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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44)화 (44/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44화

“!”

순식간에 마차가 기울어졌다. 카를이 눈을 번쩍 뜨더니 아우라를 감싸 안았다.

쿵.

그의 등이 마차 문에 부딪혔다. 그 충격에 놀란 아우라가 몸을 웅크렸다. 그의 팔이 더 단단하게 그녀를 잡았다.

-이히히힝!

밖에서 말들이 포효했다. 마차는 기우뚱한 채로 멈춰 버렸다. 아우라는 그제야 눈을 떴다. 자신을 안고 있는 카를이 창밖을 예민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한 손으로는 검 손잡이를 잡은 채.

“……카를?”

“쉿.”

그때였다. 밖에서 조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황후 폐하! 괜찮으십니까?”

“무슨 일이지?”

카를이 외쳤다.

“죄송하지만 잠시 내리셔야겠습니다. 마차 바퀴 한쪽이 진흙에 빠져서요.”

“아, 그런가. 알았어. 곧 황후를 데리고 나가지.”

“네! 알겠습니다.”

카를은 그제야 검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그는 아우라에게 말했다.

“혹시 마물인가 했어. 이 길에 가끔 마물이 출몰하거든.”

“아…… 그렇구나.”

“…….”

“놔줘야…… 나갈 수 있는데.”

그러나 카를은 팔 힘을 풀 기색이 없었다. 마차는 카를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가 도와주지 않는 이상 그녀도 움직이긴 어려웠다.

카를은 멀뚱히 그녀를 보기만 했다. 고요한 마차와 그와 필요 이상으로 닿아 있는 몸. 아우라는 어색함에 애써 딱딱하게 말했다.

“……장난치지 말고. 기사들이 밖에서 기다리잖아.”

“아까 내 얼굴은 왜 보고 있었어?”

“!”

‘안 자고 있었구나.’

“……하도 뻔뻔하게 굴기에 신기해서 쳐다봤어.”

아우라는 민망하지 않은 척 굴었다. 그는 그런 그녀를 보고 픽 웃더니 대뜸 꽉 끌어안았다.

“왜, 왜 이래. 놔.”

카를이 아우라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곳에서 달콤한 향기라도 난다는 듯이.

아우라의 얼굴에 훅 열이 올랐다. 얼른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소용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안 놔주면 소리 지를 거야.”

“그럼 밖의 놈들은 다른 비명으로 생각할걸?”

“카를!”

저급한 농담에 아우라가 그의 어깨를 힘껏 쳤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지만.

“미안해, 아우라. 그런데 조금만 이대로 쉬고 싶어.”

“…….”

“잠깐…… 잠깐이면 돼.”

카를의 손이 아우라의 등을 감쌌다. 익숙한 온기가 아우라의 몸 안으로 퍼졌다. 그 온기는 평소보다 더 절박한 데가 있었다.

‘날 지켰다고 생각해서 내게서 안정감을 느끼는 거라고 했지.’

그렇다면 프릿이란 기사의 이야기도 정말일지도 몰랐다. 확인할 수 없다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생각하지 말자. 내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어.’

바뀌는 건 없었다. 자신은 핀을 찾을 테고, 그는 그걸 막을 테니까.

카를이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그녀를 마지막으로 꽉 안더니 비로소 놔주었다.

“나가자. 다들 기다리고 있겠군.”

그는 그녀를 데리고 마차를 나섰다. 기사들이 마차를 들어 바퀴를 진흙에서 빼냈다. 그 후, 두 사람은 다시 마차에 올랐다.

카를은 이번에도 아우라에게 기대 잠을 청했다. 그의 눈가로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아우라는 조심스럽게 커튼을 쳐 주었다.

***

몇 시간 후. 황궁 마차와 기사단이 안센나에 도착했다.

갑작스런 황제 부부의 방문에 안센나는 한바탕 뒤집혔다. 자경단의 통제하에 제니아인들이 몰려들었다. 이윽고 아우라가 마차에서 내리자 환호가 쏟아져 나왔다.

“아우라 왕녀님! 왕녀님 만세!”

“왕녀님이시다! 왕녀님 만세!”

그들은 아직도 아우라를 왕녀라고 불렀다. 카사의 황후보다는 제니아의 왕녀이길 바라는 듯했다.

“우리 황후 폐하께서 인기가 좋군.”

비록 카를은 그들의 그런 바람 따윈 가볍게 무시했지만.

카를이 자경단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사이 아우라는 자경단을 살펴보았다.

‘루안은 없어. 안센나를 떠난 건 확실해.’

그때, 아우라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저게 뭐지?’

인파들 사이로 가득 쌓인 나무 상자들이 보였다. 아우라는 한 자경단원에게 슬쩍 물었다.

“저 상자는 뭐지? 수입품?”

“아, 저것은 이번 가뭄의 구호품입니다.”

“구호품?”

‘황실은 구호품을 보낸 적이 없는데. 딱히 귀족들에게 보고받은 적도 없고.’

“어디서 보낸 구호품이지?”

자경단이 대답했다.

“수트라의 라이언 카사 대공님께서 보내셨습니다.”

‘라이언이?’

아우라는 카를을 보았다. 그는 여전히 자경단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아직 상자를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라이언이 내게 보이는 관심을 불쾌해하고 있는데. 눈치채지 못하길 바라야겠군.’

두 사람은 자경단들의 안내를 받아 저수조를 지을 터를 살폈다. 터 옆에는 저수조를 올릴 자재들이 충분히 준비되어 있었다. 그것을 보자 아우라도 마음이 조금 놓였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자경단 중앙 지부의 회의실로 갔다.

회의실은 소박하지만 깔끔했다. 아우라가 다녀왔을 때보다 더 정돈이 된 듯했다.

