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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38)화 (38/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38화

“……외출? 너랑?”

“응. 내가…….”

카를은 말을 골랐다.

“네 드레스 찢을 때 말했잖아. 새로 사 주겠다고.”

“아.”

여지없이 떠오르는 그날 밤 일에 아우라가 눈을 피했다. 그러나 이내 동요하지 않은 척 말했다.

“받은 걸로 칠게.”

“그럼 조건 성립 안 되잖아.”

“……정말 외출이 저수조를 짓는 조건이야?”

카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우라는 옅은 한숨을 쉬며 체념 조로 말했다.

“그래. 하자, 외출.”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그는 문 앞에서 물러났다.

“좋아. 내일 오후에 봐.”

그렇게 제멋대로 약속 시간까지 정해 버리며.

방을 나온 아우라는 겨우 안도했다. 방을 뒤졌다는 의심은 받지 않은 것 같았다.

‘카를이 핀에 대해 내게 말하지 않은 건 그걸 가지고 거래를 할 마음조차 없어서야. 철저히 숨기겠다는 의도……. 라이언도 제가 핀을 가지고 있다곤 하지만…….’

아우라는 카를의 집무실을 빤히 보았다.

‘카를의 성격상 그런 물건의 존재를 알았으면 무조건 제 손아귀에 넣었을 거야. 어쨌거나 핀은 카를에게 있어.’

문제는 핀에 접근하는 방법이었다. 이미 그의 서재를 뒤지다가 큰일이 날 뻔하지 않았는가. 제대로 잠입을 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나 혼자 힘으로는 무리야. 어서 루안이 와 줘야 해. 하루라도 빨리.’

아우라는 생각에 잠긴 채로 황궁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

다음 날, 황제 부부가 탄 마차가 황궁을 나섰다. 검소한 마차에 최소한의 시종과 기사만 거느린 모습이 평범한 귀족 부부 같았다.

아우라는 무료한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마주 앉은 카를은 아우라를 빤히 보고 있었다. 곧게 편 허리와 목, 적당한 긴장감이 어린 어깨, 살짝 포개어 맞잡은 손 같은 것을. 그리고 마지막엔 그녀의 손톱에 시선을 두었다.

“손톱, 다시 자랐네.”

“아.”

아우라가 무심코 제 손톱을 보았다. 북쪽 탑에 있을 때 상했던 손톱은 얼마 전에 완전히 잘라 냈다. 이제 매끈한 새 손톱이 그녀의 손끝을 지키고 있었다.

“손톱이야 새로 자라는 거니까.”

카를은 뭔가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대신 그는 이렇게 물었다.

“뭘 좋아해?”

“응?”

“네가 하고 싶은 걸 하자. 사고 싶은 걸 사던가.”

아우라가 눈을 천천히 깜빡거렸다.

“그럼 다시 들어가고 싶은데.”

카를이 실소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안타깝겠지만 그런 선택지는 없어.”

“그렇다면 네가 말했던 대로 드레스를 사러 가. 살롱은 예약했어?”

“응. 아, 그보다 먼저 식사하러 갈 거야.”

“뭐? 그런 말은 없었잖아.”

“드레스를 금방 고를 리가 없으니까. 뭐라도 먹고 시작해야지.”

“난 금방 골라. 사실 네가 가서 골라 와도 상관없어.”

“아우라. 이미 가게를 통째로 예약했어. 안 가면 그쪽 손해가 막심할 테고, 황실을 욕하겠지.”

황당한 소리였다. 그러나 아우라를 아주 잘 아는 소리이기도 했다. 황실이 욕을 먹는 건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가게에 손해를 끼칠 수야 없었다.

“제멋대로잖아. 그럴 거면 묻기는 왜 물어.”

“미안해.”

아우라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카를의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이 나온다고?

“제멋대로 굴어서 미안해. 나도 이렇게 나와 본 게 처음이라서.”

‘왜 저러지? 무슨 일이라도 있나?’

