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43화
조쉬와 테오는 카를의 부름에 집무실에 모였다. 카를이 아침부터 어딜 다녀온 건지는 모르지만 표정이 심히 좋지 않았다.
“조쉬.”
“아, 예……! 예.”
“앞으로 황후의 방에 오는 편지들을 모두 확인해.”
“……예?”
“하지만 폐하, 그건 법도에 맞지 않습니다.”
테오가 끼어들었다. 그러나 카를은 들리지 않는 듯했다.
“조쉬, 황후의 시녀들에게 오는 편지까지 모두 확인해. 수상한 자…… 특히 H라는 자에게서 오는 편지는 무조건 가져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테오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조쉬는 눈치만 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예, 폐하.”
“그리고 테오, 너도 해 줄 일이 있는데.”
“네, 말씀하십시오.”
카를이 의자에 몸을 깊이 기댔다.
“테인 공작을 입궁시켜.”
“……예?”
“테인 공작 말이야.”
테오가 침을 꿀꺽 삼켰다.
“테인 공작 몰래 엘리제 영애에게 접촉할 방도를 찾던 중이었습니다만.”
“그래, 그랬지.”
일을 정석대로 풀어 갈 작정이었다. 공작 위가 엘리제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힘쓸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핀의 조각을 받으려 했다.
하지만 아우라가 한 조각을 가져간 이상 그럴 여유는 없었다. 그녀가 움직이기 전에 테인 공작에게 두 번째 조각을 가져와야 했다.
“계획이 바뀌었어. 테인 공작을 먼저 봐야겠다.”
엘리제의 사정을 고려할 때가 아니었다. 어쨌거나 핀의 조각은 엘리제가 아니라 테인에게 있으니.
그것을 주는 대가로 엘리제를 후궁으로 맞이해 달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럼 황실의 이름으로 다른 가문과의 결혼을 추진하면 그만이었다. 테인 공작의 목적은 엘리제를 공작가에서 몰아내는 거니까.
‘엘리제 쪽에서 먼저 움직여 준다면 혹시 모를까.’
한편, 조쉬는 당황했다. 측근인 그도 공작가의 사정은 대충 알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엘리제 영애가 곤란해지지 않나?’
하지만 강경한 카를에게 차마 그런 말을 꺼낼 순 없었다.
조쉬와 테오가 집무실을 나섰다. 카를이 의자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가 손끝으로 초조하게 팔걸이를 두드렸다.
‘황궁의 법도?’
카를이 피식 웃었다.
‘법도가 무슨 소용이야. 이미 바닥까지 다 보인 마당에.’
‘봉인을 풀면 네가 내 곁을 떠날 거잖아.’
자존심이니 체면이니 하는 것들을 모두 버리고 한 말이었다. 좋아하는 마음과 잃고 싶지 않은 감정을 내세워 그녀에게 매달렸다.
그녀가 그런 카를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다 알면서도, 그런데도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 떠날 거야.’
그렇다면 이제 카를도 어쩔 수 없었다.
‘계속 그렇게 핀을 따라가 봐, 아우라. 나는 너를 따라갈 테니까.’
***
며칠 후.
카를은 아침 식사에 아우라를 초대했다. 아우라는 승낙했다.
그녀가 식당에 도착했을 때 카를은 이미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좋은 아침, 카를.”
“어서 와.”
아우라는 카를의 안색을 보고 내심 놀랐다. 눈 밑은 거뭇했고, 눈동자의 핏줄은 다 터져 있었다. 며칠 동안 한숨도 자지 못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아우라는 모른 척했다. 언제까지 그를 재워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안 올 줄 알았는데.”
카를의 말에 아우라가 어깨를 으쓱했다.
“안 올 이유는 없지.”
“이제 식사는 제대로 해?”
그걸 확인하려고 부른 건가 싶었다. 아우라가 보기엔 카를은 자신의 몸부터 돌봐야 할 것 같았다.
“그러니까 식당까지 왔지. 상의할 일도 있고.”
“상의? 뭘?”