자경단원이 상석에 앉은 두 사람에게 차를 내어 주었다.

“제니아 전통 차입니다.”

아우라가 한 모금 마셨다. 가볍게 씁쓰름하지만 끝 맛은 달콤했다. 예전 왕궁에서 마셨던 그 맛이었다.

“옛날 생각이 나네. 고맙네.”

아우라는 미소를 지었다.

회의가 시작되자 카를은 자경단에게 물었다.

“저수조를 지을 준비는 훌륭하게 끝내 놨더군. 근처에 암석 지대가 있어서 다행이야. 물 문제는 이걸로 일단락될 수 있겠나?”

“네. 이번 가뭄은 넘길 수 있을 듯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안센나는 농사를 지을 만한 땅이 아니야. 장기적으로 봤을 땐 제2의 땅으로의 이주도 고려해야 해.”

잠시 적막이 흘렀다. 자경단 대장이 입을 열었다.

“제2의 땅은 필요치 않습니다. 저희는 제니아 땅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폐하.”

“돌아가고 싶다는 게 무슨 뜻이지?”

“저희는 독립을 원합니다.”

카를이 희미한 웃음을 짓더니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차 맛이 좋네.”

그는 자경단을 둘러보았다.

제니아를 이렇게 만든 건 카를이 아니었다. 하지만 제니아를 독립시켜 주지 않는 건 카를이었다. 또한 카를은 그들의 희망인 아우라의 남편이기도 했다.

제니아인들은 카를에게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증오할 수도, 배척할 수도 없는.

“난 제니아의 독립을 긍정적으로 생각해.”

그 말에 자경단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카를이 덧붙였다.

“하지만 황후의 생각은 좀 다른 것 같더군.”

달칵.

잔을 내려놓던 아우라의 손이 미끄러졌다.

자경단들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아우라를 보았다. 아우라 왕녀가 제니아 독립을 부정적으로 여긴다고?

아우라가 차분하게 미소를 지었다.

“근본적인 문제는 독립이 아닙니다. 독립할 힘이 있느냐는 거지요. 황실이 귀족들에게 제니아의 땅을 되받아 여러분께 드린다고 칩시다. 하지만 그곳으로 이주한다고 해서 이 상황이 얼마나 나아지겠습니까.”

“하지만 제니아에선 농사를 지을 수 있지 않습니까.”

자경단 대장이 말했다. 아우라가 바로 받아쳤다.

“제니아가 언제부터 농경 국가였던가요?”

그녀는 간단하지만 확실하게 의중을 밝혔다. 제니아는 마법이 이끌어 가는 국가였다. 그것을 되찾지 않는 이상 독립도 무의미했다.

“그럼 황후 폐하께서…….”

한 자경단원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카를이 있어 차마 말을 끝맺진 못했다.

아우라가 말했다.

“네. 제니아 마법사들의 마력부터 되찾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죠. 국토는 그다음이겠고요. 그렇지 않습니까, 폐하?”

“글쎄. 너무 꿈만 좇다가 현실적인 걸 놓치는 게 아닌가 싶은데.”

“그 이상적인 꿈을 이루어 주는 게 바로 황실의 힘이겠지요.”

“글쎄. 이상적인지 맹목적인지…… 난 판단이 잘 안 서는군.”

아우라와 카를이 미묘한 신경전은 회의 내내 계속되었다. 그리고 늦은 오후, 이렇다 할 결론 없이 회의는 끝이 났다.

자경단원들은 황제 부부에게 안센나의 뒷산을 구경시켜 주었다. 산에는 봄꽃이 만발해 있었지만 아우라와 카를은 말이 없었다. 회의의 여파 때문이었다.

기사들이 눈치를 보며 멀찍이 물러났다. 주위에 사람들이 다 사라졌을 때 아우라가 물었다.

“회의실에서 대체 왜 그런 거야?”

“이건 정치야, 아우라. 나는 제니아인들에게 내 입장을 밝힐 의무가 있어.”

“나와 자경단을 이간질했잖아. 마치 내가 독립을 막는 것처럼.”

“그 역시 나의 정치지. 제니아인들이 다 너만 바라보고 있으니.”

아우라는 울컥했다. 아무리 그래도 국민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건 너무하다 싶었다. 그녀는 카를의 팔을 잡았다.

“다시는 그러지 마.”

“내가 말했잖아.”

“…….”

“핀을 가져가면 너를 방해할 거라고.”

카를이 아우라의 손을 부드럽게 뿌리쳤다. 그녀의 손이 툭 떨어졌다.

그때 조쉬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폐하, 저길 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상자를 나르고 있었다. 아우라는 그것들이 수트라에서 보낸 구호품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이런, 하필…….’

“뭐지? 이런 뒷길을 통해서.”

이상함을 느낀 카를이 그들에게 다가가자 아우라도 얼른 카를을 뒤따라갔다.

“이봐. 멈추고 상자를 가져와라.”

카를은 선두에 선 짐꾼에게 명령했다. 그는 얼른 상자를 카를 앞에 내려놓았다. 상자에는 눈꽃 문양이 박혀 있었다.

카를은 그 문양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이건 수트라의 상징 아닌가?”

“예. 수트라의 라이언 대공께서 보내신 구호품입니다.”

자경단 대장이 대답했다. 카를은 입술을 살짝 씹더니 짐꾼에게 명령했다.

“열어라.”

짐꾼은 얼른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식수로 보이는 물병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위엔 한 통의 편지도 있었다.

카를이 편지를 열어 읽어 보았다. 그리고 슬쩍 눈을 들어 아우라를 보았다.

“이건 황후가 봐야 할 것 같군.”

아우라는 편지를 받아 읽었다.

「안센나의 제니아인들에게. 황후 폐하를 경애하는 마음으로 도움을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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