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40화
아우라는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가 돌아온 후부터 이 말만은 일부러 피했다. 그를 공격해야 할 상황에서도 이 말만은 참았다. 직면하는 것조차 마음이 아파서 그녀야말로 없던 일로 하고 살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카를이 또 애써 덮어 놓은 상처를 헤집어 놓지 않았는가. 그는 여전히 아무것도 몰랐고,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카를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지금, 뭐라고……?”
“북쪽 탑의 경비를 맡았던 병사들에게 날 죽이라고 단검을 보냈잖아.”
카를이 아우라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
“아니야.”
“……아니야?”
그녀가 실소했다.
“증명할 수 있어?”
“…….”
“난 있어. 그때 북쪽 탑의 경비를 맡았던 병사들. 그 병사들이 너에게 무슨 명령을 받았는지 함께 가서 확인해 볼까?”
카를은 하얗게 질린 채로 아무 말도 못 했다. 그 반응에 아우라는 마음이 너무 아팠다.
미안하다는 말, 건강을 염려하던 말. 어제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내심 기대했을지도 몰랐다. 혹시 그와 자신 사이에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게 아닐까.
하지만 돌아오는 건 이 잔인한 침묵뿐이었다. 그게 너무 아파서 아우라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팔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아우라.”
카를이 아우라에게 다가가려 할 때였다. 그녀가 울음 섞인 말로 중얼거렸다.
“왜 그랬어…….”
그녀가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툭 쳤다. 카를이 그대로 한 걸음 밀려났다.
“……그 기억 때문에 내가 널 용서할 수가 없잖아.”
아우라 자신도 몰랐던 본심이 울음과 뒤섞여 흘러나왔다. 지금까지 힘겹게 마음의 바닥에 숨어 있던 본심이었다.
아우라가 눈물을 닦고 깊게 심호흡을 했다. 한 차례 마음을 다잡은 그녀가 카를에게 조소를 보냈다.
“부활? 원하는 걸 만들어 주겠다고?”
“…….”
“그럼 구덩이나 파 놔. 죽고 싶을 때마다 들여다보게.”
“!”
“네가 날 죽고 싶게 만들고 있으니까.”
아우라는 그대로 그를 스쳐 숲을 떠났다. 그녀의 위태로운 뒷모습이 수풀 사이로 사라졌다.
카를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북쪽 탑 철거 공사는 중단되었다.
미나가 그 사실을 알렸지만 아우라는 반응이 없었다. 모든 의욕을 잃은 듯 종일 침대에 누워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사흘이 지났다.
아우라는 여전히 침대를 떠나지 않았다. 떠나지 못했다는 게 더 맞는 말이었다.
그 무엇을 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카를을 상처를 주는 일도, 강한 척하는 것도, 괜찮은 척하는 것도, 어쩌면 핀을 찾는 일까지도. 그녀는 완전히 지쳐 버린 것 같았다.
미나가 조심스레 침실로 들어왔다.
“저…… 폐하. 식사를 하셔야 합니다.”
어렵게 말을 꺼냈으나 아우라는 대답조차 없었다. 미나는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 황제 폐하께서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
“어……떻게 할까요?”
감정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버려.”
“그게…… 버리기엔 어려운 물건인지라……”
“……팔아, 그럼.”
“그것도 여의치가 않아서요.”
버리기도 팔기도 어려운 물건. 궁금할 만도 하건만 아우라는 반응이 없었다. 아우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은 미나마저도 귀찮을 뿐이었다.
“……두고 나가.”
“아……! 예, 폐하.”
미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문을 열었다. 수많은 시녀가 줄지어 들어와 뭔가를 내려놓았다. 미나는 얼른 시녀들을 이끌고 나갔다.
이윽고 아우라는 익숙한 향기를 맡았다.
그녀가 부스스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방 안을 무심히 살펴보았다.
수선화 꽃바구니가 방 안에 가득했다. 그 은은하게 풍겨 오는 향기는 아우라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아우라는 천천히 침대 밖으로 나왔다.
촤악-
단번에 커튼을 걷고 발코니 문을 열었다. 뒤를 돌아보니 활짝 핀 황금빛 꽃들이 눈부시게 예뻤다.
아우라가 꽃바구니 하나를 들었다. 묵직했다.
그녀는 발코니 난간 밖으로 꽃을 모조리 털어 버렸다.
투두둑…….
꽃들이 허망하게 저 아래로 떨어졌다.
빈 꽃바구니가 발코니에 하나둘 쌓여 갔다. 아우라가 마지막 꽃바구니를 털어 냈다. 저 아래 정원에는 노란 꽃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아우라는 그 흐트러진 꽃 무덤을 보다가 발코니를 떠나려 했다. 그때, 그녀의 맨발에 뭔가가 밟혔다.
“……아.”
어쩌다가 미처 밖으로 떨어지지 못했는지 수선화 한 송이가 남아 있었다. 그녀는 허리를 굽히고 수선화를 주웠다. 그리고 미련 없이 발코니 밖으로 내던지려던 순간이었다.
“…….”
수선화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아우라가 눈을 감고 향기를 맡았다. 미약하지만 고작 그 한 송이 꽃에도 향기가 있었다.
***
본궁 건물 앞 정원.
테오와 조쉬는 어쩔 줄을 모른 채 서 있었다. 그들 앞엔 수선화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황후가 완전히 식음을 전폐했다고 한다. 안 그래도 건강한 체질은 아니어서 황궁의가 발을 동동 구른다고도 했다.
게다가 황제가 보낸 꽃을 모두 발코니 밖으로 내버리다니.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카를이 그 처참한 꽃 무덤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씁쓸한 웃음을 지은 채로 수선화를 내려다보았다.