“안센나의 저수조 공사가 시작됐대.”
“아, 소식 들었어.”
아우라는 포크로 샐러드를 집어 먹었다. 싱싱한 토마토가 입안에서 향긋하게 터졌다. 그녀가 토마토를 꿀꺽 삼키곤 말했다.
“그래서 안센나에 한번 다녀오려고.”
나이프로 고기를 썰던 카를이 멈칫했다. 그가 시선을 살짝 들어 아우라를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샐러드를 뒤적이고 있었다.
“내가 허락해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안 될 이유가 있어?”
“너, 거기서 죽으려 했잖아.”
적어도 카를의 입장에서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다만 아우라는 안센나에서 죽을 마음이 없었다. 죽을 각오를 했을 뿐.
“그때는 황후가 아니었잖아. 지금은 황후고.”
“그게 네 마음가짐에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치나?”
아우라는 천천히 샐러드를 씹었다.
“마음가짐처럼 거창한 건 아니고, 황후로서 신경을 쓰는 게 맞는 것 같아서.”
“…….”
“카사인들이 사는 수론 지방에 저수조를 짓고 수로교를 안센나까지 끌고 온 거잖아. 제니아인들만의 공사는 아니니까.”
“그래, 그렇다 쳐. 그런데 네가 직접 행차까지 해야 하는 이유는? 제니아인들의 뒤엔 황후가 있다. 그걸 보여 주고 싶은 거야? 그럼 기자들이 잘도 가만히 있겠군.”
아우라가 결국 포크를 내려놓았다. 탕 하는 소리가 식당을 울렸다.
“이 공사는 황실의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잖아. 난 황실을 대표해서 다녀오겠다는 거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우라의 목적은 따로 있었다.
첫째로는 카를도 예상하듯 제니아인들을 격려하고 싶었다. 오랜 가뭄과 물 부족으로 지쳤을 그들을.
둘째로는 루안의 행적을 쫓아 볼 생각이었다. 그가 언제쯤 황궁으로 올지 알 수 있도록 말이다.
“황실을 대표해서라…….”
카를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녀의 말은 그럴듯했다. 황후의 도리에도 딱 맞아떨어졌다.
이윽고 카를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다녀오자.”
“……뭐?”
말이 이상했다. ‘다녀와라’도 아니고 ‘다녀오자’라니.
“아우라, 네 말대로 황실 이름으로 진행되는 공사야. 그러니 황제 부부가 함께 행차하는 게 그림이 더 좋겠지.”
“굳이 너까지 갈 필욘 없어.”
“‘굳이’가 아니지. 그 공사에 누구 돈이 들어갔는지 잊었어?”
아우라는 할 말이 없었다. 말이 황실 이름이지, 카를의 돈으로 진행되는 공사였으니까.
카를이 유리잔에 와인을 따랐다. 붉은 와인이 잔에 반쯤 채워졌다.
“그리고 난 널 혼자 보낼 생각 없어.”
“…….”
“그게 어디가 됐건.”
그는 와인 잔을 들고 일어나더니 그녀의 앞으로 왔다.
“날씨가 딱 좋아. 말 나온 김에 오늘 바로 출발하지.”
카를의 말처럼 창밖은 오늘따라 화창했다. 아우라는 냅킨으로 입을 닦고 마지못해 대답했다.
“……좋아. 그렇게 해.”
‘어쩔 수 없지. 카를을 잘 피해서 움직여 보는 수밖에.’
카를이 아우라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탁.
그는 아우라 앞에 잔을 내려놓았다.
“이따 보자, 아우라.”
그녀의 앞에 붉은 와인이 일렁였다.
***
황제 부부의 외출 준비는 바로 이루어졌다. 아우라는 옷장 앞에서 오랫동안 옷을 골랐다. 제니아인들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나는 잘 지내고 있으니 조금만 더 참아 달라고.
“폐하, 복장을 고르셨습니까?”
미나가 뒤에서 물었다. 아우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녹색으로 하겠어. 깔끔하되 수수하진 않게. 장신구는 작은 귀걸이를 제외하곤 모두 빼는 쪽으로.”
