 수트라에서 온 구호품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저게 뭐라고 그렇게 싸움을…….’
진심으로 의심을 한 건 아니었다. 그저 구호품을 보고서도 왜 자신에게 말을 하지 않았는지, 경애한다는 편지 앞에서도 어쩌면 그렇게 무덤덤한지. 그런 점들이 원망스러웠을 뿐이었다. 제 남편이 이렇게 미친 사람처럼 신경을 쓸 걸 알았을 텐데도.
‘오해하지 말라는 한마디. 그 한마디가 그렇게 어려운 건가.’
그는 제 어깨를 보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어쨌거나 벌을 받은 건 이쪽인가.’
***
늦은 밤, 아우라는 제 침대에서 웅크려 앉아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안센나에서 일어난 일을 되새김질했다. 서슬 퍼런 말싸움은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카를이 자신을 껴안았던 순간, 그의 몸을 통해 전해지던 충격. 그걸 떠올리면 아직도 등에 소름이 돋았다. 성인 남녀를 넘어뜨릴 정도로 강했으니.
그 충격을 고스란히 받은 카를의 어깨는 어떻게 됐을까. 듣기론 황궁의가 카를에게 다녀갔다고 했다. 그러나 결과까진 전해 듣지 못해 궁금하고 답답했다.
‘카를은…… 그래, 괜찮을 거야. 데블라의 전쟁 영웅이고, 또…… 내가 검으로 찔렀을 때도 멀쩡했는데 그깟 포도주 통쯤에야…….’
아우라는 애써 자신을 달랬다. 그러나 어깨를 감싸 쥐고 고통스러워하던 모습이 또다시 선연하게 떠올라랐다.
“하아…….”
아우라는 이불을 푹 뒤집어썼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카를 따위 알 게 뭔가 싶다가도 불안과 걱정이 밀려왔다. 가장 마음에 걸린 건 그가 자신을 감싸다가 그렇게 됐다는 사실이었다. 순간 자신을 감싸던 그 움직임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으니.
“후우…….”
아우라는 침대에 누워 애써 잠을 청했다.
‘그래, 괜찮아. 별일 있었으면 벌써 연락이 왔겠지.’
그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에 아우라가 스르르 몸을 일으켰다. 이 시간에 그녀의 방에 노크를 할 이는 한 사람뿐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처음으로 그 노크에 대답을 했다.
“……들어와.”
문이 열리자 아니나 다를까 카를이 나타났다. 그는 왼팔과 어깨에 석고 붕대를 하고 있었다.
아우라는 그 어깨를 가만히 보았다. 카를이 말했다.
“네가 무척 미안해하는 것 같아서. 이왕 그럴 거면 재워 주기나 하라고.”
“…….”
“들여보내 줘. 이 몸으로 설마 뭔 짓을 하겠어?”
카를이 턱짓으로 제 어깨를 가리켰다. 아우라가 대답 대신 침대에서 일어나 카를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긴장한 얼굴로 어렵사리 물었다.
“……좀…… 어때?”
사실 카를은 괜찮았다. 운 좋게 인대와 힘줄도 멀쩡했다.
‘근육이 좀 파열된 것뿐인데. 쉬면 낫는다고 했고.’
하지만 오후의 말싸움에 지쳤기 때문일까. 못된 생각인 건 알지만 카를은 이 시간을 좀 더 유예하고 싶었다. 그냥, 그녀가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 이 시간을.
“아직은 모른대. 운이 나쁘면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고.”
“후유증?”
아우라가 눈이 동그래져선 되물었다.
“……어떤?”
“이를테면, 아주 사소한 장애 정도.”
“장…….”
아우라가 차마 말도 끝맺지 못하고 하얗게 질렸다. ‘사소한’이란 말은 들리지도 않는 듯했다. 카를은 그제야 일이 잘못되어 감을 느꼈다.
전선에 다녀온 기사들은 사소한 장애를 몇 개씩 달고 살았다. 그러나 그건 기사들의 입장일 뿐, 아우라에겐 돌덩이 같은 말일 것이다.
“정말 최악의 경우에, 정말로 운이 나쁘면 그렇게 된다는 거야. 황궁의가 원래 좀 허풍이 있잖아. 신경 쓰지 마.”
뒤늦게 카를이 덧붙였다. 아우라는 눈만 깜빡이며 그의 어깨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꽉 맞잡은 손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우라?”
“내가…….”
아우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러나 놀람이 아직 가시지 않은 듯 말투는 딱딱했다.
“내가 미안해. 내가 제대로 피했어야 했는데.”
“……사과를 받자고 한 소리는 아니었는데.”
“나 때문이잖아. 내가 빨리 피하지 못해서.”
“그런 건 아무도 못 피해. 나도 못 피해서 맞은 거고. 어쨌거나 너 때문은 아니니까-”
“대체 왜 그렇게-!”
아우라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카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봤다. 아우라는 눈에 띄게 동요하고 있었다. 그녀가 그럴수록 카를은 더 차분해졌다.
아우라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왜 그렇게…… 별일 아닌 것처럼 말해?”
“……너는 왜 별일이나 되는 것처럼 말하는데?”
“네가 나 때문에-”
“사과받을 마음 없으니 너 때문이란 소리는 그만하고.”
“……하아…….”
아우라가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리고 마른세수를 하며 타박타박 방 안을 걸었다. 카를은 그녀가 하는 양을 가만히 두고 보았다.
방을 한 바퀴 걷고 돌아온 아우라가 다시 카를의 앞에 섰다. 아우라는 망설이다가 다친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