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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41)화 (41/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41화

창밖으로 새벽 해가 막 떠오르고 있었다.

카를은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아우라의 방에 다녀온 후 그는 내내 이 상태였다.

‘핀을 내놔.’

그녀는 기어이 그 말을 꺼냈다. 카를은 그것을 받아 줄 수밖에 없게 됐고.

“……제길.”

그가 핀의 존재를 알게 된 건 몇 달 전이었다. 그러니까, 안센나에서 그녀를 데려온 날 밤.

카를은 집무실에서 분을 삭이고 있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그녀가 카를을 찌른 것도, 안센나에서 몸을 던진 것도.

옆구리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통증에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물론 그녀의 몰골을 봤을 때 짐작은 했다. 그가 생각한 것보다 고생이 심했다는 것을.

‘그래도 이제 겨우 탑에서 나왔는데. 행복해질 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왜 그렇게까지 날 증오하는 거지?’

하지만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건 자기 자신이었다. 아우라가 찌르면 찌르는 대로, 몸을 던지면 던지는 대로 그녀를 받아 주고 있었다. 그녀가 주는 상처마저 달가워하면서.

“……위험해.”

이대로 아우라에게 속수무책으로 말려 들어갈 것 같았다.

‘어쩌면 당분간 아우라와 거리를 둬야 할지도.’

“하아…….”

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고민만 하고 있기에는 할 일이 너무 많았다. 황태자의 집무실을 뒤엎는 게 급선무였다. 쓸 만한 자료는 취하고 나머지는 버려야 했다.

너저분한 집무실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감도 안 잡혔다. 되는 대로 책상 서랍부터 열었다. 안에는 잡동사니만 가득했다. 권력을 향한 황태자의 탐욕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마지막 서랍에는 편지가 쌓여 있었다. 귀족가와 나눈 밀담들, 애인과의 애정 편지들. 그 사이에서 카를은 낯선 이름을 발견했다.

“율리우스? 누구지?”

그는 이끌리듯 편지를 열어 펴 보았다.

「황태자 전하, 제니아 마법사들의 마력을 봉인하기 위한 수정구 연구가 끝났습니다. 그 수정구의 이름은 ‘핀’이지요.

이 일이 성공하면 약속대로 황제가 되셨을 때 저를 황궁 마법사로 임명해 주시는 거겠지요?」

“마력을 봉인했다고……. 비겁한 수를 썼군.”

카를은 제니아가 멸망하자마자 데블라로 떠났다. 제니아의 패인 같은 건 살펴볼 새가 없었다.

그는 서랍을 뒤져 율리우스의 편지를 몇 통 더 찾아냈다.

「……혹여라도 제니아인들이 봉인을 풀 수 없도록 몇 가지 장치를 걸어 두시는 걸 제안드립니다. 핀을 세 개로 나눠 각자 소장하고, 봉인 해제에 치명적인 조건을 거는 겁니다. 폐하께서는 두 가지 일을 해 주십시오. 같은 목적을 지닌 두 분을 더 모으시고 해제 조건을 잘 생각하시는 겁니다.」

「……라이언 대공과 테인 공작가의 웨일 테인은 믿을 만한 분이겠지요? 그럼 두 분께도 제가 따로 편지하겠습니다…….」

“라이언…… 테인…….”

황태자는 라이언과 테인을 선택한 듯했다. 얄궂은 일이었다. 그들은 황태자가 죽자마자 카를의 밑으로 들어왔다.

‘우리 형님께선 하다못해 사람 보는 눈까지 없으셨군.’

카를은 황태자를 조롱하며 마지막 편지를 펼쳤다. 그리고 그 내용을 읽자마자 굳어 버렸다.

「명석하십니다! 트루 블러드의 목숨이라니요. 그 조건이면 제니아인들은 절대 핀의 봉인을 해제할 수 없을 겁니다.」

트루 블러드의 목숨.

“……하.”

제니아와 카사에 남은 트루 블러드는 두 사람이었다. 아우라와 리엘.

율리우스는 이렇게 덧붙였다.