우습게도 아우라에게 맞은 가슴이 아직도 아팠다. 그 주먹이 강할 게 뭐가 있다고. 이 낯선 통증이 가슴 저 안쪽까지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처음 느껴 보는 고통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하다가도 이따금 사람을 옴짝달싹 못 하게 하는.
‘아니, 어쩌면 주먹 때문이 아니었을지도.’
‘네가 날 죽고 싶게 만들고 있으니까.’
그 말이 뇌리에 박혀 떨어지질 않았다. 그건 아우라가 지금껏 했던 거짓말이나 조롱과는 결이 달랐다. 그 말엔 가시가 아니라 상처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으니.
처음 단검 이야기를 들었을 땐 황당했다. 내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고 생각했으면 얼굴을 보자마자 따졌어야지. 어째서 이제껏 그것을 참은 건지. 결국 이렇게 끙끙댈 거면서.
하지만 얼굴을 가리고 울음을 터트리던 모습을 보니 알 것도 같았다.
그 전날 밤, 아우라가 정원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자격을 운운하는 카를에게 무슨 말을 하려다가 참았는지도.
카를은 생각했다. 너무 아픈 기억이라 차마 꺼내기조차 두려운 마음에 대해서.
‘……그 기억 때문에 내가 널 용서할 수가 없잖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를을 용서하려고 했던 그 마음에 대해서.
그런 마음에 대고 무슨 해명을 하고 변명을 한단 말인가. 염치도 없이.
카를은 고개를 들어 아우라의 방을 보았다. 천천히 깜빡이는 그 눈가가 거뭇했다. 그는 지난 사흘간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래. 염치가 없지. 염치가 없는데…….’
“……그래도 살려야지.”
***
그날 밤, 아우라는 여전히 침대에 웅크려 누워 있었다. 커튼 틈 사이로 들어온 실 같은 달빛이 그녀의 침대에 가늘게 떨어졌다.
달칵.
노크도 없이 침실 문이 열렸다. 이 시간에 이런 식으로 저 문을 열 수 있는 이는 한 사람뿐이었다.
카를.
아우라는 눈을 감았다.
저벅, 저벅, 저벅.
익숙한 발소리가 침대로 다가왔다. 카를이 침대에 걸터앉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는 어둠 속에서 한참을 그렇게 앉아만 있었다.
망설이던 손길이 그녀의 등에 살짝 올라왔다.
“꽃을 다 버렸다지.”
피로와 불면에 절어 거칠게 갈라진 목소리. 그 목소리에 아우라는 눈을 더 꽉 감았다.
“프릿이라는 기사가 있었어. 널 잡으러 안센나로 갔을 때 그놈이 널 모욕해서 내쫓았지.”
“…….”
“3년 전 데블라로 떠나던 날…… 하필 그놈에게 네게 단검을 전달하라고 시켰어. 내가 돌아올 때까지 꼭 살아남으라는 전언도.”
“…….”
“쫓아낸 후에 알아보니 순혈주의자였더군.”
하지만 인제 와서 프릿을 데려온다고 해도 그의 말이 증명되는 건 아니었다. 카를이 그에게 거짓말을 시키는 건 너무나 쉬운 일이니. 그리고 카를 역시 그걸 잘 알았다.
“믿어 달라는 건 아니야. 그러기도 힘들겠지.”
“…….”
“하지만…… 네가 날 끝내 용서하지 못한다고 해도 난 후회하지 않아. 그런 식으로 널 떠난 것도, 네게 검을 줬던 것도.”
“…….”
“네가 이렇게 살아 있으니까.”
아우라가 시트를 움켜쥐었다. 카를이 그새 더 마른 아우라의 팔을 쓰다듬었다.
“아우라. 난 이렇게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인간이야. 하지만 넌 항상 더 나은 방법을 알고 있지.”
“…….”
“그러니 적선하는 셈 치고 알려 줘. 어떻게 해야 네 마음이 나아질지.”
아우라가 스르르 몸을 돌렸다. 그녀의 하얀 팔이 카를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서서히 아래로 끌어 내렸다. 짙게 가라앉은 그녀의 눈이 어두웠다.
“……안 알려 줘.”
쇳소리 섞인 목소리가 그에게 속삭였다.
“제대로 사랑하는 방법 같은 건, 네겐 안 알려 줘.”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에 순간 생기가 돌았다. 그 생기가 증오에서 비롯된 걸 알면서도 카를은 그 눈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소름이 끼칠 만큼 확실하게 깨달았다.
자신이 얼마나 이 여자를 사랑하고 있는지.
“알려 주기 싫다면 원하는 걸 말해. 떠나는 것만 아니라면 뭐든.”
아우라가 어이가 없다는 듯 카를을 보았다.
“원하는 거?”
“그래.”
아우라의 눈에 다시 한번 생기가 돌았다. 그녀가 카를의 옷깃을 더 세게 잡았다.
“핀을 내놔.”
“……뭐?”
“당장 핀을 내놔.”
“…….”
“네가 가지고 있잖아.”
그녀는 더는 카를 몰래 움직이지 않기로 했다. 그녀가 원하는 걸 그가 갖고 있고, 그는 그녀를 원하니까. 결국 처음부터 답은 한 가지였을지도 몰랐다.
빼앗는 것.
카를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는 제 목깃을 움켜쥔 아우라의 손을 감싸 잡았다.
“정말 그걸 원해?”
“……그래.”
카를이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 내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우라의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는 뒤를 돌았다. 그리고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아침 내 방으로 와. 핀을 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