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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42)화 (42/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42화

카를은 계단 벽에 박힌 초에 불을 붙였다. 그러자 희미하게 계단이 보였다.

“내가 가져올게. 여기서 기다려.”

“너를 어떻게 믿고. 같이 가.”

“……잡아, 그럼. 계단이 험해.”

카를이 손을 내밀었다. 아우라는 내키지 않았지만 그 손을 잡았다. 실랑이를 하다가 시간을 낭비할 순 없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그의 말처럼 계단은 높낮이가 제멋대로였다. 그 와중에도 카를은 벽의 초에 빠짐없이 불을 붙였다.

“언제까지 내려가야 해?”

“아직 멀었어. 그러니까 내가 가져다준다고 했잖아.”

“내 탓 하지 마. 네가 믿을 만한 인간이었으면 나도 안 따라왔어.”

“미안하게 됐군. 미덥지 못한 인간이라.”

투덕거리던 아우라가 카를의 등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미안하다는 소리는 왜 자꾸 하는 거야. 안 어울리게.’ 

그렇게 잠깐 발밑에서 눈을 뗐을 때였다. 그녀의 발이 계단에서 삐끗했다.

“아!”

아우라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아찔함이 몰려오는 순간, 카를이 재빨리 그녀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얌전히 계단에 다시 내려놓았다.

“괜찮아?”

“어? ……어.”

“원하면 들고 가 줄 수 있어.”

“들고 간다고?”

“또 넘어지는 것보단 낫지. 아직 한참 남았는데.”

카를이 까마득한 어둠을 가리켰다. 아우라가 입술을 씹었다. 방금의 일이 너무 아찔해서일까. 저 어둠 속을 걸어갈 엄두가 안 났다.

‘싫지만…… 일단 가고 봐야지.’

아우라가 말없이 양손을 뻗었다. 들고 가도 좋다는 의미였다.

카를은 어쩐지 눈이 동그래지더니 피식 웃었다.

“넌 네가 어떻게 보이는지 정말 신경을 안 쓰는구나.”

그는 한 손으로 아우라의 다리를 잡아 안아 올렸다. 그렇게 그의 팔에 앉자 놀랍게도 안정감이 느껴졌다.

그렇게 카를이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아우라는 방금 들었던 말을 되새겨 보았다.

‘내가 어떻게 보였기에? 어린애 같단 말인가?’

잠시 후, 계단이 끝나고 또 다른 문이 나왔다.

“여기야?”

“좀 더 가야 해.”

카를이 문을 열자 긴 복도가 이어졌다.

“계단이 아니면 내려 줘도 돼.”

“아직 안 돼. 바닥이 울퉁불퉁하잖아.”

그는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아우라를 내려 주지 않았다. 아우라는 따질까 하다가 참았다. 핀을 찾으면 그와 이럴 일도 없을 테니까.

한편 이곳은 마치 버려진 창고 같았다. 허접한 물건들이 구석에서 삭아 가고 있었다.

“이런 곳은 대체 어떻게 안 거야?”

“황자 시절에 곧잘 숨어 있었거든.”

“숨었다고? 왜?”

“형님들이 좀 괴롭혔어야지.”

그는 마치 귀여운 추억을 더듬듯 말했다. 그러나 그 ‘형님들’이란 카를이 죽인 세 트루 블러드였다.

“어떻게 괴롭혔는데?”

“남자들이었으니 자주 때렸지. 어머니 유품을 훔치거나 내 말을 죽이기도 했고.”

아우라는 기억 속 세 형제를 떠올렸다. 그들은 어느 하나 잘난 것 없이 왜소하고 미련했다. 카를이 그런 놈들에게 당했을 리 없다.

‘사실은 당해 준 거였겠지. 실력대로 이겼다간 일이 더 귀찮아지니까.’

“평소엔 잘 참다가도 가끔 울화가 치밀면 여기로 도망쳐서 화를 죽였어. 그럼 또 며칠을 견딜 수 있었지.” 