“……알았어.”

그녀는 이쯤 하기로 했다. 잘 생각해 보면 식당 예약을 했다고 따져 대는 것도 우스운 일이니까.

이윽고 마차가 식당 앞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린 아우라가 거리를 둘러보았다. 사람이 북적거리는 거리에 활기가 돋았다. 시집을 온 후 황궁 밖으로는 거의 나가지 못해서였을까. 기분이 들떴다.

“들어가자.”

카를이 식당 문을 열어 주었다. 아우라가 멈칫했다.

‘아, 바로 앞이었구나. 좀 더 걸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우라는 아쉬운 눈으로 거리를 바라보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드넓은 식당이 통째로 비어 있었다. 기다리던 종업원이 줄지어 허리를 숙였다. 급작스럽게 황제 부부를 맞이한 식당 지배인은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카를이 지배인에게 물었다.

“우리가 온다는 건 비밀로 해 뒀겠지?”

“물론입니다, 황제 폐하. 주방에도 수석 요리사와 주방장만을 남겨 뒀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그들은 창가의 커다란 테이블로 안내됐다. 테이블엔 와인이 준비되어 있었다. 카를이 아우라의 잔에 와인을 따라 주었다.

“와인은 잘 몰라. 가장 비싼 걸로 준비하라 했으니 나쁘진 않겠지.”

아우라가 말없이 와인을 마셨다. 쌉싸름한 끝 맛에서 싱그러운 포도 향이 번졌다. 그녀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아우라는 턱을 괸 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거리는 여전히 활력이 넘쳤다.

“아우라?”

카를이 가만히 아우라를 불렀다. 아우라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좋네.”

“뭐?”

제대로 듣지 못한 카를이 되물었다.

“좋다고. 이렇게 밖에 있는 것도.”

아우라가 그를 보고 싱긋 웃었다. 순간 와인 잔을 잡으려던 카를의 손이 미끄러졌다. 하마터면 테이블 밖으로 떨어질 뻔한 잔을 카를이 얼른 잡았다. 아우라가 물었다.

“괜찮아?”

“……괜찮아.”

그는 시선을 피하며 잔에 와인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윽고 종업원들이 음식을 가져왔다. 하나씩 맛만 봐도 배가 부를 정도로 그 종류가 많았다. 저 멀리서 요리사들이 긴장하며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우라가 말했다.

“맛이 좋네.”

“다행이군.”

그는 할 말이 있는 듯 아우라의 눈치를 살짝 보았다. 그녀가 왜 그러냐는 듯 카를을 보자 그가 입을 열었다.

“테인 공작가의 공작 위 계승 문제에 황실이 관여해 보려고 해.”

“그래? 어떤 방식으로?”

“일단 엘리제와 이야기를 좀 나눠 보려고. 어떤 방식으로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은밀할 수도 있어.”

“아.”

“너에게 미리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서.”

“나는…….”

상관없다고 말하려 했다. 카를에게 흔들리지 말자고 이미 다짐했으니. 두 사람의 만남을 굳이 막고 싶지도 않았다. 게다가 공작 위에 관한 일이라면 아우라도 엘리제가 조금 신경 쓰였다.

‘그러고 보니 상관없다고 말했을 때 화를 냈었지.’

아우라는 말을 다시 골랐다.

“나는 괜찮아. 뜻대로 해.”

“이해해 줘서 고맙군.”

그들은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잠시 후, 아우라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원래 많이 먹는 사람은 아닌지라 어떤 접시는 손도 대지 못했다. 아직 음식이 수북한 접시를 보며 아우라가 생각했다.

‘또 한 소리 듣겠네.’

아니나 다를까, 카를이 아우라의 접시를 보며 물었다.

“다 먹은 거야?”

“응. 더는 못 먹어. 정말 맛있지만.”

“그래, 그럼 그렇게 해.”

아우라가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카를을 빤히 봤다. 그 시선에 카를이 어리둥절하며 물었다.

