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37화
간단한 아침 회의를 마치고 카를이 일어나 창가로 갔다.
눈부신 햇살에 미간을 찌푸릴 때였다. 조쉬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말을 건넸다.
“아, 폐하. 한 가지 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카를이 여전히 창밖에 시선을 던진 채 대답했다.
“말해.”
“황궁 북쪽의 망루 설치 작업이 거의 다 끝났습니다.”
카를이 뒤를 돌았다.
“끝났다고?”
“끝난 건 아니고…… 곧 끝납니다.”
얼마 전 카를은 조쉬에게 망루 설치를 명령했다. 그 작업이 생각보다 빨리 끝난 모양이었다. 카를이 담백하게 말했다.
“공사가 끝나는 대로 북쪽 탑을 철거해.”
“……예? 갑자기요?”
“그래. 이제 필요 없잖아. 새 망루도 있고.”
“아…… 네. 알겠습니다.”
북쪽 탑은 황궁 방어용으로 쓰기에 아직 멀쩡했다. 하지만 워낙 단호한 명령에 조쉬는 고개를 갸웃하며 집무실을 나섰다.
반면 테오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서 있었다.
‘탑을 철거하신다고? 무슨 생각이신 거지?’
“저…… 폐하.”
“아, 아직 안 나갔었군. 무슨 일이지?”
“혹시 황후 폐하를 생각하셔서 북쪽 탑을 철거하시는 건가요?”
“맞아. 둬 봤자 안 좋은 생각만 들 게 뻔하잖아.”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테오가 보기엔 그 이유가 너무 단순했다.
“황후 폐하와…… 상의는 하신 거죠?”
“상의가 필요한 일인가?”
‘이크. 말씀을 잘 드려야겠군.’
테오에게 카를은 뛰어난 기사이자 주군이었다.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만큼.
그러나 그런 테오의 눈에도 카를은 분명 감정적 결여가 있었다. 척박한 삶에서 살아남은 사람 특유의 삭막함과 약간의 독선이 그랬다.
그에 비해 아우라 황후는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그녀는 감정적으로 풍요로운 환경에서 자라났다. 카를보다 감정적으로 훨씬 섬세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유폐는 내가 감히 말로 꺼내기도 죄송한 일이다. 폐하께서 직접 느끼게 해 드리는 게 낫겠지.’
“저기, 폐하.”
“응.”
“혹시 북쪽 탑에 가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북쪽 탑에? 아니.”
테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철거를 할 때 하시더라도, 그곳에 한번 들러 보시죠.”
“굳이 왜 그래야 하지? 어차피 없앨 텐데.”
“황후 폐하께서 3년 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그래도 한 번쯤은 보셔야죠.”
테오는 혹시 카를이 거부할까 봐 걱정스러웠다. 그는 일을 간결하게 처리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카를은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래야겠군.”
***
저벅저벅…….
카를은 탑의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이런 봄 날씨에도 이곳은 냉기로 가득했다.
계단에 간간이 손수건만 한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탑은 본래 몸을 숨기고 황궁을 방어하는 용도였다. 창문이 작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열악하군. 방은 좀 나으려나.’
그는 탑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녹슨 철문이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무심코 문을 열려던 때였다.
깡!
구두 앞코에 뭔가가 차였다. 아래쪽에 작은 철판이 박혀 있었다.
‘이게 뭐지?’
카를이 앉아서 철판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끼이이이-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철판이 위로 올라왔다. 딱 서류만 한 크기의 구멍이 드러났다. 그는 비로소 그 구멍의 존재 이유를 깨닫고 할 말을 잃었다.
그것은 배식구였다.
“이런 미친…….”
카를이 문을 힘껏 열었다.
쾅!
벌컥 열린 문이 돌벽에 세게 부딪혔다. 순간 쥐와 벌레들이 어둠으로 사사삭 달아났다.
“…….”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 손바닥만 한 창문. 그 창문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햇빛. 한눈에 봐도 더럽고 거친 모포. 감옥에 있는 건 그게 다였다.
‘이런 곳에서 3년을…….’
그래도 아우라는 왕녀였다. 민심을 생각해서라도 최소한 사람다운 곳에 가뒀을 줄 알았다. 침대와 햇빛이 있는.
그는 잠시 굳은 채 그렇게 서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적을 만난 듯 감옥 곳곳을 노려보았다.
대체 누구부터 원망해야 할까.
황태자? 말할 것도 없었다. 시신을 땅에서 다시 꺼내 목을 자르고 싶었다.
부황? 분명 아우라를 살려 준다고 약속하지 않았나. 그런데 여긴 스스로 목숨을 끊어도 이상하지 않을 곳이 아닌가. 황태자가 아우라를 이런 곳에 가둔 걸 그냥 뒀다고?
아니, 사실은 카를 자신이었다.
‘어떻게 이토록 안일할 수가 있었을까. 왜 테오가 말하기 전까진 이곳을 확인할 생각도 못 했지?’
끼이이익-
등 뒤에서 문이 닫혀 갔다. 카를이 뒤를 돌았을 때였다.
“……하.”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 단단한 철문에 손톱자국이 나 있었다. 오래전에 스며든 검붉은 핏자국도 함께였다.
지금껏 그가 아는 가장 끔찍한 지옥은 데블라의 빙하 지대였다. 많은 기사가 그곳에서 동사했다. 그렇게 죽는 건 차라리 나았다. 심약한 자들은 몇 주째 이어지는 똑같은 풍경에 미쳐 버렸다. 그때마다 카를은 직접 그들을 고통 없는 세상으로 보내 줘야 했다.
그 빙하 지대조차도 여기보단 나은 것 같았다. 적어도 그곳에서 카를은 혼자가 아니었다.
‘미치지 않은 게 신기하군.’