아우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네가 별궁으로 도망친 기억은 없는데.”

“아, 결혼한 후에는 안 왔어.”

“왜?”

“널 보면 숨통이 트였으니까.”

아우라는 문득 예전 기억을 떠올렸다. 카를은 가끔 불쑥불쑥 아우라를 찾아오곤 했다. 그는 무감한 말투로 몇 마디를 나누다가 어느 순간 이렇게 말했다.

‘이제 됐어. 귀찮게 했네. 그만 가 볼게.’

아우라는 애써 기억을 지웠다. 그의 어둠을 이제야 봤다고 한들 위로를 건넬 상황은 아니었다.

이윽고 그들은 복도 끝에 다다랐다. 그곳에는 문이 두 개가 있었다.

“이 방이야.”

카를이 오른편 문 앞에 섰다. 아우라는 옆문을 가리켰다.

“이쪽에는 뭐가 있는데?”

“거긴…… 소중한 물건들이 들어 있었지.”

“소중한 물건?”

아우라가 그게 뭐냐는 듯 되물었다. 그러자 카를이 짓궂게 대답했다.

“안 알려 줘. 내 거야.”

“……까마귀 같네. 물건 숨겨 두는 꼴이.”

“하하…….”

아우라의 말에 카를이 한바탕 웃었다.

“그만 웃고 이제 내려 줘.”

“음…….”

“어서. 실컷 들고 왔잖아.”

그래도 카를은 목석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아우라는 그의 어깨를 꽉 잡았다.

“그렇게 싫어? 제니아가 다시 힘을 얻는 게?”

“그래, 싫어. 네가 핀의 봉인을 푸는 게.”

그녀는 울컥했다.

“너도 황태자랑 똑같아. 제니아인들이, 특히 마법사들이 얼마나 불행할지는 생각 안 해?”

“봉인을 풀면 네가 내 곁을 떠날 거잖아.”

카를이 담담하게 말했다. 아우라는 멈칫했다.

‘알고 있었구나. 내가 핀 때문에 황궁에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가 이럴 때마다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얼마나 그녀를 곁에 두고 싶어 하는지. 좋아하는 마음 때문이건, 그녀의 핏줄 때문이건.

“……그래, 떠날 거야.”

“네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알면서도…….”

카를이 천천히 아우라를 내려 주었다.

“이렇게 여기까지 온 거야. 네가 원하니까.”

그는 열쇠로 문고리의 자물쇠를 땄다.

끼이이-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원래 창고로 쓰였던 곳인 듯 온갖 유물이 가득했다. 하지만 관리가 안 되어 있어 먼지 냄새와 습기가 심했다.

카를이 선반 가장 위층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아우라는 얼른 그의 곁으로 갔다.

“이 안에 있는 거야?”

카를이 대답 대신 뚜껑을 잡았다. 그는 상자를 열려다가 한숨처럼 그녀를 불렀다.

“아우라.”

“…….”

“핀을 포기하면 제니아를 독립시켜 줄게.”

“!”

“깨끗하게 독립시켜 줄게. 핀을 포기하고 카사의 황후로 남아.”

획기적인 제안이었다. 그럼 아우라 자신도 봉인을 풀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었다. 카를이야 정치적 반대를 직면해야겠지만 이겨 낼 거였다. 언제나 그랬듯이.

다만 그렇게 되면 마력은 영영 되찾지 못할 것이다.

아우라는 카를의 손등을 잡았다.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은 눈을 마주했다.

“거절할게.”

“…….”

“마력만 되찾으면 제니아인들은 독립할 힘을 얻을 거야. 좀 돌아가더라도 이쪽이 옳은 길이야.”

“그럼 난 이제부터 최선을 다해 널 방해할 텐데? 봉인에 관한 그 어떤 정보도 네게 들어가지 않도록.”

“방해해. 그 정도도 각오하지 않은 건 아니야.”

“넌 못 해, 아우라. 너 혼자 힘으론 어림도 없어. 네 국민을 생각해서 내 제안을 받아들여.”