「핀의 봉인을 풀기 위해선 정말 많은 피가 필요합니다. 어린아이의 피만으로는 봉인이 풀리지 않으니 따님이신 리엘 전하를 걱정하시진 않으셔도 됩니다.」

카를은 이들의 악랄함에 할 말을 잃었다.

결국 핀의 봉인을 해제하기 위해선 아우라의 목숨을 바쳐야 했다. 그렇게 해서 마력을 되찾더라도 제니아는 마지막 왕족을 잃게 된다.

그리고 아우라는…… 기꺼이 목숨을 바칠 것이다. 지금의 아우라라면 더더욱.

카를이 편지를 덮었다. 어둠 속에서 그는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옆구리의 통증은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율리우스…… 율리우스…….’

카를이 메모지에 그 이름을 적었다. 이 위험한 편지들을 싹 다 불태울지라도 이 이름만은 확실히 기억해야 했다.

잠시 후, 그가 샛문을 열고 개인 서재로 들어갔다. 황태자는 온갖 물건을 이 안에 처박아 놓았다. 게으른 그가 핀을 특별한 곳에 숨겼을 리가 없었다.

카를은 서재를 쭉 걸어가다가 중간 지점의 벽장에 멈춰 섰다. 유리문을 열자 온갖 사치품이 먼지에 덮여 있었다.

카를은 그 안을 훑어보곤 장식용 상자를 하나씩 열어 보았다. 그리고 이윽고 한 상자에서 핀을 발견했다.

“…….”

카를은 핀을 꽉 쥐었다. 그리고 자신을 비웃었다.

‘거리를 둬야겠다고? 여유 넘치는 생각을 했군, 카를 카사.’

그는 문득 결혼식 날 밤 아우라에게서 도망쳤던 일을 떠올렸다. 그는 그녀에게 돌아가지 않기 위해 밤새도록 자신을 설득했었다.

‘저런 여자를…… 저렇게 고귀한 여자를 지키려면 나는 몇 배는 더 강해져야 해. 정말이지 몇 배는 더…….’

그것은 설득이자 다짐이기도 했다. 그녀에게 돌아가려면 그 누구보다도 강해져야 한다고.

그렇게 강해진 대가로 아우라를 지킨 줄 알았다. 자신이 황제가 되었으니 아무도 아우라를 건드릴 수 없을 거라고.

하지만 아니었다.

‘이제 시작이었구나. 널 지키는 일은.’

카를은 핀을 가지고 서재를 나섰다.

카를은 일단 핀을 모아 아우라가 발견 못 할 곳에 숨길 생각이었다. 라이언과 테인이 내놓지 않으면 빼앗아서라도.

그런데 복병이 나타났다. 아우라라는 복병이.

이센이 죽은 후, 카를은 그녀가 군사 지도 때문에 서재에 들어간 게 아니었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분명 핀을 찾고 있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는 피곤에 젖어 마른세수를 했다.

그때, 노크도 없이 침실 문이 열렸다.

자박자박…….

등 뒤로 들려오는 발소리에 카를이 뒤를 보았다.

네글리제만 입은 채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아우라가 있었다. 그녀의 맨발은 작고 창백했다.

“아우라, 아직 새벽이야.”

아우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한쪽 무릎을 침대에 걸치곤 그의 어깨를 짚었다.

“해가 떴잖아. 아침이야.”

“옷이라도 제대로 갖춰 입고-”

“핀을 내놔.”

“…….”

“어서.”

아우라가 카를에게 몸을 기울였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카를의 어깨까지 흘러내렸다. 그는 그 머리카락을 잡아서 움켜쥐었다.

“넌 정말…… 날 괴롭히는 방법만큼은 귀신같이 잘 알고 있어.”

“그래. 핀의 봉인을 풀면 너는 정치적으로 무척 곤란해지겠지. 식민지를 잃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카를, 네가 말했잖아.”

아우라가 카를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숨결이 닿을 정도로.

“떠나는 것만 아니라면 뭐든 요구하라고. 난 핀을 원해.”

“떠나는 게 아니라고…….”