“뭘 그렇게 봐?”

“웬일이야? 한 소리 할 줄 알았더니.”

“왜 그런 생각을 하지?”

“나 마른 거 싫어하잖아.”

“내가 언제 널-!”

카를이 언성을 높였다가 꾹 눌러 참았다.

“……내가 언제 널 싫어했어.”

“반지에 손가락을 맞추라든가, 굶어 죽는 것보단 낫다든가. 그랬잖아.”

할 말이 없었다. 모두 카를 자신이 떠든 소리가 맞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나름의 이유가 없던 건 아니었다.

“내 새끼손가락에도 안 들어가는 반지가 너한테는 헐렁한 게……. 젠장, 그런 건 말이 안 되잖아.”

“…….”

“싫은 게 아니라 걱정돼서 한 말이야. 네가 예전처럼 다시 건강해졌으면 해서.”

미안하다는 소리에 이어 걱정했단 소리까지. 아우라는 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했다. 자신의 상처가 저 몇 마디 말에 괜찮아질 수 있는 거라면. 그랬다면 참 좋았을 거라고.

아우라가 냅킨으로 입을 닦고 말했다.

“드레스를 보러 간다고 하지 않았어?”

“그래. 가야지.”

두 사람은 식당을 나섰다. 살롱은 바로 옆 블록에 있어서 아우라는 다시 한번 아쉬워졌다. 그러나 내색은 하지 않고 살롱으로 들어갔다.

드레스를 고르는 일은 싱겁게 끝났다. 처음에 카를은 영 불편한 듯 구석에 서 있었다. 살롱은 너무 환했고, 반짝였으며, 모든 사람이 여자였다.

아우라는 도록만 보고 세 벌의 드레스를 골랐다. 보다 못한 카를이 그녀를 끌고 살롱을 돌았다. 그리고 거의 억지로 그녀에게 두 벌의 드레스를 더 고르도록 했다.

그렇게 다섯 벌의 드레스를 주문하고 나서야 쇼핑이 끝났다. 그새 해가 져 버린 거리는 어둑어둑했다.

“이제 들어가는 거야?”

아우라가 슬쩍 물었다.

“한 군데 더 들려야 해.”

“또 어딜?”

“일단 좀 걷자. 거리가 꽤 되거든.”

“……마차는 어쩌고?”

“알아서 따라오겠지. 그리고 너, 걷고 싶어 했잖아. 아까부터.”

아우라는 시침을 뗄 생각도 못 하고 눈만 깜빡였다.

‘내가 그렇게 속내가 잘 보이는 사람이었나.’

게다가 ‘그’ 카를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채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 외출이 점점 데이트를 닮아 간다는 건 확실히 문제였다.

“그래, 가자. 대신 나에게 말 걸지 마.”

“……그게 무슨 의미야?”

“밤거리는 걷고 싶은데 너와 대화하긴 싫어서.”

그녀는 노골적이었다. 너무 노골적이어서 카를은 웃고 말았다.

“하…… 아하하하…… 하하…….”

“카를. 왜 웃어?”

“하하하……. 정말, 아우라…….”

거리를 지키자고 한 말이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카를의 눈엔 눈물까지 고였다.

‘저렇게 웃는 거 처음 봐.’

어렸을 적 카를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물론 그 시절 그는 이렇게 해사하게 웃어 본 적이 없었지만.

“난 너를 절대 못 이길 거야. 자, 가자. 입 다물고 가 줄게.”

카를이 팔을 내밀었다. 아우라는 그 팔을 잡았다.

두 사람은 걷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바빴고, 아이들은 뛰어다녔으며, 장사꾼들은 목청이 좋았다. 황궁에서는 좀처럼 느낄 수 없는 풍경에 아우라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카를은 그런 아우라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팔을 더 당겨 잡았다.

잠시 후, 두 사람은 한 가게 앞에 멈춰 섰다.

그곳은 보석 세공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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