너무 잘 지내는 것처럼 보여서도 안 됐다. 그럼 아우라가 자신들을 버릴까 봐 불안해할 테니. 그렇다고 해서 초라해 보이는 것도 안 됐다. 그럼 자신들을 지켜 줄 힘이 없다고 느낄 테니.
‘카를이랑 같이 가는 만큼 정신을 더 똑바로 차려야 해.’
핀을 내어 줘서일까. 카를은 예전보다 더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아우라는 준비를 마치고 황궁 건물 앞으로 나갔다. 마차와 카를이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 역시 짙은 녹색 옷을 입은 채였다.
‘하필이면…….’
미리 알았다면 절대 녹색 옷을 입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이미 카를은 아우라를 보았고, 이 상황에 큰 흥미를 느끼는 듯했다.
카를뿐만이 아니었다. 기사들이 저들끼리 시선을 교환했다. 부부가 옷을 맞춰 입고 온 줄 아는 게 분명했다. 특히 조쉬와 테오는 감격에 겨운 표정까지 짓고 있었다.
마차 앞에서 카를이 아우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들 사이좋은 부부라고 오해하는 것 같은데.”
“원하신다면 갈아입고 올 수 있습니다만.”
“그걸 황후가 원하는 것 같긴 한데, 난 더 기다릴 마음이 없어서 말이오.”
카를이 재촉하듯 내민 손을 살짝 흔들었다. 아우라는 별수 없이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랐다.
‘벌써 피곤하군.’
그녀가 얕은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이번 여정은 순탄치 않을 것만 같았다.
뒤이어 카를이 마차에 올랐다. 그는 대뜸 아우라의 옆자리에 앉았다.
“뭐, 뭐야. 왜 여기 앉아?”
아우라가 그러거나 말거나 카를이 태연히 마차 밖을 향해 손짓했다. 말에 타고 있던 조쉬가 마부에게 출발을 알렸다. 카를은 바로 마차의 커튼을 쳐 버렸다.
‘기가 막혀…….’
아우라는 반대편으로 자리를 옮기려 했다. 그때, 카를이 그녀의 손을 잡아 앉혔다. 이쯤 되니 아우라도 발끈할 지경이었다.
“……뭘 어쩌자고? 이러려고 안센나에 같이 가겠다고 한 거야?”
“응. 이러려고 같이 가겠다고 한 거야.”
카를은 아우라의 어깨에 툭 기대곤 눈을 감았다.
“네가 날 침실로 들여보내 줄 리는 없고, 잠은 자야겠으니까.”
그의 목소리가 툭 갈라졌다. 아우라는 다시 일어나 보려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럼 손이라도 좀 놔.”
“저번에 말했잖아. 닿아야 잠이 온다고.”
카를은 놔주기는커녕 스멀스멀 손깍지를 꼈다. 아우라는 황당했다.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어, 카를.”
“자꾸 말 걸면 내가 못 자. 조용히 해, 아우라.”
그가 정말 피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우라는 한마디 더 하려다가 결국 체념했다.
그녀는 손을 뻗어 커튼을 걷었다. 옴짝달싹 못 하게 됐으니 창밖 풍경이라도 볼 셈이었다.
햇볕이 따뜻하고 부드럽게 마차 안으로 스며들어 왔다. 푸른 봄의 풍경이 퍽 보기 좋았다. 언제 그렇게 춥고 매서웠냐는 듯.
다만…….
‘……무거워.’
아우라는 카를을 흘겨보았다. 그 커다란 덩치로 자신의 어깨에 기댄 남자를.
“…….”
날카롭던 아우라의 눈빛이 서서히 풀어졌다. 그녀는 보고 또 보았다. 길고 검은 속눈썹, 그 아래로 잘 뻗은 콧대, 남자답게 굳게 다문 입술.
한때 아우라는 이 모든 걸 너무나도 좋아했다. 달콤함과 행복을 찾는 지름길인 줄 알았으니까.
그때였다.
덜컹-!
마차가 심하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