불행 중 다행일까. 아우라는 핀의 봉인을 푸는 방법까진 모르는 것 같았다. 카를이 정치적 이유로 핀을 숨겼다고 생각하는 것만 봐도 그랬다.

“하아…….”

카를은 한숨을 내쉬곤 그녀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었다.

“아우라 너, 봉인을 푸는 방법도 모르면서-”

“희생이 필요해.”

카를이 멈칫했다. 

“……무슨 희생?”

“아직은 몰라. 하지만 찾아낼 거야. 혹은…….”

아우라가 카를의 귓가에 속삭였다.

“율리우스를 알고 있는 네게…… 언젠가 알아낼 수도 있고.”

카를은 말없이 그녀를 곁눈질했다. 아우라가 말했다.

“네 서랍을 뒤졌거든.”

“나 몰래 온갖 짓을 다 하고 다녔네. 괘씸하게.”

‘편지는 일찍이 태워 버리길 잘했군.’

카를이 아우라의 머리카락을 살짝 잡아당겼다.

“미안하지만 봉인을 푸는 방법까진 몰라.”

아우라가 그를 쏘아보았다.

“……그렇다 한들, 네가 핀을 가지고 있는 건 맞잖아. 어서 내놔.”

그때 카를이 고개를 살짝 들어 그녀에게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아우라가 얼굴을 찡그리며 물러났다.

“무슨 짓이야.”

“귀여운 거짓말을 하더군. 내게 약점이 될 만한 걸 찾고 있었다고?”

이센의 장례식 날 아우라가 했던 변명을 두고 한 말이었다. 아우라가 픽 웃었다.

“그때부터 알고 있었어? 재미있었겠네. 어떻게든 네게 숨겨 보고자 발악하는 모습이.”

“그럼 더는 발악하지 않으면 되잖아, 아우라.”

“…….”

“만약 네가 핀을 포기하면 내가…….”

“협상은 하지 않아, 카를. 지금 당장 핀을 가지러 가는 거야. 나와 함께.”

“……알았어.”

카를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우라가 미심쩍은 눈으로 그를 좇았다. 마치 그가 당장에라도 도망칠 것처럼.

“핀은 별궁 지하에 뒀어.”

“별궁 지하?”

“그래. 조금만 기다려.”

카를이 대뜸 상의를 벗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아우라가 얼른 시선을 돌렸다. 그는 옷장에서 셔츠를 꺼내 걸쳤다. 황제로서 최소한의 복장을 갖추기 위해서였다.

그는 옷장에서 망토를 꺼냈다. 카를이 아우라의 어깨에 망토를 두르려 할 때였다. 별안간 그의 몸을 본 여파에 그녀의 얼굴이 붉었다.

카를이 어쩔 수 없이 배어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말도 안 되는 타이밍에서 귀엽게 굴다니.’

“망토는 필요 없어.”

“그 차림으로 나갈 순 없잖아. 방에 들러서 옷 갈아입으라고 해 봤자 말 안 들을 테고.”

카를이 망토의 끈으로 제법 예쁜 리본을 만들었다. 아우라는 말없이 망토로 몸을 가렸다.

***

두 사람은 별궁으로 들어섰다. 카를의 손엔 횃대와 성냥이 들려 있었다.

아우라는 핀이 별궁에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별궁은 그저 리엘이 있는 곳일 뿐이었으니까.

“왜 핀을 별궁에 뒀지? 리엘이 있는 곳에 그런 위험한 걸…….”

카를이 아우라를 흘긋 보았다.

“위험하지 않아. 그나저나 예전부터 느낀 건데, 리엘이 꽤 마음에 드나 봐?”

“……아무것도 모르는 애한테 피해가 가면 안 되니까. 그뿐이야.”

카를은 중앙 복도에서 왼쪽으로 길을 틀었다. 그들은 좁고 어두운 복도를 걸어 낡은 문 앞에 다다랐다.

‘이런 곳에 지하실 입구가 있었구나.’

아우라는 망토 깃을 더 꽉 잡았다. 카를이 횃대에 불을 붙이곤 열쇠로 문을 열었다. 자주 들락거려 본 솜씨였다.

끼이익…….

문이 열렸다. 까마득한 어둠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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