카를은 이제야 이해했다. 아우라가 왜 그렇게 성마른 사람이 되었는지. 왜 그렇게 상처를 주고 싶어 하는지.
‘나는 나락까지 떨어졌으니까.’
그녀가 왜 스스로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
‘넌 어쨌거나 3년간 안전한 곳에 있었잖아.’
제가 한 그 말에 왜 그렇게 참담한 얼굴을 했는지.
그 참담함은 이제 카를에게 밀려왔다. 이 탑을 바라보던 아우라의 뒷모습이 또다시 떠올랐다. 이곳에서의 기억은 분명 그녀를 갉아먹고 있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없애자. 한시라도 빨리.’
카를은 감옥을 나섰다.
쿵.
철문이 닫혔다.
***
며칠 후.
아우라는 서류를 한 부 가지고 카를의 집무실을 찾았다. 문 앞을 지키던 시종이 그녀에게 예를 차렸다.
“황후 폐하.”
“문을 열어다오. 폐하께서는 안에 계시지?”
“아니요. 보좌관과 함께 잠시 외출하셨습니다.”
‘그럼 아무도 없다는 소리군. 기회야.’
아우라는 시종에게 말했다.
“서류를 두고 나올 테니 열어다오.”
“네, 폐하.”
어차피 황제와 황후가 황실 업무를 나눠서 하고 있었다. 딱히 황후를 들이지 말란 명령도 없었기에 시종은 문을 열었다.
아우라는 방으로 들어갔다. 집무실은 고요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빨리 살펴보자. 서재는 잠겨 있을 테니 집무실이라도.’
그녀는 책장에 딸린 서랍을 하나씩 열어 보았다. 아무리 살펴봐도 수정구 같은 건 도통 보이지 않았다. 다음에는 책상이었다.
드르륵.
책상 서랍을 열자 온갖 물건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런 점은 조금 의외라고 생각하며 서랍을 닫았다.
서랍은 모두 네 개였다. 마지막 서랍을 열자 이것저것 휘갈긴 메모지들이 가득했다. 그녀가 서랍을 닫으려던 순간, 스치듯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율리우스.’
그리고 그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아우라는 황급히 서랍을 닫고 소파 쪽으로 물러났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카를이 들어왔다. 그는 시종에게 이야기를 들은 듯 아우라를 보고 놀라지 않았다. 아우라는 태연하게 소파에서 일어났다. 심장은 쿵쿵 뛰고 있었지만.
“어딜 다녀왔어?”
“새 망루를 다 지어서 확인차 보고 왔어. 너는 무슨 일이야?”
“아, 이거 때문에.”
아우라가 카를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카를이 그 내용을 훑어보았다.
“안센나에 우물을 더 짓겠다고?”
“고질적으로 물 문제가 있잖아. 돈은…… 황실 예산이 부족하다면 내가 충당할 테니 진행했으면 해. 황실 명의로 공사를 하면 카사인들 여론이 안 좋을 수도 있으니 내 명의로 해도 좋고.”
침착하게 굴려고 해도 자꾸만 말이 길어졌다. 방금 봤던 율리우스의 이름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카를은 역시 알고 있어, 핀의 존재를.’
카를은 그녀를 멀뚱하게 보았다. 아우라는 불안했다.
‘방을 뒤진 걸 눈치챈 건 아니겠지.’
“숨넘어가겠어, 너.”
“……어?”
“누가 쫓아와? 말이 왜 그렇게 빨라?”
카를이 픽 웃었다. 아우라는 손에 난 땀을 몰래 치마에 닦았다.
“……안센나 생각을 하니까 마음이…… 급해서.”
“일단 살펴보지.”
카를은 서류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습관처럼 살짝 찡그린 미간에 눈빛은 예리했다. 그 얼굴을 보니 아우라는 문득 깨달았다. 봄 무도회 이후 그를 보는 게 처음이라는 것을.
“그 지역이 워낙 척박하니 우물로는 한계가 있지 않아? 안센나에서 좀 멀긴 하지만…… 수론 지방에 호수가 하나 있어. 거기서 물을 끌어다가 저수조에 담아 쓰는 편이 나을 거야.”
“그 방법을 몰라서 우물을 짓는 건 아니야.”
물을 끄는 수로교나 저장하는 저수조를 짓는 건 엄청난 돈이 들었다. 아우라가 모든 보석을 팔아도 불가능했다.
카를은 서류를 제 책상에 올려 두었다.
“짓자. 황실 이름으로.”
아우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봤다. 뒤에 있던 테오의 눈은 더 커졌다. 그는 얼른 나섰다.
“폐하, 죄송합니다만 올해 예산이 그렇게까진…….”
“돈은 내 사비로 충당하지.”
“아…… 예.”
“테오, 말이 나온 김에 관련 서류를 준비해 줘.”
“네, 폐하.”
테오는 집무실을 나갔다. 한편 아우라는 생각했다.
‘그 큰돈을 사비로 충당한다고?’
돈이 많은 건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것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정말 그래도 괜찮은 거냐고 물으려다가 그녀는 그만두었다.
“그래, 정말 고마워. 그 부분은 내가 서류로 정리해서 다시 올릴게.”
아우라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곤 집무실을 나서려 했다.
집무실 문에 거의 다 왔을 때였다. 카를이 저벅저벅 다가오더니 그녀의 앞을 막았다.
“……왜 그래?”
카를은 문에 등을 툭 기댔다. 그리고 조금은 머쓱하게 그녀에게 말했다.
“저수조를 짓는 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
아우라는 이럴 줄 알았지 싶으면서도 긴장됐다. 그 큰돈을 제공하는 조건이 뭘지 감도 안 잡혔다.
“조건이 뭔데?”
“나와 외출 한 번만 해.”