넌 못 해. 그 말이 아우라를 더 자극했다.

“약속을 지켜, 카를 카사. 당장 상자를 열어.”

침묵이 흘렀다. 카를은 결국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작은 벨벳 주머니가 들어 있었다. 그녀는 주머니를 꺼내어 만지작거렸다. 딱딱한 부채꼴의 뭔가가 만져졌다.

“이거 핀이 분명해? 핀은 수정구일 텐데.”

“밝은 곳에서 확인해 봐. 그럼 이해가 될 거야.”

카를이 체념 조로 말했다. 아우라는 미심쩍었지만 일단은 그의 말을 믿기로 했다.

“올라가는 건 혼자서 할 수 있어.”

아우라가 유감없이 돌아섰다. 그녀의 뒷모습이 금방 어둠 속에 먹혔다.

카를은 한참이나 그 어둠을 응시하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기어이.”

***

아우라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벨벳 주머니를 열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손을 넣어 내용물을 꺼냈다.

“……이건…….”

부채꼴 모양의 수정 조각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수정구를 3분의 1로 쪼갠 모양.

‘핀은…… 세 조각으로 나뉘어 있는 건가?’

아우라는 불현듯 라이언의 편지를 떠올렸다.

「핀은 제게 있습니다. 수트라 성으로 오십시오.」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어. 그렇다면 이센의 장례식 직후 내게 했던 말도…… 진짜일 확률이 높겠지.’

“제게 궁금한 것이 있지 않으십니까?”

“글쎄요. 그런 게 있으려나요.”

라이언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이를테면, 핀이라든가.”

“…….”

“또는 핀의 봉인을 푸는 방법이라든가요.”

‘……그가 두 번째 핀 조각을 가지고 있어. 봉인을 푸는 방법도 알고 있을 테고.’

아우라는 허탈했다. 이제 겨우 핀을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두 개를 더 얻어야 한다니.

‘어쩐지. 카를이 너무 쉽게 이걸 내어 준다고 했어.’

하지만 모아야 한다면 반드시 모을 거였다. 그러기 위해 황궁에 온 거니까.

‘카를은 황태자가 가지고 있던 핀의 조각을 취한 거야. 그럼 핀은 황태자, 대공 그리고 제3의 인물이 나눠 가졌던 거지. 나머지 한 사람은 대체 누굴까.’

그는 황태자와 대공 모두와 친한 자일 거였다. 또 제니아의 몰락에 이득을 얻은 사람.

“……테인 공작.”

현재 제니아의 땅 절반이 공작가의 소유였다. 황태자가 헐값에 테인 공작에게 그 땅을 팔았으니.

‘테인 공작 쪽을 파고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 어쨌거나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문제는 라이언 쪽이야.’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라이언을 만나는 건 자명한 순서였다. 하지만 어떻게 수트라로 가서 라이언을 만난단 말인가. 카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와 라이언과의 만남을 막을 거였다. 아니, 먼저 라이언에게 핀의 조각을 빼앗을 게 뻔했다.

답답함에 망토 리본에 손이 갔다. 카를이 재주 좋게 예쁘게도 묶어 놓은 리본. 그 리본 때문이었을까. 아까 카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봉인을 풀면 네가 내 곁을 떠날 거잖아.’

그 순간 그녀는 하마터면 물을 뻔했다. 만약 떠나지 않는다면 넌 내게 어디까지 해 줄 수 있느냐고. 계속 나의 증오를 받으면서 살아갈 수 있겠냐고.

‘미쳤지.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아우라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를 붙들어 줄 이는 역시 한 사람뿐이었다.

‘어서 루안이 황궁에 와야 해.’

그녀는 냉정하게 계획했다. 먼저 테인 공작가에 핀의 조각이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것을 먼저 얻어 낼 수 있으면 얻어 내고, 그게 불가능하다면…….

‘루안과 함께 수트라로 가자.’

아우라는 망토 리본을 거칠게 풀어냈다. 스륵, 망토가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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